21.09.08 08:57최종 업데이트 21.09.08 08:57
  • 본문듣기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은 지 3년 뒤, 세계인들이 평화를 꿈꾸며 국제연맹을 세운 지 2년 뒤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1년 9월 8일 워싱턴 동북쪽 애틀랜틱시에서 제1회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가 개최됐다.

해안도시 애틀랜틱의 관광객 유치를 명분으로 열린 이 대회에서 1905년 생인 마거릿 고먼(Margaret Goman)이 1등을 차지했다. 워싱턴의 서부고등학교(Western Highschool) 3학년인 고먼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영복 소녀'라는 찬사를 받으며 최초의 미스 아메리카가 됐다. 그 후에도 미인대회에 계속 참여한 그는 사교계 명사로 활동하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수영복을 입혀 놓고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 대회는 그 당시에도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 제2회 대회 때는 57개 도시에서 지역 예선이 열렸을 정도다. 이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미 전역에서 미인대회 수천 개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반격 전쟁
 

마가렛 고먼. ⓒ 퍼블릭 도메인

 

1921년이면 조선에서 최대 2백만 명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지 2년 뒤다. 이 시점에 제1회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가 열리고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됐으나 이는 세계대전 종결 뒤의 평화적 분위기와는 무관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반격 전쟁의 개시였다. 제1회 대회 이전에 전개된 현상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당시의 세계 각국은 미국을 정의와 공정의 나라로 생각하면서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여성운동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백인 남성 기득권 세력에 맞서 여성해방운동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사회적 약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약자들의 단합 행동에 밀려 힘이 부칠 때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만,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어김없이 반격을 가해 원상태로 되돌리는 나라였다.

미국 여성들이 자기 권리를 되찾고자 투쟁하면 미국 남성들이 되돌려주는 척하다가도 반격을 가해 도로 빼앗는 그 같은 양상을 1991년에 미국 언론인 수전 팔루디(Susan Faludi)가 펴낸 <백래시>는 이렇게 서술한다.
 
여성의 권익 신장을 저지하려는 반격은 미국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사실, 이 현상은 반복되어 나타났다. 여성들이 평등을 향해 조금이라도 전진할 때마다 반격은 마치 문화계에 잠시 만개했던 페미니즘에 찬물을 끼얹는, 필연적인 이론 서리(서릿발 같은 이론 공세- 필자 주)처럼 다시 등장한다. 미국 문학가 앤 더글라스(Ann Douglas)는 다른 유형의 진보와는 달리 우리 문화 내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은 항상 이상하게 원상회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성차별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마지못해 들어주다가도 상대가 승리에 만끽해 방심한 사이에 서릿발처럼 이론적 반격을 퍼붓는 남성 기득권 세력 앞에서 미국 여성운동은 번번이 좌절되고 정체됐다.

그런 반격(backlash)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양상을 위 책은 "여성 사학자들은 수년간 미국 페미니즘의 '가다 서다 하는 행보'와 발작적인 움직임, 자꾸 끊어지는 걸음걸이 앞에서 어리둥절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마거릿 고먼이 유아기를 지나 유년기로 접어든 시기에, 미국 여성운동은 참정권 획득을 위한 맹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투쟁은 1919년 6월 4일 발의되고 이듬해 8월 18일 비준될 미국 수정헌법 제19조에 의해 결승선에 도달하게 된다.

제19조는 "합중국 시민의 투표에 관한 권리는 합중국이나 어느 주에 의해서도 성별 때문에 부정되거나 축소돼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 승리를 도출한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 관해 2012년 <서양사론> 제113호에 실린 역사학자 박현숙의 '연방헌법 수정조항 제19조의 제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 중 하나는 여성 참정권 문제일 것이다. 19세기 초 노예제 폐지 운동과 함께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은 1919년 연방헌법 수정조항 19조가 상하 양원에서 통과되고 1920년 비준을 받게 됨으로써 투쟁의 막을 내리게 된다. 수정조항 19조를 제정하여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일은 20세기 미국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설명한 뒤 "여성 참정권 획득은 쉽게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며 "그 과정은 길고 험난하였으며 약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논문은 평한다.

그러나 미국 기득권 세력은 여성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100년에 걸쳐 획득한 승리를 그냥 좌시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백래시'에 나섰다. 기득권 세력이 구체제를 옹호하는 여성들과 합세해서 벌인 총체적 반격을 수전 팔루디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전쟁부는 재향군인회와 애국여성회의 지원 속에 여성운동 지도자들을 상대로 빨갱이 사냥을 조장했다. 샬럿 퍼킨스 길먼(Chariotte Ferkins Gilman)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갑자기 자신의 글을 발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제인 애덤스(Jane Addams)에게는 공산주의자에 '국가 안보의 중대한 위협'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추방당했다.

기득권 세력의 메시지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100주년을 자축하는 미스 아메리카 홈페이지. ⓒ 미스 아메리카


성차별 기득권 세력이 여성운동가들을'빨갱이'로 매도하며 반격을 가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마거릿 고먼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영복 소녀'로 선발됐다. 어떤 여성이 찬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기득권 세력의 메시지가 담긴 일이었다. 대회 자체는 애틀랜틱 관광객 유치를 명분으로 개최됐지만, 이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폭발적 인기까지 얻게 된 데는 남성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백래시>는 "빗발치는 공격 때문에 페미니즘 조직의 회원 수는 곧 급락했고, 나머지 여성 모임들도 황급히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수정 제19조)을 비난하거나 아니면 사교 모임으로 성격을 바꿔 버렸다"며 "한때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아비판적)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한 뒤 "미국은 여성들에게 동등한 존중 대신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제안했다"고 말한다.

수전 팔루디는 여성 참정권 획득 뒤에 일어난 제1회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를 다음 현상과 동일 선상에서 파악한다.
 
입법가, 노동계와 재계 지도자, 그리고 결국 일부 여성 집단들은 동등한 권리 대신 '보호를 위한' 노동정책, 대체로 남성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여성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데 기여한 이 조치를 승인했다.
 
여성 참정권 획득에 대한 반동으로 남성 기득권 세력이 반격에 나서는 상황에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가 개최됐다.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보호'를 청하기를 원하는 기득권 세력의 희망이 반영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는 제1차 대전 종전의 평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이 결코 아니었다. '여성 독립 만세'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미국 남성 기득권 세력이 벌인 반격 전쟁의 서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