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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앞둔 임시정부 요인들(충칭 청사 계단에서 1945년 11월3일)
 환국 앞둔 임시정부 요인들(충칭 청사 계단에서 1945년 11월3일)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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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이 형식논리적으로는 한민족의 해방이지만, 현실상황은 딴판이었다.

분단된 남쪽에서 미국(군)이 새 주인 노릇을 하고 미국의 비호를 받은 이승만이 재빠르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선수를 치고 나왔다. 이에 앞서 여운형이 건국동맹에 이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가 미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개인자격의 귀환이지만 여전히 임정 내무부장의 직함을 갖고 있었던 신익희는 행동에 나섰다. 해방공간의 막중한 시기에 언제까지나 방관자가 될 수는 없었다. 

환국하기 전 충칭에서 의정원과 정부 각료 연석회의에서 제기하였던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을 구성키로 하였다.

"우선 해공은 임정의 내무부장으로 신국가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임정의 내무부를 중앙으로 지방의 군ㆍ면에 이르기까지 조직된 정치공작대의 연락망은 유사시 행정망으로 전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해임정 초기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도와 국내의 통치조직으로 연통제를 구축하던 시기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주석 3)

정치공작대는 1946년 2월 중순 200여 명으로 조직되고 한때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정치공작대는 이름 그대로 정치행동대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 산하에 백의사(白衣社)라는 비밀결사대도 두었는데 해공은 3명의 청년대원을 밀입북시켰다. 그들은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ㆍ1절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그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이던 김일성을 죽이려 했으나 소련군 경비대장만 다치게 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주석 4)

신익희는 이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 인수를 준비하면서 이를 위해 행정연구반을 조직하였다. 농림ㆍ내무ㆍ치안ㆍ수산ㆍ광업ㆍ상공ㆍ전기ㆍ보건ㆍ문화ㆍ교육ㆍ사회ㆍ법무ㆍ외교 분과로 나누어 각 분야에 대한 연구와 실무를 통해 정권인수에 대비한 것이다.

지방의 군ㆍ면 단위까지 조직된 행정연구반 중앙의 주요 멤버는 최하영ㆍ윤길중ㆍ전예용ㆍ전봉덕ㆍ한동석ㆍ한통숙ㆍ정구충ㆍ김용근ㆍ계관순ㆍ옥선진ㆍ장철수ㆍ윤백남ㆍ차윤홍ㆍ이종일ㆍ이문세ㆍ정운근ㆍ이삼규ㆍ정경옥 등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각계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했다. 개중에는 친일부역자도 포함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9일 차리석 지사는 환국 준비중 과로로 쓰러져 중국 땅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앞줄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는 분이 부인 홍매영 지사이고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75세된 아드님 차영조 선생이다.
 1945년 9월 9일 차리석 지사는 환국 준비중 과로로 쓰러져 중국 땅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앞줄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는 분이 부인 홍매영 지사이고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75세된 아드님 차영조 선생이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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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과 내무부장 신익희는 12월 31일 「국자(國字)」 제1호ㆍ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호

①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②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ㆍ질서적으로 할 것. 
③ 돌격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④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ㆍ연료ㆍ수도ㆍ전기ㆍ교통ㆍ금융ㆍ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함.
⑤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체함.

국자 제2호

이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그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난하면서 김구와 신익희를 구속하여 인천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ㆍ우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항일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신익희를 비롯한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주석
3> 김용달, 앞의 책, 95쪽.
4> 김학준, 「해공 신익희」, 『해방공간의 주역들』, 127쪽, 동아일보사, 199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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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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