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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 관련 장병상의 광주 사택을 방문한 김구와 장병준의 가족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 관련 장병상의 광주 사택을 방문한 김구와 장병준의 가족들.
ⓒ 장병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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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신익희는 분열되어가는 민족진영의 단결을 모색하고자 이승만 주도의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임정계의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ㆍ김규식, 고문 권동진ㆍ김창숙ㆍ함태영ㆍ조만식, 회장 오세창으로 하는 민족진영의 거대 조직이었다. 자신은 부위원장을 맡고, 실무는 정치공작대원들이 동원되었다. 미ㆍ소공위 활동 중지, 자주정부 수립, 3ㆍ8선 철폐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학계 일각에서는 신익희의 '독촉국민회' 조직이 임시정부 주류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이승만과 밀착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뒷날 그가 이승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을 규합하려고 할 때 독립운동가 유림(柳林)이 "이승만 앞에서 XXX 노릇을 한 사람" (주석 1)이라고 몰아 부쳤다.

신익희는 중국 망명시절에 민족진영의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해방정국에서도 미군정세력과 기회주의자들의 득세에 대처하고자 '독촉국민회'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임정측과 멀어지게 되었다.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론을 제기하면서 정국은 탁치문제에서 단정이냐 좌우합작이냐로 이슈가 옮겨갔다. 이 무렵 남한의 정치인(세력)들의 노선을 정리하면, 이승만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ㆍ단독정부 수립, 김구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 남북통일정부 수립, 좌익 계열은 신탁통치 찬성ㆍ남북통일정부 수립, 중도세력은 신탁통치 문제 일단 보류ㆍ우선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각각 주장하였다. 

이승만 중심의 일부 우익세력의 남한단정 수립론이 알려지고 '정읍발언'에 무게가 실리면서 7월 25일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우익의 김규식ㆍ안재홍ㆍ최동오, 좌익의 여운형ㆍ허헌ㆍ이강국 등이 참여하고 김규식이 주석을 맡았다. 

제1차 좌우합작위원회 회의에서 신탁통치ㆍ토지개혁ㆍ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좌우 양측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좌우합작위원회는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 〈좌우합작7원칙〉을 마련했다. 이에 대해 한민당이 토지의 무상분배에 반대, 위원회 활동자체를 외면하고 좌익 측은 애매한 중간노선임을 들어 반대하였다. 이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점차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좌우합작 지지에서 단독정부수립 쪽으로 변하면서, 이승만에게는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정국은 급속히 단정수립 쪽으로 진행되었다. 제1차 미ㆍ소공위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함께 남조선과도정부를 설치했다.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고 8부 6처를 두었다. 그러나 미군정장관의 거부로 안재홍 민정장관의 활동은 무력화되고 좌우합작운동 역시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였다.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대단히 유리한 국면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미국이 주도한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은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으나 실제로는 '남한만의 총선거'였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해가 바뀐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하였다.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될 시점에 즈음하여 11월 4일 이승만은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론을 거듭 제기하였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서 남북한총선거를 행하게 할지라도 우리 정부대표가 있어서 협조해야만 우리 민의대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불연이면 유엔위원단이 남북총선거를 감시한다 하여도 소련이 불응하면 그 결과는 남한총선거로 귀결될 뿐이니 결국은 시일만 허비하게 될 것이며, 설령 유엔의 결의대로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파괴분자들이 이에 참가하여 파괴를 일삼을 터이니 진정한 주권회복은 무망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엔의 제 우방 대표들은 우리 민의에 따라 해결하기를 주장하므로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기 위해서 남한의 총선거 시행을 위하여 일의 노력하면 우리 주권회복은 곧 실현될 것입니다. (주석 2)
 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인사말을 하는 몽양 여운형(1945. 8.)
 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인사말을 하는 몽양 여운형(1945. 8.)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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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어 중도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해 12월 22일 김구는 남한단정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는 "우리는 자주 통일정부를 원하므로 어떤 경우라도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천명하고, 이와 관련 이승만을 방문하여 몇 차례 구수회담을 가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신익희는 현실론을 들어 단정 측에 몸을 실었다. 


주석
1> 김기협, 『해방일기』6, 22쪽.(인용문 중 XXX 표기는 필자) 
2> 『동아일보』, 1947년 11월 6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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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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