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믿보작. 며칠 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계자와 무대에 오른 작품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사업(아르코 온라인 극장)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도중 올해 선정된 리스트를 보게 됐다. 총 17편이 있었는데, 무용과 전통의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연극이었다.

아마도 열 개 남짓인 연극 중 이번에 소개하는 건 <신데렐라>(정범철 연출, 9월 2일~12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3관)다. 이 작품의 브로셔 맨 윗줄엔 '이강백의 신작'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무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가 3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으로 돌아왔으니 모두에게 반가운 소식임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점은 7년 전에 개인적으로 그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이강백 작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이후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이 거물은 내게 '믿고 보는 작품'을 만드는 베테랑으로 자리를 잡아 왔다. 1971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서 등단했으니 올해로 정확히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같은 일을 10년만 해도 손뼉 칠만한데, 50년이라니 그에 대한 평가는 무례하며, 수식어는 몇 줄의 문장으로도 충분치 않으리라.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지난해까진 한국 근대사 연극의 상징으로 불렸던 남산예술센터를 홍보하던 때 그를 만났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고대 아레나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무대 구조를 가진 극장. 이강백 작가가 서울예술대학을 정년퇴임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즐거운 복희>는 바로 이 극장이었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렴풋이 호숫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기억난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묘한 매력, 복잡하지 않게 오직 한 곳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 무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동선은 겹치지 않는 전개. 게다가 경계에 살아가는 이들의 갈등을 잔잔한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한 방식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이것이 이강백 작가를 '알레고리(allegory)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암시적으로 에둘러 말한다."

흔히 '은유'라는 말로 소개하지만 백과사전에 따르면, 단어와 문장으로 국한된 은유와는 다르게 그를 소개할 때 자주 언급되는 '알레고리'는 이야기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2014년 <즐거운 복희>에서 체감했던 알레고리를 7년이 지난 2021년 대학로의 작은 공연장에서 다시 만났다. 어디선가 본 듯 데자뷔처럼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3년 만에 공백을 깨고 들고 온 작품, 신데렐라 
 
작품을 소개하는 리플릿 상단에는 등단 50주년을 맞은 한국의 대표 극작가 이강백이 3년 만에 돌아온 신작을 알렸다.
 작품을 소개하는 리플릿 상단에는 등단 50주년을 맞은 한국의 대표 극작가 이강백이 3년 만에 돌아온 신작을 알렸다.
ⓒ 이규승

관련사진보기

 
코로나19가 극성에 달하던 지난 9월 2일.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한창인 그날 오후 6시가 넘어서자 3인 이상은 사적인 모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공연이 시작된 오후 7시 30분은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한 블록 뒤에 위치한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의 입구에 다다르자 매표소가 열리기 전인데도 공연을 기다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열흘간 지속되는 공연의 첫날인데도, 긴 대기 줄을 보니 공백을 깨고 컴백한 거장에 대한 기대감이 이 정도인가 짐작게 한다.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이번 공연의 타이틀이다. 백마 탄 왕자는 무도회에서 버리고 간 유리구두의 주인공을 찾는다.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찾는 과정을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이 작품에서는 유리구두를 '빨간구두'로 대체시켰다.

객석에 들어서자 무대 중앙엔 핀 조명이 한 켤레의 빨간구두를 비춘다. 무대의 왼편엔 대학로 무대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건반이 놓여 있다. 21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소품은 달랑 의자 3개만 보일 뿐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 위에는 한 켤레의 빨간구두가 놓여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 위에는 한 켤레의 빨간구두가 놓여 있었다.
ⓒ 이규승

관련사진보기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김화영과 강애심을 비롯해 275대1의 경쟁률을 뚫고 새롭게 발탁된 신인 박소영 등 3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빨간구두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21명의 여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교차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노드라마 형식을 띄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의 장면전환처럼 구조는 다음 주자에게 바턴을 넘기듯 자연스럽게 이어가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한 번 일어서고, 여자는 두 번 일어선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 말의 뜻을 물으며 공연은 시작된다. 배우의 대사를 통해서 내게 묻는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놓여있던 빨간구두를 보고 진작에 눈치 챘었어야 했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어본적 없어서 정확한 심정은 모르지만, 극중 대사에 따르면 키가 커 보이고, 몸매가 드러나 벗었을 때보다 한층 자신감이 가득 찬단다. 그런 들뜬 마음을 가진 여자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게 된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신데렐라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된 빨간구두는 자신의 발에 맞는 여자를 찾아나서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아버지로부터 빨간구두를 선물 받은 딸은 이것이 발에 맞지 않자 친구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그도 신어보고 불편해서 임신한 언니에게 다시 돌려주며 에피소드는 반복된다. 이후 유리천장에 갇힌 시인,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 왕자와 결혼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 궁합이 맞지 않지만 고통을 숨기는 애인, 남편과 이혼을 요구하는 당당한 여자, 강물에 물고기를 방생하듯 구두를 던진 수다쟁이, 모터보트를 타다 이 구두를 우연히 발견한 여고생, 하지만 그런 구두를 신을 기회조차 없던 말괄량이가 등장한다. 

또, 사고로 한쪽 발이 잘린 꿈이 사라진 여자, 자동차로 친 구두를 우연히 얻게된 질주하는 여자, 표와 돈 대신에 구두를 건네받은 톨게이트 여자, 아나바다 가게에서 신발을 발견한 알뜰한 여자, 앞으로 보지 못하는 그녀의 딸, 짝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 뒤바뀐 구두를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숨가뿐 여자, 이별편지를 작성하는 촛불 앞 여인, 마지막으로 난해한 시구절을 반복해 들려주는 잠 못 드는 여자까지.

3명의 배우가 전하는 21명의 이야기 
 
한계가 없는 연기 내공을 펼친 김화영 배우
 한계가 없는 연기 내공을 펼친 김화영 배우
ⓒ 공연배달 탄탄/아트리버

관련사진보기

관객이 믿고 기다리는 강애심 배우
 관객이 믿고 기다리는 강애심 배우
ⓒ 공연배달 탄탄/아트리버

관련사진보기

27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신예 박소영 배우
 27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신예 박소영 배우
ⓒ 공연배달 탄탄/아트리버

관련사진보기


총 21명이 등장하지만, 3명의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모노드라마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면 무대는 오롯이 한 명의 배우가 책임진다. 이야기는 한 명이 다음 주자에게 떠넘기듯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아마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전달하는데 이것은 여성이 겪고 있는 내적 갈등의 깊이를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충분히 느껴보라는 작가의 깊은 배려로 보인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던 무대 왼쪽에 차지하고 있던 건반은 80분간 연극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간혹 배우들의 상대역이 필요할 때 최소로 개입되기도 한다. 연주는 모차르트 곡부터 상대 배우와 주고받는 대사의 호흡까지 영역을 한정짓지 않는다. 반대편에 놓인 화면은 장면전환을 위해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된다.

작품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 있는 갈등과 욕망을 빨간구두를 통해서 분출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에 맞지 않지만 왕자를 꿈꾸는 신데렐라는 빨간구두를 잊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21명 씬이 종료될 무렵,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이 다시 등장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주인을 찾지 못해 다시 돌아온 빨간구두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되새긴다.
 
"내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맞지 않는 구두에 억지로 발을 맞추는 건 괴로워. 그런 인생은 불쌍해. 안 맞거든 신지 마. 그래야 발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서... 인생이 행복하지."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블로그에도 동시에 게재됩니다.


태그:#신데렐라, #한국, #아르코, #이강백, #정범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