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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교수가 관동대지진 당시 계엄사령부가 발령한 자료(육군진재자료)를 발굴해 새로운 내용을 공개했다. 이미지는 육군진재자료 표지.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교수가 관동대지진 당시 계엄사령부가 발령한 자료(육군진재자료)를 발굴해 새로운 내용을 공개했다. 이미지는 육군진재자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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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원인이 '3.1운동에 대한 보복'과 '사회주의 사상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부산외국어대학 명예교수이자 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인 김문길 교수는 최근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원인에 대한 새로운 문서를 발견했다. 그는 일본 교토대학에서 3년간 연구하고 고베대학 대학원에서 한일 관계사를 전공했다.

김 교수는 동경도 공문서관(비밀20 제8호)에서 관동계엄사령부가 발령했던 '육군진재자료(陸軍震災資料)' 6장을 입수해 공개했다.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문서에는 "9월 2일 오후 동경 부근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동경 서남부 후나바시 방면을 조선인들이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각 지역에 있던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에 대한 살해가 일어났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문서에는 "9월 2일 오후 동경 부근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동경 서남부 후나바시 방면을 조선인들이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각 지역에 있던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에 대한 살해가 일어났다"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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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문서에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과 함께 긴간(根岸)형무소에서 100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탈출해 투쟁 약탈하면서 무정부상태에 돌입했다. 보병부대 1개 중대가 조선인을 수습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문서에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과 함께 긴간(根岸)형무소에서 100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탈출해 투쟁 약탈하면서 무정부상태에 돌입했다. 보병부대 1개 중대가 조선인을 수습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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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일 오후 동경 부근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동경 서남부 후나바시 방면을 조선인들이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각 지역에 있던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에 대한 살해가 일어났다.

▲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과 함께 긴간(根岸)형무소에서 100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탈출해 투쟁 약탈하면서 무정부상태에 돌입했다. 보병부대 1개 중대가 조선인을 수습했다.

▲ 후나바시 구마야 혼마츠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폭동을 일으켜 자경단과 격투해 조선인들이 살해당했다.


▲ 검찰청에서 조선인들에게 내린 죄목은 6가지로, 방화 절도 강간 독약 투입, 유언비어, 자경대 폭행, 약탈, 사회주의 행동, 군사에 관한 범죄이다.

▲ 9월 10일 전후까지 검거된 조선인들은 지바에서 3075명, 그중 학생 1701명 경찰서에 수용된 인원 471명이 된다.

▲ 조선인 도래인에 대해 엄밀히 시찰하고 용의자는 상륙 허가하지 말고 특히 중국 상해에서 일본으로 오는 사람이 조선인으로 가장해 오니 입국시키지 말도록 하라.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자료엔 "9월 10일 전후까지 검거된 조선인들은 지바에서 3075명, 그중 학생 1701명 경찰서에 수용된 인원 471명이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자료엔 "9월 10일 전후까지 검거된 조선인들은 지바에서 3075명, 그중 학생 1701명 경찰서에 수용된 인원 471명이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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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자료엔 "조선인 도래인에 대해 엄밀히 시찰하고 용의자는 상륙 허가하지 말고 특히 중국 상해에서 일본으로 오는 사람이 조선인으로 가장해 오니 입국시키지 말도록 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김문길 교수가 발굴한 "육군진재자료" 중 일부. 이 자료엔 "조선인 도래인에 대해 엄밀히 시찰하고 용의자는 상륙 허가하지 말고 특히 중국 상해에서 일본으로 오는 사람이 조선인으로 가장해 오니 입국시키지 말도록 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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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일제강점기 시절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
  
"관동대지진 학살은 3.1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발생한 것"

98년 전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24초. 일제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는 리히터 규모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점심을 준비하던 집집마다 화재가 발생했고 목조건물이 주를 이뤘던 일본 가옥은 45만 채가 전소됐다.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번에 사료를 공개한 김문길 교수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지진으로부터 4년 전인 1919년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를 탄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19년 한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영향받은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지진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해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인들을 죽이기로 했다는 것.

흉흉해진 민심을 이용해 조선인을 죽이도록 선동한 인물의 중심에는 치안을 책임진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경무국장인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가 있다.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미즈노 렌타로는 경무총감이었고, 아카이케 아츠시는 경무국장이었다. 이들은 3.1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일계급 특진해 일본에서 근무 중이었다. 특히 미즈노는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의 폭탄 공격으로 부상을 당해 개인적 원한도 작용했을 걸로 추정된다.

일본 통계에 의하면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조선인은 6630여 명이다. 하지만 독일 외신기자들의 통계는 2만여 명이 된다고 한다. 사료를 발굴한 김문길 교수의 얘기다.

"지금까지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났던 조선인 학살은 유언비어와 우물에 독약을 풀었기 때문에 학살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한 사료를 보면 3.1운동의 보복 트라우마에 사회주의 사상가를 죽이기 위한 계엄령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관동대지진 학살은 3.1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역사를 다시 기록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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