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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석주명 선생이 거처했던 집 숙소이자 연구공간이었던 곳으로, 백년은 됐음직한 배롱나무와 무성한 풀로 덮힌 채 방치되고 있다.
▲ 석주명 선생이 거처했던 집 숙소이자 연구공간이었던 곳으로, 백년은 됐음직한 배롱나무와 무성한 풀로 덮힌 채 방치되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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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을 그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서귀포시 토평동 아열대농업연구소. 오늘 뜻밖에도 30여 년 전 제주도의 남국(南國) 정취에 푹 빠졌던 추억의 장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나비박사'를 만났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은 하늘이 보였다. 다행이다 싶어 예정대로 서귀포 보목리의 H선생 댁으로 향했다.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부모님이 제주분인 H선생은 어린 시절 강원도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대학 졸업 후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교직 생활을 했다. 자택 정원에 갖가지 수국을 가꾸고 있어 오늘 드디어 꽃구경을 간 것이다.

제주도에 흔한 게 수국이어서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보아 넘겼는데, H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며 자세히 살펴보니 수국도 천차만별 종류가 다양함을 실감했다. 수국과 산수국의 특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H선생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보목리와 이웃한 토평동에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이 연구하던 곳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 유명한 나비박사의 자취를 볼 수 있다니, 당연히 가보기로 했다.

나비박사의 자취

H선생을 따라 토평사거리 부근 도로변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니 숲이 우거진 곳에 오래된 단층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석주명 선생이 기거하며 연구하던 장소라는 것이다. 건물 입구에는 수령이 백 년도 넘어 보이는 배롱나무 고목 두 그루가 좌우로 마치 수호신인 양 지키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인기척은 없는 듯했고, 주위에 나무와 풀이 우거져 아예 집을 덮어버릴 듯한 형국이다. 낡은 현관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집안이 텅 비어 을씨년스럽다. 나비박사 석주명을 제주학의 선구자라고 칭송하면서 정작 그가 지냈던 집이자 연구공간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니!

우리는 이 건물 주변을 돌면서 천천히 살폈다. 집 뒤로도 오래된 고목들이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형 온실이 몇 군데 보이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했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30여 년 전에 취재차 왔던 곳이었다. 아열대연구소라는 명칭만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니까 제주대 산하 연구소 부지의 한쪽 편에 석주명 선생 연구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게 된 것이다.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애플망고가 자라고, 한쪽 편으로 바나나 나무가 보였다.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이 온실에서 커피나무를 시험재배 중이라고 해서 취재했던 기억이 났다.

일대를 둘러보고 토평사거리 쪽으로 나오자 석주명 기념비라고 쓴 안내 입간판이 보인다. 기념비는 나비 모양으로 조성한 화단에 세웠는데, 돌에 새긴 글씨가 희미하게 바랬다. 기념비 뒤로 석주명 선생의 작은 흉상이 돌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석주명 기념비 나비 모양으로 조성한 화단에 기념비가 서 있고, 그 뒤에 석주명 선생의 흉상이 돌 받침대 위에 놓여졌다.
▲ 석주명 기념비 나비 모양으로 조성한 화단에 기념비가 서 있고, 그 뒤에 석주명 선생의 흉상이 돌 받침대 위에 놓여졌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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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 선생의 유적지를 보러왔다가 뜻밖에도 옛 추억을 되살리게 됐다. 1980년대 중반 <과학동아>라는 잡지가 창간되는 바람에 부서를 옮겨 몇 년간 과학 기사를 쓸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세 차례 정도 제주도 출장을 와서 주로 제주도의 자연과 기후, 한라산의 식물생태 등을 취재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옛날에 썼던 기사들을 검색해봤다. 아열대연구소 관련 기사는 86년 4월호에 게재된 '제주도의 열대과일, 어떻게 기르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7장의 사진과 함께 4페이지로 편집돼 있었다.

밤늦게까지 옛 기사를 검색해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친김에 석주명이란 인물을 검색해보니 제주도와 관련된 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알게 됐다. 수국 보러 갔다가 석주명을 찾게 됐고, 다시 30여 년 전의 나를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깊어가는 밤, 다시 인터넷을 켜고 '석주명 평전'을 주문하고서야 잠을 청했다.

서점에 주문한 석주명 평전이 도착했다. 책을 펴자마자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석주명이 서귀포에 머문 것은 1943년 4월부터 45년 5월까지였다.

실력으로 일본인을 누른 석주명 

1942년,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박물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1년의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경성제대 의학부 생약연구소 촉탁으로 들어간다.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나비 연구에 몰두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신설된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에 자청하여 전근하게 된다.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석주명은 부임하자마자 제주도 방언 수집에 나설 정도로 열정적인 제주 생활을 시작했다. 25개월의 서귀포 근무시기에 그가 남긴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비 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 수필: 제주도의 자연과 인문', '제주도 곤충상' 등 제주도총서 6권이 이 시기의 연구결과였다. 이런 연유로 석주명은 제주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석주명은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제주도를 떠나 수원 농사시험장의 병리 곤충학부장으로, 1946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평생의 과업인 나비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언론 기고와 국제어 에스페란토 보급, 한국산악회 학술조사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석주명은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써서 외국학자와 교류한 것은 물론, 에스페란토 교과서와 소사전을 집필해 보급했고, 숱한 강습회를 통해 1930~1940년대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을 주도했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한 뒤 가고시마 농림전문학교 박물과(생물과) 졸업을 앞둔 무렵, 그의 학자적 자질을 알아챈 은사의 권유로 시작됐다.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지도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박물 교사 시절 그는 전국 산하를 돌아다니며 무려 75만 마리의 나비표본을 만들었다. 한반도 지도에 그가 나비를 채집한 곳을 빨간 점으로 표시해놓은 걸 보면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새빨갛다. 석주명은 엄청난 나비표본을 계통 분류하여 같은 종이면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844개를 퇴출시키고, 한국의 나비를 248종으로 정리했다.
 
석주명 선생 집 내부 텅빈 집안에는 나비와 관련된 참고자료 몇 점이 널려 있다.
▲ 석주명 선생 집 내부 텅빈 집안에는 나비와 관련된 참고자료 몇 점이 널려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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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들의 엉터리 나비 분류를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다. 새롭게 분류한 나비에게 우리말 이름을 지어준 것도 석주명의 몫이었다. 이런 그에게 '한국의 파브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혜성같이 등장한 조선의 젊은 나비학자 석주명은 30세에 동경제대에 초청받아 논문발표를 하고,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로부터 '조선산 나비 총목록' 집필을 의뢰받아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1940년 그의 나이 32세에 출판된 이 책은 한국인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도서관에 소장되면서 그를 세계적 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석주명 평전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박사학위도 없고 명문대학을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새벽 2시 이전에 잠들어본 적이 없고 식사시간도 아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우리보다 앞서 우리 것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들을 실력으로 눌렀다. 그리고 자연과학을 추구하면서도 인문정신에도 눈을 떠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기울였고, 업적을 이뤘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과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 

석주명의 치열한 생애는 불과 42세에 너무도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1950년 10월 전쟁통에 폭격으로 파괴된 국립과학박물관 재건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뜻밖의 사건에 휘말렸다. 충무로 4가 근처에서 술 취한 청년들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격을 당했다. 쓰러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였다.

석주명은 스스로 반(半) 제주인이라고 했다. 제주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다. 진정 제주를 사랑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석주명을 제주도가 너무 소홀히 여긴 건 아닐까.

들리는 말로는 몇 년 전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뭉쳐 그가 머물렀던 연구소 자리에 기념관과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업은 민간에만 맡겨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제주도가 나서서 예산을 지원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석주명 선생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고, 한편으론 제주도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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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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