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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을 앞두고 상해공항에서. 앞줄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환국을 앞두고 상해공항에서. 앞줄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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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만에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국내 귀환을 위해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지 18일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신익희 등이 탑승한 2진은 일주일 후 전북 옥구비행장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신익희는 활주로의 흙 한 움큼을 덥석 집어 입을 맞추었다. 27년 동안 그리던 조국 강토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열정으로 새나라 건설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이 환국할 당시의 사진 (두 번째 줄 네 번째 인물이 김성숙 선생)
▲ 임시정부 요인 2진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이 환국할 당시의 사진 (두 번째 줄 네 번째 인물이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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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인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하였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끝내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요인들의 환국 과정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를 보였다. 18일 동안 상하이에 머물게 하고, 굳이 2개 팀으로 나누어 환국케하였다. 당시 미군 수송기의 성능으로 보아 1진과 2진 34명이 함께 탑승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해방 환국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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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인들을 쪼개어 들어오게 한 데는 먼저 입국한 이승만의 작용이라는 분석도 있다.

"임정을 분리 귀국시켜 자기 노선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쉬운 상황을 그는 만들고 싶었다. 1진, 2진 구분 과정에서 임정 내에 의심과 불만이 일어나는 것도 그는 바랐다. 그리고 하지의 '임시 한국 행정부' 프로젝트를 그가 맡고 있었으므로 비행기 일정 결정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주석 1)

임시정부 요인들은 2진까지 환국한 다음날 저녁 김구 주석이 머문 경교장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국내사정에 대처할 과제를 논의했다. 요인들 간에는 분리 환국한 감정도 폭발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요인들은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환국의 소견을 밝혔는데, 다음은 신익희의 소견이다.

우리 임시정부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 중국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환영해 주시는데 대하여 국민 여러분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업적을 가지고 왔소" 하고 제시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 보기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임정에 관계한 우리들은 직접 악독한 일제 치하에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기나긴 나날을 우울과 초조와 번민 속에 지낸 국내의 우리 동포 동지들에게 도리어 송구하고 미안함을 불승(不勝)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는 미 군정의 통치를 받고 있으나 우리의  앞에는 독립이 보장되어 있으니, 그 전도 해활천공(海活天空)입니다.

우리는 3천만이 단결해서 이제부터 손에 손을 잡고 마음 놓고 독립운동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비로소 이제부터 첫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독립은 누가 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해야 하며, 싸워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우리 동포와 같이 어우러져서 안심하고 운동하여 뺏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씀입니다. 끝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의 말대로 "여러 부로(夫老) 형제자매 동포 동지여!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자!"이 한 마디로 족할까 합니다. 여러분 다같이 독립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용기를 갖고, 우리 다 함께 매진합시다. (주석 2)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 주최 환송만찬회 때의 김구 주석(1945. 11.)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 주최 환송만찬회 때의 김구 주석(1945. 11.)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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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월 19일 서울에서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주석
1> 김기협, 『해방일기』2, 174쪽, 너머북스, 2011.
2> 유치송, 앞의 책, 438~43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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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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