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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에 설치된 '제헌국회기념조형물'. 이 조형물엔 제헌국회 단체사진을 토대로 제헌의원 198인과 당시 국회 사무총장 등 모두 199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조형물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상은 제헌·2대국회의장인 신익희 선생.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에 설치된 "제헌국회기념조형물". 이 조형물엔 제헌국회 단체사진을 토대로 제헌의원 198인과 당시 국회 사무총장 등 모두 199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조형물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상은 제헌·2대국회의장인 신익희 선생.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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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는 5ㆍ10 총선을 통해 300명 정원에서 제주 4ㆍ3항쟁으로 2석, 북한의 불참으로 100석이 남겨진 채 198명의 의원으로 출범하였다. 당선자 중 최연장자인 이승만이 임시의장으로 사회봉을 잡았다가 의장선거에서 다시 선출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회는 8월 4일 새 의장단을 뽑았다.

국회의장 선거에서 신익희는 재석 176인 중 103표를 얻어 56표를 얻은 김동원을 크게 눌렀다. 부의장은 결선 투표까지 이어져 김약수가 87표, 김준연이 74표를 얻어 의장단이 구성되었다. 신익희는 언론인 출신 유광열을 비서실장에, 족친 신창현과 유치송으로 비서진을 짰다. 

신익희는 25세이던 1919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의 헌법 제정을 주도한 이래 31년 만에 56세로 '임시'를 뺀 대한민국 입법부의 수장이 되었다. 감회와 결의가 담긴, 그러나 겸양의 취임사를 하였다. 

이 불초 무능한 사람을 의원 동인 여러분께서는 버리시지 않고 의장으로 선거하신 데에 대해서는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한편으로 한량없이 송구한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국회가 성립된 이래로 다 같이 크게 어려운 짐을 같이 지고 오늘날까지 같이 투쟁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선 중요한 몇 가지 일을 우리로서 다 같이 지내 내려왔지만, 앞으로는 모든 가지의 큰 점도 여간 많지가 않을 처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국회로서 전 임무가 큰 가운데에 더욱이 의장이라는 책임을 지워주신, 큰 짐을 진 여러분 가운데에도 좀 더 큰 집을 지워주신 이 점에 대해서는 앞길을 전망하면서 착오나 혹은 은월(隕越)이 없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비상히 송구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일은 한 사람 두 사람의 개인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우리 전체가 다같이 공동하게 노력하는 데에서만 우리 일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시대와 이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 줄 압니다. 

이런 점에 우리 의원 동인 동지 여러분께서는 변함없이 같이 노력을 하시며, 다 같이 노력을 하시며, 다 같이 분투하시는 가운데에 여러분 뒤를 따를 때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 앞에 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 옆에 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여러분과 같이 사명을 달성하고 임무를 수행하려고 합니다. 간단한 몇 마디 말씀으로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주석 1)
국회도서실 개관식 국회도서실 개관식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 관계자들. 1952년 2월 20일 개관식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회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도서실’로 출발했다. 사진 오른쪽부터 존 무쵸 주한 미국대사, 윤택중 의원, 신익희 국회의장, 박종만 국회사무총장이다.
▲ 국회도서실 개관식 국회도서실 개관식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 관계자들. 1952년 2월 20일 개관식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회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도서실’로 출발했다. 사진 오른쪽부터 존 무쵸 주한 미국대사, 윤택중 의원, 신익희 국회의장, 박종만 국회사무총장이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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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실론을 들어 5ㆍ10총선에 참여하고 국회의장이 되었으나, 남북총선거를 주창하며 분단정부에 불참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이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을 준비 중인 이화장으로 찾아갔다. 

"우남장!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와 함께 건국의 기초를 마련함이 대의명분이 아니겠습니까?"

이 박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해공! 정치의 세계란 냉정한 것이오. 그 사람들이 정작 나와 함께 일을 한다면 좋으나, 그 뜻이 다른데 어떻게 될지 해공은 몰라서 하는 말입네까?"

이 박사는 끝내 반목을 풀지 않았다. 더 이상 이야기해 보았자, 진전이 없음을 느낀 신익희 국회의장은 실현가능한 문제를 제의했다. 

"우리 정부가 언제까지 남한에만 머물러야 되겠습니까? 삼천만이 한 민족 한 동포요, 삼천리금수강산이 다 한덩어리인데, 이북까지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일의 그 날에 대비하여 이북 각도에 5도청을 두고 지방관을 임명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통일의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 박사는 그의 제안을 즉석에서 쾌히 승낙하고, 그 인선을 부탁하였다. (주석 2)

이승만은 첫 조각 과정에서부터 독선적이었다. 거국적인 내각을 구성하기보다 측근을 중용하였다. 부통령 이시영과 국회의장 신익희의 조언도 수용하려들지 않았다.

국무총리 후보에 무명의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비토되자 국회 무소속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회의원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무총리에 조소앙을 천거하였다.

신익희도 이에 동참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3인 기초위원으로서 헌법과 각종 법규를 제정하면, 이후 그는 「건국강령」 기초 등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정부수립 과정에서는 김구ㆍ김규식과 노선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거부하고 이범석을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이승만이 유력한 국무총리 후보 물망에 올랐던 조소앙ㆍ김성수ㆍ신익희를 배제하고 이윤영을 지명했다가 국회에서 비토되고, 이어서 이범석을 지명한 과정을, 당시 한국 총선거와 정부수립에 관여하였던 '유엔조선위원단'은 「유엔조선위원단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내각조직에 있어 이박사의 의견과 국회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국회의원들은 국무총리 후보인물의 선택에 관하여 각종 각색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 비추어 이대통령은 국회에 대하여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이며 선거에 반대하였던 조소앙 씨, 한국민주당 당수인 김성수 씨, 전 망명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신익희 씨와 같은 정계거물들을 국무총리직에 임명하지 않는 이유를 선명히 하였다. 

이리하여 대통령이 국무총리로서 이전에 북조선에 거주하였으며, 1945년 평양에 조직된 조선민주당 부당수이고 현재 국회의원인 이윤영(李允榮) 씨를 지명하자 국회의원들은 헌법상의 특권을 행사하여 132대 59의 표결로서 이것을 거부하였다.

다음 민족청년단 단장인 이범석(李範奭) 씨에 대한 대통령의 지명이 국회에서 110대 84로서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거부의 차가 불과 26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대통령의 행위가 국회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주석 3)


주석
1> 『제헌국회 속기록』, 1948년 8월 4일.
2> 유치송, 앞의 책, 500~501쪽.
3> 임명삼 번역, 『유엔조선위원단보고서』, 162쪽, 돌베개, 198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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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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