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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는 장고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다. 무덤의 생김새가 우리의 전통 타악기 장고를 닮아 ‘장고분(長鼓墳)’이라 부른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는 장고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다. 무덤의 생김새가 우리의 전통 타악기 장고를 닮아 ‘장고분(長鼓墳)’이라 부른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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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는 언제부터 무덤을 만들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숭배하고 애착하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관하여는 많은 논쟁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여러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 10만여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죽은 이의 주검을 땅에 묻고 추모했던 것 같다.

최근 세계 3대 과학저널 중 하나인 <네이처(Nature)> 학술지에서는 현생 인류의 발원지인 아프리카에서 약 7만 8300여 년 전 사람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태어난 지 2~3살 된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현재 생존하고 있는 인류의 무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이를 통해 장례의례의 기원과 무덤의 변천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구석기시대에 묻힌 사람의 뼈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시대의 무덤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무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간단히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던 '움무덤'과 '독무덤' 집단 무덤 형태의 '동굴 무덤' 등이 출토되었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농경문화가 발달하고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돌널무덤과 독널 무덤 등 여러 형태의 무덤들이 만들어진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한반도 전역에는 약 3만여 개의 고인돌이 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남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는 광주 문화재자료 6호로 지정된 ‘용두동 지석묘’가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는 광주 문화재자료 6호로 지정된 ‘용두동 지석묘’가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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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형태인 고인돌을 비롯하여 마한 시대의 장고분(長鼓墳), 백제시대의 석실고분(石室古墳), 고려와 조선시대의 예장석묘(禮葬石墓)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조선시대 예장석묘까지. 각 시대별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고 무덤 속 인물들을 추모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용두동 지석묘'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는 문화재자료 6호로 지정된 '용두동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이곳은 서구 8경 중 제5경에 선정된 곳으로 자연경관과 역사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경제력이 있는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남방식 고인돌.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바둑판식’이라고도 한다
 남방식 고인돌.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바둑판식’이라고도 한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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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존속한 '거석(巨石) 문화'의 흔적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은 석붕(石棚), 유럽은 돌멘(Dolmen)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형태는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분한다. 남방식은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바둑판식'이라고 한다. 북방식은 판석 형태의 굄돌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으로 '탁자식'이라 한다.
  
북방식 고인돌. 판석 형태의 굄돌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으로 ‘탁자식’이라 한다
 북방식 고인돌. 판석 형태의 굄돌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으로 ‘탁자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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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 고인돌군에는 남쪽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북방식(탁자식) 고인돌 1기가 있어 매우 희귀한 사례로 보고 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남방식으로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10기이며 주변에 받침돌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2~3기 정도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그런' 영산강 유역의 고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과 명화동에는 길이 35~45m 높이 3~6m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들이 있다. 광주 기념물 제20호와 22호로 지정된 '월계동 장고분'과 '명화동 장고분'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2호 명화동 장고분. 이 무덤의 특징은 앞쪽은 네모난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원형을 취하고 있어 ‘전방후원형(前方後圓墳)’무덤이라고 한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2호 명화동 장고분. 이 무덤의 특징은 앞쪽은 네모난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원형을 취하고 있어 ‘전방후원형(前方後圓墳)’무덤이라고 한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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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생김새가 우리의 전통 타악기 장고를 닮아 '장고분(長鼓墳)'이라 부른다. 이 무덤의 특징은 앞쪽은 네모난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원형을 취하고 있어 '전방후원형(前方後圓墳)'무덤이라 칭한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3~7세기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유행한 무덤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주, 함평, 영암 등 주로 영산강 유역의 구릉지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축조된 이런 전방후원형 무덤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며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는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날조된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월계동 장고분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차례 도굴당했다. 1993년 전남대학교 발굴조사 결과, 마한시대 조성된 무덤으로 동굴 형태의 석실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모시는 '횡혈식석실 무덤'으로 밝혀졌다. 유리구슬을 비롯해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아가리 큰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월계동 장고분.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 차례 도굴당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월계동 장고분.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 차례 도굴당했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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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시작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결과 금귀고리, 쇠화살촉, 쇠손칼, 유리구슬을 비롯해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아가리 큰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1993년 시작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결과 금귀고리, 쇠화살촉, 쇠손칼, 유리구슬을 비롯해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아가리 큰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 전남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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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입구에 자리한 백제시대 '돌방무덤'

무등산에 오르려는 사람들 중 7할 정도가 거쳐가는 동구 운림동 학운초등학교에서 증심사 쪽으로 가는 도로변에 눈에 띄는 무덤이 하나 있다. 광주 지역 석실 무덤과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에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운림동 석실고분'이다.

이 돌방무덤은 백제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무등산 장원봉의 줄기로 옛 무진고성터와 연결되는 곳이다. 부근에 6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석실이 확인된 것은 2기뿐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운림동 석실고분’ 무등산 입구에 자리한 백제시대 돌방무덤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운림동 석실고분’ 무등산 입구에 자리한 백제시대 돌방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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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입구
 석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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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을 넣었던 석실은 작은 돌을 쌓아 올린 다음 천장에 두 장의 뚜껑돌을 서로 맞물리게 조립하여 그 무게로 양쪽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었다. 바닥에는 회갈색의 진흙에 잔돌을 섞어 단단하게 기초를 다졌고 그 위에 얇은 판석을 이중으로 깔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였다. 무덤 구조가 우리 지방에는 보기 드문 형태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말 명장, 정지 장군의 '예장석묘'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무등산 북쪽 자락 끝에는 고려말 명장,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경열사가 있다. 사당 뒤편에 급경사지를 깎아 조성한 묘역이 있다. 정지 장군과 후손들이 영면하고 있는 묘역이다.

묘역 맨 위쪽으로 오르면 지금까지 보아 왔던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무덤을 보게 된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정지장군 예장석묘(禮葬石墓)'다. 예장이란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왕족과 공신에 대한 국장 다음 가는 국가장을 말한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정지장군 예장석묘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정지장군 예장석묘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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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묘는 둥그렇지도 않고 봉분도 없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양옆 가장자리를 돌로 쌓았다. 이런 묘제는 고려 후기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우리 고장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무덤 앞면 가운데 묘비와 상석이 있고 석인 2기가 서있다.

장군은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수군 창설을 제안하였고 32살에 전라도 순문사(巡門使)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종군하여 그 공로로 공양왕 2년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봉분이 없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양옆 가장자리를 돌로 쌓았다
 봉분이 없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양옆 가장자리를 돌로 쌓았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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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도 감복한 전상의 장군의 예장석묘

이른 봄 제일 먼저 피는 노란 복수초 군락지로 유명한 무등산 북쪽 화암동 평두메 마을에는 또 다른 장군의 예장석묘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 예장석묘'다.

광주 3 충신 중의 한 명인 전상의 장군은 광주 구동에서 태어났다. 29살 때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 일어나자 평안도 안주성 방어사에 임명됐다. 평안병사 남이홍 안주목사 김준과 함께 싸웠으나 적들의 인해전술로 중과부적이 되자 부하들을 피신시키고 홀로 백상루에 올라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군의 시신을 발견한 후금의 오랑캐들은 "충신 열사의 죽음은 소중하게 모셔야 한다"라고 하며 정중히 묻고 따로 비를 세워 예를 표했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장군의 시신은 안주에서 광주 무등산으로 옮겨 예장하였다. 인조는 친히 제문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 예장석묘’ 아랫부분에 둘레석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와 문인석과 무인석이 장군을 호위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 예장석묘’ 아랫부분에 둘레석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와 문인석과 무인석이 장군을 호위하고 있다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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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와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 아랫부분에 둘레석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와 문인석과 무인석이 장군을 호위하고 있다. 묘역 근처에 유적보존회에서 세운 신도비가 있다.

무등산 원효사로 오르는 산장 가는 길 중간에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민사'가 있고 광주 도심에는 '구성로'라는 도로가 있다.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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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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