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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권위가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조사-발표한 '온라인 혐오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 이상이 '코로나19 이후 혐오와 차별이 증가했다'고 답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지 1년 8개월여, 오마이뉴스는 '일상의 혐오'를 통해 불과 몇 년 사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든 '혐오'의 맨얼굴을 시민기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마주하고자 합니다. 다른 시민기자들의 글도 적극 환영합니다.[편집자말]
지난 8월 초였다. 휴가철이 겹쳐서인지 출근길이 유난히 가벼웠다. 나는 평소 30분 가까이 걸리던 거리를 15분에 주파했다고 일터인 상담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자랑을 했다. 그랬더니 한 동료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차 안 막혀요. 방학이라 아줌마들이 차 끌고 안 나오잖아요."

같은 날 나는 엄마로 살고 있는 한 여성 내담자를 만났다. 그 내담자는 며칠 전 비가 많이 왔을 때 아이가 우산을 쓰고 학원에 갔음에도 비에 젖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는 이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내담자의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비 오는데 애 좀 태워다 주지. 뭐 한다고 집에 있었어?"

나는 위의 두 말이 묘하게 겹쳐 들렸다.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두 말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바로 '아줌마'로 상징되는 기혼 유자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였다. 길에서 보이면 '차가 막히는 주범'으로, 집에 있으면 '아이도 안 데려다 주고 노는 여자'로 여성들을 비하하고 있었다.

가볍게 출근했던 그 날. 내 마음은 꽤나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로 살아온 지난 13년 동안 '거리에 나서도, 집에 있어도' 비난을 받는 자리에서 나 역시 늘 긴장한 채 살아왔음을 말이다.

'맘충'부터 '돼지맘'까지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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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태어났던 2008년. 그 땐 '맘충'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울거나 보챌 때 나는 늘 긴장이 됐다. 식당에서 아이가 투정을 부릴 때 사람들은 내게 '애 엄마는 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시선을 보냈다. 실제로 함께 있는 남편에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채 "애 엄마가 초보인가 보네"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식사를 하다 말고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간 건 늘 나였다. 2015년께 '맘충'이라는 단어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는 왠지 뜨끔했다. 지난 시간 내가 '벌레'였던 적은 없었을까 걱정이 됐다.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자 내게도 '시간'이라는 게 조금 생겼다. 아이가 유치원에 머무는 동안 다른 아이 엄마들과 가끔 카페에서 차 한잔을 하곤 했다. 아이의 하원과 동시에 다시 시작돼 잠들 때까지 이어질 육아노동 사이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쉬었던 어느 평일 낮 함께 카페를 찾았을 때 남편은 카페 풍경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노는 여자들 진짜 많네!" 나는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렸고 '노는 여자' 취급을 받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교육이 중요한 화제가 됐다. 내가 '돼지맘'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웃들은 나처럼 일하는 엄마들은 '돼지맘'을 잘 만나야 한다고 했다. 온갖 교육 정보를 꿰뚫고 주위에 다른 엄마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그들과 친해져야 입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단어의 어감 자체가 왠지 교육에 열을 올리는 엄마들을 비하한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다. 동시에 '일하는 엄마'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입에 성공하려면 엄마가 노력해야 하는데 일하면서 그걸 해낼 수 있겠냐' 이런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가 중학생이 된 올해,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중학생 아이를 둔 한 이웃이 우연히 아이의 카톡을 봤는데 아이들이 '니 에미~'라며 엄마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2017년 이미 한 언론에 <'엄마'를 욕하며 노는 아이들... 교실이 혐오의 배양지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던 걸 보면 아이들이 엄마 욕을 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했다. 기사에 따르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서열이 낮은 아이는 엄마 이름으로 불린다 했다. 소름이 끼쳤다. 아이에게 "너의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냐"며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를 향한 혐오의 핵심은 '이중구속' 

나는 엄마로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종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든 스스로를 검열하며 조심스러워했다. 내 주변의 이웃들과 내담자로서 나를 찾아오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 속에 깊이 새겨진 기혼 유자녀 여성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의 저자 박민영은 엄마들을 향한 혐오의 핵심을 이렇게 짚어냈다.
 
엄마들은 모성애가 없어도 문제고, 모성애가 있어도 문제다. 모성애가 없으면 무책임한 엄마가 되고 모성애가 있으면 제 자식만 아는, 이기적인 엄마가 된다. (60쪽)

정말 그랬다. 결혼한 여성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고, 아이를 안 낳는다고 하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육아에 전념하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 '노는 여자' 취급을 받고, 일하거나 공부를 하면 '아이에게 소홀하다'는 눈총을 받는다. 사교육을 열심히 시키면 '돼지맘' 이나 '치맛바람'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리고,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무책임한 엄마'라고 욕을 먹는다.

나는 이런 '이중 비난'이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중구속'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따라 살라고 요구하고서는 그렇게 사는 여성들의 삶을 폄하하는 가부장제의 그 시선, 여성들을 삶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바로 그 시선 말이다. 이런 시선들은 그 자체로 여성들을 구속하고 실질적인 차별을 부른다. '실재하는 혐오'인 것이다.

이렇게 혐오 속에 살아가는 엄마를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박민영 작가의 분석에 따르면 세상에서 폄하당하는 엄마들이 아이들에겐 억압자가 된다. 입시 결과의 책임을 엄마에게 묻고, 아이의 성적이 엄마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요구한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별것 없어 보이는' 엄마가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에 대한 반동심리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엄마에 대한 혐오표현이다. 

자기혐오에 갇히고 마는 엄마들
 
 드라며 < SKY 캐슬 >의 한 장면
 드라며 < SKY 캐슬 >의 한 장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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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같은 혐오의 결과는 무엇일까. 나는 상담실에서 만나는 엄마인 내담자들에게 거의 항상 이런 말을 듣는다.

"이게 다 제 잘못인 것 같아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이중 비난의 시선 속에서 엄마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혐오 어린 감시의 시선은 '자기검열'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자기혐오'로 내면화된다. 때문에 많은 기혼 유자녀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부당한 상황과 심리적 불편을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아이들이 조금만 아파도 '엄마 잘못', 공부를 안 해도 '엄마 잘못',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도 '엄마 잘못'인 세상에서 엄마들이 느끼는 건 스스로에 대한 부적절감과 끊임없는 죄책감이다.

나는 이런 여성 내담자들에게 늘 단호하게 말해 주곤 한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이 짧은 말에 눈물이 터지는 여성 내담자들과 함께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혐오는 이처럼 그 대상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피폐해진 여성의 삶은 당연히도 그 가족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특히, 아이들조차 엄마를 욕설의 대상으로 삼는 현재 상황은 또 다른 혐오 사회를 잉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주양육자인 사회에서 엄마와의 관계는 모든 대인관계의 기초가 된다. 아이들은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세상과 타인을 신뢰하며, 안전한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들을 배운다. 엄마가 아이의 혐오표현의 대상이 될 때, 그 아이의 대인관계엔 '혐오'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깎아내려도 된다고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혼 유자녀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이처럼 혐오를 재생산한다는 면에서 더욱 위험하다.

여성학자 김홍미리는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에서 혐오를 '가랑비'라고 표현했다. 공기와는 다르게 느껴지지만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스며드는 가랑비처럼 혐오는 푹 젖고 나서야 아프게 느껴진다. 여성들은 삶이 충분히 고통스러워진 후에야 그 원인이 '혐오'였음을 깨닫고 분노하거나 절망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예민해져야 한다. 민감한 감수성으로 서로의 가랑비를 알아채주고 연대의 우산으로 함께 막아서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혐오의 가랑비가 멈춰 설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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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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