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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신탁통치반대 시위 당시 경교장의 사진(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1946년 신탁통치반대 시위 당시 경교장의 사진(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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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1948년 새해가 되었다. 유엔한국위원단의 내한을 앞두고 이승만은 연두사에서 "다시 없이 좋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이념인 민족자결주의를 선양. 국권수립에 매진하자."고 호소했고, 김구는 "우리의 정당한 주장인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하자."고 역설했다.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등 미군정 수뇌부도 "금년은 한국인이 자유의사에 의해 민족주의적 통일국가가 수립되는 역사적인 해"라고 강조했다. (주석 4)

유엔한국위원단이 1월 7일 입국하고, 9일에는 위원단 공보 제1호를 통해 "한국대표의 참가없이 한국문제가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으며 한국은 독립되고 점령군대는 단시일내에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유엔총회의 일치된 의견이었다."고 전제하고, "총회는 한국독립 실현방법으로 3월 31일까지 총선거를 실시, 대표를 선출한 후 이들의 국민정부를 수립할 국민의회를 구성하며 수립된 국민정부는 위원단과의 협의 아래 군대를 편성, 군정당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고 90일 이내 점령군을 철수하도록 결의했다."고 밝혔다. (주석 5)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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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유엔한국위원단은 국회의원 총선거를 3월 31일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선거일은 5월 10일로 늦춰졌다. 한편 북한의 김일성이 평양에서 열린 민중대회에서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방문은 허용하지 않을 뜻을 표명하고, 평양방송도 유엔한국위원단을 "한국을 재차 식민지화하려는 미국의 괴뢰"라고 비난했다. (주석 6) 소련대표 그로미코는 1월 22일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방문 요청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와 한독당은 양군 철수 뒤 남북총선으로 맞섰다. 김구는 이를 위해 3월 8일 남북요인협상론을 제기하였다.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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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조선과도정부 정무회는 2월 6일 즉각적인 남북통일론의 비현실성과 준비없는 미ㆍ소 양군 철군은 남한을 적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남한만의 총선거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왔다. 한민당도 김구ㆍ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을 당리당략에 사로잡힌 주장이며 남로당의 주장을 대변하는 인상을 준다고 비난했다. 이에 맞서 2월 7일에는 여기저기에서 유엔한국위원단을 거부하는 총파업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런 가운데 김구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장문의 성명을 통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하고, 이어서 "한민당은 "미군정하에서 육성된 미군정의 앞잡이"이며 "매국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주석 7)

유엔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정식불참을 통고한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①필리핀 ②엘살바도르 ③중국 ④프랑스 ⑤러시아 ⑥캐나다 ⑦오스트리아 ⑧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유엔위원단의 제1안인 가능지역 총선안이 가결되었다. 
 
 해방정국 세 지도자. 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김구.
 해방정국 세 지도자. 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김구.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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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정국은 다시 단선을 둘러싸고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대한 찬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대세는 단선 지지쪽으로 기울었다. 제주에서는 4월 3일 단선을 반대하면서 무장항쟁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제주도지방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통행증명제를 실시하는 한편, 4월 10일에는 국방경비대 제5연대의 7개 대대를 제9연대에 증파. 배속시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유채꽃 곱게 피는 제주도에 피바람이 불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분단정권 수립을 막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였다. 4월 27일부터 30일 사이에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또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ㆍ김규식ㆍ조소앙ㆍ조완구ㆍ홍명희ㆍ김붕준ㆍ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ㆍ김두봉ㆍ최용건ㆍ박헌영ㆍ주영하ㆍ허헌ㆍ백남운 등이 참석하였다.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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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북요인회담은 해방 뒤 좌우익과 중도파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모임이었다. 남북협상에 비판적인 이승만과 소련군에 연금상태인 조만식이 불참하기는 했으나, 15명의 요인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남북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절호의 기회였다.

요인회담 중에 남측의 김구ㆍ김규식과 북측의 김일성ㆍ김원봉의 이른바 '4김회담'이 평양의 김두봉 자택에서 별도로 열려 단선ㆍ단정반대, 외국군 철수 등에 합의했으나 남측은 미군정과 이승만, 북측은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ㆍ김규식 등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주석
4> 최영희, 『격동의 해방 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429쪽, 1996.
5> 앞의 책, 431~432쪽.
6> 앞의 책, 432쪽.
7> 앞의 책, 44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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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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