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역사학연구소

관련사진보기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6차 임시의회를 열었다. 회의 주제는 '임시약헌'의 개정과 임시정부의 개편안이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기 직전이다. 일제의 패색이 더욱 짙어지고 있어서 임시정부는 최후의 결전과 독립에 앞서 체제정비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4일 동안 진행된 임시의회는 임시약헌의 개정과 임시정부 개편에 관한 의안을 모두 통과시켰다.

의결된 내용은, 

 가, 그동안 시행되어 온 '임시약헌'을 '임시헌장'으로 개칭한다.
 나, 정부 주석의 권한을 강화한다.
 다, 정부에 부주석 1인을 증원한다.
 라, 국무위원회의 지위를 제고시켜, 위원회 산하에 행정 각부를 두고, 각부 부장은 국무위원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선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주석 3)

새로운 '임시헌장'에 따라 정부가 구성되었다.

주석 : 김구
부주석 : 김규식
국무위원 : 이시영ㆍ조성환ㆍ황학수ㆍ조완구ㆍ차이석ㆍ장건상ㆍ박찬익ㆍ조소앙ㆍ김붕준ㆍ성주식ㆍ유림ㆍ김성숙ㆍ김원봉ㆍ안훈.

행정각부장 : 내무부장 신익희,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법무부장 최동오, 재무부장 조완구, 비서장 차이석.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 신익희 선생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정부 개편으로 신익희는 내무부장에 선임되었다. 27년 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의 역할이 다시 주어졌다. 신익희가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 세력이 광복군에 편입될 때 합류하게 되었다. (주석 4) 이어서 그는 이 해 6월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선임돼 대중외교를 맡고, 1943년 3월에는 조소앙ㆍ엄항섭ㆍ유림 등과 선전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내무위원장이 되었다.

그동안 과도적이었던 좌우합작이 이로써 마침내 성사되었다.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큰 줄기는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과 김규식 중심의 민족혁명당의 연합정부인 셈이다. 여기에 아나키스트 인사들까지 참여하였다.

임시정부가 체제를 정비하고 있을 때 전세는 결정적으로 일제에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데 이어 8월에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시켰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군에 파리가 함락된 지 4년 2개월 여 만이다.

1945년 2월 29일 일본군의 요충지 유황도를 점령하고, 4월에는 일제의 남방 방어선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일본군을 섬멸하였으며, 5월부터 도쿄를 비롯하여 본토 대도시 폭격이 시작됨으로써 일제의 항복은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1945년 2월 알타회담이 열렸다. 

얄타회담은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미ㆍ영ㆍ소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전쟁수행과 전후처리,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한 결정을 하였다. 여기에서 독일의 분할점령과 비무장화, 폴란드의 국경선, 그리고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관한 비밀협정이 체결되었다. 즉 독일 항복 3개월 이내에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며, 그 대가로 소련은 사할린 열도를 얻고, 만주에서 중국 주권을 회복하며, 대련의 국제항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등이 비밀리에 협약되었다. 

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공식 거론되지 않았으나, 루스벨트가 제안한 미ㆍ중ㆍ소 3국의 신탁통치안이 재확인되었다. 장개석은 회담에 초청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한반도 문제가 불리하게 처리되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국무위원회 명의로 채택한 「건국강령」을 토대로 일제패망 후 새나라를 세울 방략을 마련하는 한편,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창설한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진공시키기 위해 맹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김원봉과 신익희가 이끌어온 조선의용대가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정치통합에 이어 군사통합까지 이루게 되었다.


주석
3> 『신화일보(新華日報)』, 1944년 4월 26일치 (제2판).
4> 조동걸, 앞의 책, 29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