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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상류 관촌 사선대 관광지에서 강변 북쪽 도로를 따라 동북 방향으로 1.5km 진행하면 순천완주고속도로의 높은 교각이 나타난다. 좌회전하여 작은 개울인 신전천을 따라 북쪽으로 7km 계곡을 올라가면 임실 신흥사(新興寺)에 도착한다.

임실 신흥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진감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 조선시대 연산군 때(1504년)에 벽송 지엄 대선사의 창건설, 1730년 필사본 운수지의 기록에는 1619년에 창건설 등이 있다. 천오백 년 된 사찰의 반복된 성쇠를 짐작할 수 있다.

한때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대찰이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30평 규모의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만 있다.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임실 신흥사가 호남정맥 사자산의 남쪽 산자락을 등지고 가을 장마의 제법 굵은 빗줄기 속에 의연하다. 대웅전은 천오백 년 전 창건 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백제 성왕과 백제 건축양식. 이 소중한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8월 27일 금요일 아침에 산사를 찾았다. 비가 더 와도 좋다.

백제 중흥의 포부가 담긴 신흥사 
 
지붕에는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둔중하지 않고 산뜻하다.
▲ 임실 신흥사 대웅전 정면 지붕에는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둔중하지 않고 산뜻하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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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상류 관촌 지역은 고대부터 동서와 남북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시대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장수(신라와 국경), 서쪽으로 중방 고사부리(정읍 고부), 남쪽으로 남방 구지하성(남원), 북쪽으로 동방 덕안성(논산)으로 갈 수 있었다.

백제 성왕은 이 지역에 신흥사를 창건하였고, 백제 중흥의 포부를 실천하였다. 가야 방면으로 진출하고, 한강 유역의 수복을 시도하며,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사비(泗沘)로의 천도(538년)를 단행하였다.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정통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나제동맹으로 한강 유역을 탈환(550년)했으나, 한강 유역은 결국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에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이 관산성 전투 과정에서 성왕이 죽음을 맞는다.

성왕의 백제 중흥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꿈은 신흥사 이름과 신흥사 건축양식에서 천오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2고주 5량집으로 보인다. 어칸은 폭이 430cm, 좌우 협칸은 폭이 350cm다.

맞배집 양식으로 추녀는 없고 박공널과 방풍널이 있다. 토벽의 벽선이 뚜렷하다. 지붕에는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둔중하지 않고 산뜻하다. 대웅전 기단은 자연석으로 4단이며, 초석도 자연석 주초다.

기둥은 적갈색으로 정면에서 4개가 보인다. 배흘림기둥으로 기둥 아랫면 직경이 좌우 우주는 65cm로, 가운데 평주 2개는 50cm다. 기둥(평주, 우주)머리에 창방이 결구 되었고, 우주 밖으로 창방 뺄목이 나와 있다. 하중과 세월 풍화로 기둥에 세로 틈이 생기고, 반턱이음으로 기둥을 보수하기도 했다.
 
대웅전 정면의 공포는 다포식이다.
▲ 임실 신흥사 대웅전 정면 공포 대웅전 정면의 공포는 다포식이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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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정면의 공포는 다포식으로 각 기둥에는 주심포가 올려졌고, 어칸에는 공포 2개, 좌우 협칸에 공포가 1개씩 올려졌다. 비취색과 청록색이 많은 단청이 은은하게 우아하다. 대웅전 정면에는 기둥 머리에서 창방, 평방, 공포, 공포벽이 서까래까지 조화되게 배치되었다.

공포는 기둥머리 위에 주두부터 첨차 살미가 소로와 결합하여 빈틈없이 자리 잡았다. 공포 위에 주심도리의 내외로 장여에 튼튼히 연결된 외목도리 2개, 내목도리 2개가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서까래에는 부연이 있다.

대웅전 후면 공포는 각 기둥에 주심포만 있다. 대웅전 정면은 다포식인데 후면은 주심포식이다. 주심포에 장여와 결합된 외목도리 2개, 내목도리 2개로 정면과 달리 부연이 없고 홑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기둥과 결구된 창방 위에 공포가 없음으로 평방은 없다.
 
대웅전 정면은 다포식인데 후면은 주심포식이다.
▲ 임실 신흥사 대웅전 후면 공포 대웅전 정면은 다포식인데 후면은 주심포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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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후면의 창방 위에 세 칸마다 중심부에 간결하고 형태의 비취색 구조물이 설치되어 외목도리 2개를 받치고 있는 것이 색다르다. 대웅전 내부에서 이 구조물의 내부 대응되는 형태를 보니 이곳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구조물이 역시 설치되어 기능하고 있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하였고, 조각 수법은 수수하면서 산뜻하다. 현재 대웅전에 사용된 목재는 400년 전에 시공한 곳이라고 한다. 최근에 교체한 기둥도 있다. 그러나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고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백제 건축양식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기둥과 공포 양식인지, 건축에 보이는 자연스러운 곡선미인지, 청아하고 은은한 단청인지? 이곳 임실 신흥사에서 남아 있다는 백제 건축양식을 찾아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 백제 건축양식을 확인하는 것이 이곳에 천오백 년 전해 오는 신흥사의 정체성을 찾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법당 내부의 천장 반자가 화려하며 산뜻하다.
▲ 임실 신흥사 대웅전 천장 단청 법당 내부의 천장 반자가 화려하며 산뜻하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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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관촌면 섬진강 상류의 성미산성 지역 방수리는 고려시대 임실군의 치소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임실현이 현재 청웅면 덕치면을 포함하는 구고현을 포함하게 되면서 임실의 중심이 관촌 방수리 지역에서 현재의 임실읍으로 이동하여 임실군의 중심이 되었다.

섬진강 상류 관촌 방수리의 오원강변에 장제무림의 숲이 조성되어 있고, 오원강에 보를 설치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수시 시설로 활용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황장군 부부 설화가 전해온다. 이곳에 보와 관련되어 도깨비보 설화도 함께 전한다.

임실군 관촌면 섬진강 상류 지역은 호남정맥을 넘는 험애다. 현대는 도로와 교통이 발전하여 궁벽한 지역이라는 개념이 많이 없어졌다. 이 호남정맥은 산맥 자체가 자연이 조성한 천혜의 산성이었다. 이 산맥의 고개를 넘어서 사람들이 소통하고 물자를 운송하고 군사가 이동하고 꿈이 피어났다.

임실 신흥사는 천오백 년 전에 백제 성왕이 백제 부흥의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건립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사실상 명맥만 남아 있으나 임실 신흥사의 연푸른 단청에서 천오백 년을 이어오며 나부끼는 백제 성왕의 꿈이 새겨진 깃발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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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임실군 문화관광해설사]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우리 지역의 가까운 고갯길을 걸으며 기사를 엮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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