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동근은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를 연기하며 1997년과 2002년 그리고 2014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물론 유동근은 <애인>이나 <에덴의 동쪽> <같이 살래요> 같은 현대극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지만 대중들은 현대물보다는 사극에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유동근에 더욱 익숙하다.

최근 <타짜>의 곽철용이 재조명되면서 현대극에 출연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배우 김응수 역시 한때 '어둠의 최수종'이라 불렸을 정도로 각종 사극에서 악역을 도맡아 연기했다. <추노>의 이경식을 비롯해 <해를 품은 달>의 윤대형, <닥터진>의 김병희, <바람의 화원>의 장병수 등 여러 사극에서 악역을 연기한 김응수는 2016년 <임진왜란 1592>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기도 했다.

국내에서 유동근이나 최수종, 김응수 등이 사극으로 유명한 배우라면 홍콩에서는 <황비홍>의 이연걸이 시대극에 특화된 배우로 꼽힌다. 하지만 변발이 아니면 어색해 보이던 이연걸도 단정한 머리 스타일로 현대극에서 현란한 액션을 선보일 때가 있었다. 이연걸이 전직 중국 공안부의 일급 보안요원을 연기하며 대형테러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영화 <이연걸의 탈출>(아래 <탈출>)은 1990년대 중반 이연걸의 대표적인 현대극이다.
 
 <이연걸의 탈출>은 액션 시대극 전문배우 이연걸이 전성기에 찍은 흔치 않은 현대물이다.

<이연걸의 탈출>은 액션 시대극 전문배우 이연걸이 전성기에 찍은 흔치 않은 현대물이다. ⓒ UIP KOREA

 
1990년대 성룡 아성 위협했던 액션 히어로

어린 시절부터 전문 무슬학교에서 무술을 수련하며 우슈선수로 활약했던 이연걸은 1979년 중국의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딴 후 영화배우로 변신했다(지금이야 우슈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제법 익숙한 종목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우슈는 올림픽은커녕 아시안게임에서도 정식종목에 포함될 확률이 낮은 '그들만의 스포츠'였다).

1980년 영화 <소림사>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한 이연걸은 3편까지 제작된 <소림사> 시리즈에 모두 출연해 현란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중국 국영 영화사 소속이었던 이연걸은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고 1989년 홍콩 이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연걸은 홍콩에서 감독과 제작자로 명망이 높던 '귀인'을 만나게 됐다. 바로 '홍콩의 스필버그'로 불리던 서극 감독이었다.

이연걸은 서극 감독의 <황비홍>에 출연하며 단숨에 성룡의 자리를 위협하는 중화권의 액션스타로 떠올랐다. 성룡이 코믹한 연기를 바탕으로 유쾌한 액션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면 이연걸은 진증한 액션 시대극에서 강세를 보였다. <황비홍> 시리즈를 비롯해 <동방불패> <방세옥1, 2> <태극권> <의천도룡기> <소림오조> <이연걸의 정무문> 등이 당시 이연걸이 히트시켰던 대표적인 액션 시대극이었다.

그렇게 사극 액션 전문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이연걸은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3편의 현대물을 선보였다. <이연걸의 보디가드>와 <이연걸의 영웅> 그리고 <이연걸의 탈출>이었다(이상 국내 개봉명). 영화 제목에 세 편 연속으로 주연배우의 이름이 들어갈 만큼 당시 이연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연걸의 현대극 3부작(?)은 세 편 모두 국내에서 서울관객 10만을 돌파할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97년 <황비홍-서역웅사>를 끝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연걸은 <리셀웨폰4> <로미오 머스트 다이> <키스 오브 드래곤> 등에 출연했다. 2002년엔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천하의 시작>, 2006년엔 <무인 곽원갑>에서 명불허전의 액션연기를 선보였다. 이연걸은 할리우드의 레전드 액션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영화 <익스펜더블>에서도 3편까지 모두 출연했을 정도로 중국과 아시아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레전드 액션 배우다.

무도인 이연걸? 총 쏘는 이연걸도 멋있다
 
 <탈출>을 비롯한 이연걸의 영화들은 90년대 초·중반 극장뿐 아니라 비디오시장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탈출>을 비롯한 이연걸의 영화들은 90년대 초·중반 극장뿐 아니라 비디오시장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 UIP KOREA

 
<탈출>은 <지존무상>과 <도신-정전자>를 통해 홍콩에 도박영화 열풍을 몰고 온 왕정 감독이 연출했다. 당초 왕정 감독은 <탈출>에 이연걸과 성룡을 투톱으로 캐스팅해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룡은 왕정 감독의 <시티헌터>에 출연한 후 왕정 감독의 차기작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성룡을 염두에 뒀던(스턴트를 쓰지 않기로 유명한) 최고의 영화배우 용위 역은 액션 연기와는 거리가 먼 장학우에게 돌아갔다.

사실 <탈출>은 이연걸이 '겹치기 출연'을 하고 왕정 감독도 '겹치기 연출'을 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기 때문에 스토리가 비교적 단순하고 허점도 많은 편이다. 등장하자마자 리걸(이연걸 분)의 가족이 탄 버스를 폭파시키는 잔인한 테러리스트 데이빗 왕(왕소 분)은 그저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인을 일삼는 악당이다. 용위의 실체를 고발하려는 열혈기자 헬렌(구숙정 분) 역시 기자정신이나 정의감보다는 특종을 잡아 승진하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던 홍콩의 액션영화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이연걸이 출연한 여느 무협영화들과 달리 유난히 총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탈출> 역시 이연걸이 선보이는 현란한 일당백의 액션을 통해 통쾌하게 악당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실컷 볼 수 있다. 시종일관 엉큼하고 비겁한 캐릭터로 나오는 겁쟁이 용위 역시 결정적인 순간 각성해 뛰어난 무술솜씨를 발휘한다.

이연걸이 출연하는 그 어떤 영화보다 총격 액션이 자주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볼 만한 장면은 이연걸과 데이빗 왕의 동생이 펼치는 액션이다. 리걸은 체격도 크고 힘도 좋고 심지어 총까지 가지고 있는 데이빗 왕의 동생을 상대하기 위해 천장에 달려 있던 조명기구를 창처럼 이용해 싸운다. 그리고 데이빗의 동생이 다시 총을 사용하려 하자 리걸은 전직 중국 공안부의 일급 보안요원답게 자비 없이 날카로운 조명 기둥을 그의 심장을 향해 던진다.

액션영화에서는 멋지고 실력도 좋은 여전사 캐릭터가 악역보스의 오른팔로 등장해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치다가 영화 후반부에 허무하게 죽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탈출>에서도 미스홍콩 출신의 배우 주가령이 데이빗 왕의 충신으로 등장해 카리스마를 발산하지만 후반부 턱에 총을 연사 당하면서 잔인하게 사망한다(물론 <탈출>은 15세 관람가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자세한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장학우부터 양채니까지, <탈출>의 화려한 조연들
 
 가수로 더 유명한 장학우는 당초 캐스팅 후보였던 성룡 대신 <이연걸의 탈출>에서 허세 가득한 액션배우를 연기했다.

가수로 더 유명한 장학우는 당초 캐스팅 후보였던 성룡 대신 <이연걸의 탈출>에서 허세 가득한 액션배우를 연기했다. ⓒ UIP KOREA

 
성룡의 액션영화들도 비슷하지만 이연걸이 출연하는 액션 현대물들도 주인공 이연걸과 여주인공 포지션의 조력자, 그리고 빌런 역할의 배우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탈출>에서는 여주인공 구숙정과 빌런 역할의 왕소 외에도 국내 영화팬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극장 흥행이 상대적으로 다소 저조했던 <탈출>이 비디오 시장에서 유독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유다.

뛰어난 가창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중화권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홍콩의 국민가수' 장학우는 <탈출>의 민폐캐릭터 용위를 연기했다. 여자만 밝히고 허세만 부리다가 금방 밑천이 드러나지만 끝까지 자신의 캐릭터를 잃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에 '그래도 한때는 뛰어난 무술실력을 갖췄었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테러리스트에게 구타를 당했을 때 각성해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테러리스트를 제압한다.

지난 1994년 고 장국영, 양조위, 장만옥, 임청하 같은 대선배들과 함께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았던 양채니도 <탈출>에서 호텔 직원 제시를 연기했다. 제시는 최신식(?) 전자수첩을 이용해 리걸에게 인질들의 정보를 전달하는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다. <타락천사>를 통해 1990년대 중반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했던 양채니는 가수로서도 8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영화 두 편을 연출하며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1960년대부터 활동했던 고 우마는 <심야의 결투> <돌아온 외팔이> 등 영화 마니아가 아니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옛날 영화들에도 출연했던 홍콩의 전설적인 배우다. <탈출>에서는 한심하게 행동하는 아들이 늘 못마땅하지만 언제나 아들이 철이 들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는 용위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2000년대 들어 활동이 뜸해진 우마는 2014년 <파이팅>을 끝으로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이연걸의 탈출 이연걸 구숙정 장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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