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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중장은 패전 후 BC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라바울 전범 수용소에서 복역 중 자신이 지휘했던 장병들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자살했다.
▲ 일본육군 제18군 사령관 아다치 하타조 중장 아다치 중장은 패전 후 BC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라바울 전범 수용소에서 복역 중 자신이 지휘했던 장병들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자살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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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본이 연합국을 상대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지 2년의 시간이 흐른 1947년 9월 10일 새벽. 일본육군 제18군 사령관이었던 아다치 하타조(安達二十三) 중장이 라바울 전범 수용소에서 자살한다. 전후 고급장교들이 '죽음으로 (패전의) 대죄를 사죄한다'는 취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지만, 아다치 중장이 지휘했던 제18군의 말로를 떠올려본다면 그의 자살은 의미심장하다. 아다치 중장의 자살 현장에서는 '쓰러져 간 젊은 장병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제18군은 동부 뉴기니 전역에 동원된 전력이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향후 본격화될 연합군의 공세를 견제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뉴기니 지역으로 병력을 투입했다. 광활한 뉴기니의 정글을 헤쳐 나가며, 일본군 장병들은 향후 작전에 필요한 도로와 비행장을 새로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가 빛을 발하는 일은 없었다. 1942년 하반기 내내 제국 일본이 힘을 쏟았던 과달카날 전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뉴기니와 본국을 잇던 남태평양의 제해권은 무너졌다. 식량, 의약품, 탄약 등 필수적인 물자들의 보급이 끊긴 채 정글에 남겨진 뉴기니의 일본군 사이에서는 나날이 절망감이 깊어졌다.

풍토병과 기아로 1년 이상 고통받던 18군에게 또다른 위기가 들이닥쳤다. 1944년 4월, 미군과 호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뉴기니 중부 호란디아와 아이타페에 상륙하면서 18군이 완전히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 것. 18군이 이대로 궤멸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일본군 상층부를 압박했지만, 뉴기니에 남은 일본군 병력들을 외부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완전히 고립된 병사들
  
아나미 고레치카(왼쪽) 대장은 제18군에 연합군 공격을 명령한 반면, 도조 히데키(오른쪽) 수상은 18군이 현지에서 병력을 보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8군은 연합군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 없었고, 그대로 고립되어있다가는 자멸하고 말 상황이었기에, 양쪽의 주장은 모두 현실성이 없었다.
▲ 중부 뉴기니에 상륙한 연합군 아나미 고레치카(왼쪽) 대장은 제18군에 연합군 공격을 명령한 반면, 도조 히데키(오른쪽) 수상은 18군이 현지에서 병력을 보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8군은 연합군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 없었고, 그대로 고립되어있다가는 자멸하고 말 상황이었기에, 양쪽의 주장은 모두 현실성이 없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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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지역의 일본군 전체를 지휘했던 제2방면군 사령관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18군에 아이타페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18군이 아군의 지원 없이 아이타페의 연합군을 공격해 스스로의 혈로를 뚫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보급도 전혀 받지 못하는 18군이 정글을 가로질러 연합군의 대병력을 격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무였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황군의 정신력을 맹신해왔던 아나미 대장은 '결사항전'이야말로 18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다. 

반면,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은 아나미 대장의 공격명령에 제동을 걸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18군이 자력으로 아이타페를 점령하고 고립을 타개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였다. 특히, 육군대신과 육군참모총장까지 겸직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수상은 무리한 작전을 그만두고 18군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군 병력의 보존을 주장하던 도조 수상 역시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8군이 보유한 식량은 이제 두달치에 불과했다. 아이타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계속 밀림에 고립돼 있는다면 전군은 괴사될 수밖에 없었다. 대본영에서는 '자활(自活)', 즉 스스로 식량을 구해 살아남으라는 방침을 내렸지만 이 역시 아나미 대장의 공격명령 이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정글에서의 자활이 가능했다면 애당초 뉴기니의 일본군이 기아로 고통받을 일은 없었다.

거듭된 논쟁에도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일본군 상층부는, 급기야 18군 사령관 아다치 중장에게 판단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즉, 상급부대나 국가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으니 18군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고뇌 끝에 아다치 중장은 아이타페 공격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다치 중장은 작전을 앞두고 '황군의 본분을 다하라'는 훈시를 전군에 내렸다.
  
일본군은 울창한 정글 속에서 새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진군했다.
▲ 뉴기니의 정글에서 가교를 만드는 일본군 일본군은 울창한 정글 속에서 새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진군했다.
ⓒ 마이니치 신문사 "1억인의 쇼와사"(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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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굶주린 병력들이 중화기까지 짊어지고서 절망적인 행군을 시작했다. 제대로 된 도로도 없는 빽빽한 밀림과 고원, 강의 거친 급류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아이타페 지역에 도달한 18군은 1944년 7월 10일 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총검을 들고 돌격하던 일본군 장병들은 연합군의 기관포화에 맥없이 쓰러졌다. 파국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아나미 대장이 강조했던 정신력만으로는 적의 압도적인 화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공격 개시 이래 적에게 유효타를 입히지도, 의미있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18군은 결국 8월 4일부로 아이타페 작전을 중지했다.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전진(転進), 즉 방향을 바꿔서 진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남부의 정글지역으로 후퇴했다.

식량과 탄약을 완전히 소진한 일본군은 연합군의 추격까지 받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정글을 방황하는 신세가 됐다. 기력이 다한 장병들은 부대에서 차례로 낙오돼 죽음을 맞이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돈을 건네고 자신을 죽여달라 부탁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예정된 패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붙어있더라고. 거기에 구더기가 꼬여서, 입에서, 눈에서, 몸의 모든 구멍에서 나왔어…. ‘제발 도와줘’라는 말을 들어도, 나 역시 누굴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 계속 걸었지."
▲ 18군 소속이었던 이시카와 시게오 씨의 증언(2009년)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붙어있더라고. 거기에 구더기가 꼬여서, 입에서, 눈에서, 몸의 모든 구멍에서 나왔어…. ‘제발 도와줘’라는 말을 들어도, 나 역시 누굴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 계속 걸었지."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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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군을 비롯한 뉴기니의 일본군 장병들이 고통 속에 남겨져 있는 사이에 대본영의 관심은 뉴기니에서 멀어졌다. 1944년 10월 연합군이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면서 성공은 거의 못했을지언정 어떻게든 지속됐던 뉴기니로의 보급 시도 자체마저 이 시점에서 완전히 중단됐다. 뉴기니의 일본군은 그렇게 본국으로부터 버려졌다.

버려진 뉴기니의 일본군 내에서는 군 기강마저 무너져갔다. 이미 죽어버린 아군의 고기를 먹는 것은 차라리 인간적이었다. 급기야는 아군을 약탈하거나 심지어는 잡아먹는 인간사냥꾼들까지 나타났다. 이에 사령부에서는 '습격 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병사가 혼자 걸어다니는 것을 엄금하기에 이르렀다. 정치군인·정치경찰로서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숱한 학살범죄를 자행했던 김종원 전 치안국장 역시 뉴기니에서 종군했던 일본군 하사관 시절에 식인을 저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뉴기니 시절을 술회하며 스스로의 식인 경력을 내세워 자신의 특출난 잔학함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미 부대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에 대한 돌격 명령은 계속 하달됐다. 장병들은 실행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분노했지만, 서슬 퍼런 군법 아래서 항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급기야 1945년 봄에는 대대 하나가 통째로 연합군에 투항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으로 전 장병에 대한 세뇌가 이뤄졌던 일본군 내에서 이러한 집단 투항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집단 투항을 단행했던 다케나가 마사하루(竹永正治) 중좌는 연합군에 의한 심문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다치 중장은 자랑스러울 만큼 인격자이지만 전술가로서는 무능하다. (중략) 국민은 종전을 염원하나 재벌과 군벌은 전쟁 계속을 원한다. 종전이 되면 그들의 권력과 그 기반이 모두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 없는 싸움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따르면 15만 명에 달했던 18군 장병 중 목숨을 잃은 이는 12만7600명에 달한다. '재앙'이라는 단어 외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태다.
  
필사? 용맹? 그건 재앙이었다
 
뉴기니의 일본군은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채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 뉴기니에서 미군에 생포된 일본군 포로들 뉴기니의 일본군은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채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 History In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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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물론 전후에 발간된 다수의 일본 서적들은 18군을 비롯해 악전고투했던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군 부대들이 '필사' '용맹'으로 압도적 물량의 연합군에 맞서 항전했다고 서술한다. 어두운 역사를 미화하고 예찬하는 것으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의 무의미를 견뎌내고자 하는 것일까.

그러나 전선의 군인 개개인의 용맹을 평가하는 것과 역사적 책임을 마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직 장병들의 용맹에만 기대어, 적의 압도적인 물량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우는 상황이 초래된 것은 결코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다. 일본군의 정신력 제일주의라는 것, 당시 일본군 병력들의 분전을 예찬하는 것, 그것은 결국 지도부의 무능과 국가역량의 결핍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위해 오남용된 허황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신력 제일주의, 영웅담의 횡행, 그것은 비단 일본군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 병폐는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안 되면 될 때까지' '안 되면 되게 하라' '악으로 깡으로' '노력이 부족하다' 등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신론 문구들을 떠올려본다. 전쟁과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지도 않고, '악'과 '깡'으로 난관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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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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