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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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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 신문의 왜곡된 신탁통치 보도는 해방정국의 황금과도 같은 시기에 이 문제가 온통 블랙홀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모든 현안과 이슈가 이것으로 빨려들어 갔다. 해방정국의 최대 이슈는 통일정부 수립과 미ㆍ소 양군의 철수 그리고 친일민족반역자 처벌이었다. 민생문제도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탁치 문제는 이 같은 민족사 절체절명의 과제를 뒤로 한 채 찬반 투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찬반 운동이 어느새 이념대결로 대체되었다. 친일민족반역자들은 '귀축미영'에서 '친미반공'의 기치를 들고 해방공간의 주역으로 탈바꿈하였다.

반탁투쟁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고 내무부장 신익희가 주도하였다. 그는 내무부 산하에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행정연구반에 반탁운동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라고 지시하고, 12월 29일 밤 서울시내 9개 경찰서장을 정치공작대 중앙본부인 낙산장으로 불렀다. 영등포 경찰서장만 불참한 가운데 통절한 훈시를 하였다.

과거 잔혹한 일제의 억압 아래서도 우리 선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렸거늘, 독립이 보장된 이 마당에 탁치(託治)를 반대하고, 군정의 철폐를 주장하며, 삼천만 모두가 대한민국 임정 산하에 똘똘 뭉쳐 있음을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이 반탁 시위가 당장에 우리의 독립을 촉진시키는 한 방편이니만큼 여러분들이 솔선하여 신탁통치와 군정을 강력히 반대하고, 임정 지령에 절대 협력을 부탁하는 바이오. (주석 6)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광경
▲ 신탁통치 반대시위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광경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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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가 국자 1, 2호의 발령에 이어 서울의 경찰서장들을 소집하여 반탁과 미군정 철폐를 주장하고 경찰이 이에 동조하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3일 미주둔군 사령관 하지가 미군 정보기관 CIC로 하여금 신익희를 구금 문초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라 청진동 CIC본부에 감금되었다.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일제와 싸우다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통일된 나라를 세우고자 일하다 또 다른 외국군에게 감금된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분한 어조로 CIC 요원들을 상대로 훈시를 했다. 대의와 명분이 뒷받침되는 논리정연한 훈시에 그들은 설득되고 곧 석방하였다.

일찍이 나와 내 동지들은 저 포악한 일제의 사슬 아래서도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했소. 하물며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독립이 약속된 이 마당에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더욱이 당신네들이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면, 끝까지 우리를 도와야 하지 않은가? (주석 7)
1946. 3. 1. 서울. 신탁통치 지지 궐기 대회로 가마니를 펼쳐 구호를 쓴 프래카드가 이색적이다
 1946. 3. 1. 서울. 신탁통치 지지 궐기 대회로 가마니를 펼쳐 구호를 쓴 프래카드가 이색적이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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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에는 활용하기에 따라 우리에게 유리한 조항도 없지 않았다. 민족지도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이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결집된 역량으로 대처했으면 해방공간의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력이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신익희는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미ㆍ소 열강의 대립과 이에 추종하는 신사대주의 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며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즉각적인 자주독립정부 수립운동에 나섰으나 세불리 역부족이었다.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모스크바의 지침에 따라 1946년 초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주석
6> 유치송, 앞의 책, 453쪽.
7> 앞의 책, 45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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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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