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31 07:34최종 업데이트 21.09.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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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9

아비의 상머슴 자리는 박서방이 물려받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강막골로 내려가는 것도 박서방이었다. 박서방은 옥희의 남동생 옥남이와 함께 나를 데리고 갔다. 머슴들 중에 글을 아는 것은 아비와 나뿐이었다. 아비는 어려서 서당을 다니며 사서삼경을 읽었고, 나는 아비에게 드문드문 천자문과 우리글을 배웠다. 박서방은 상머슴이 되었지만 장부를 적을 수 없었다. 아비가 기록해둔 지난해 장부와 대조를 하며 작인 별로 금년 소출과 작료를 적는 것은 내 몫이었다.


아비 생전에는 나흘도 걸리지 않던 일이었는데 열흘도 더 걸렸다. 올해 작료가 지난해보다 구십 석이나 줄어들자 박서방은 안절부절했다.

"이렇게 갑자기 작료가 줄면 진사어른이 어떻게 의심쩍어하지 않겠소."
"가뭄이 들어 관서지방 전역에 흉년이 든 걸 어찌한단 말이오."

마름 김씨는 볼멘소리를 했다.

"가뭄 든 거야 누가 모르겠소. 그래도 이렇게 너무 많이 줄면 내가 무슨 낯으로 진사어른에게 말씀을 올리겠소."
"작료를 더 받아내면 좋겠지만 보다시피 작인들도 내년 보릿고개가 오기도 전에 양식이 다 떨어지게 생겼으니, 좀 봐주시오."
"나도 곤란하지만 진사어른이 마름을 바꾸라고 하면 난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박서방이 그렇게 을러대자 마름의 태도가 달라졌다. 김씨는 박서방을 앞세우고 작인들의 집을 다시 한 바퀴 돌며 작료를 올려 매겼다. 나는 작인들의 원망에 찬 눈길을 피하며 장부를 고쳐 적었다. 초가의 지붕도 갈아 올리지 못한 집에서는 작인이 쌀독을 열어 보이며 싹싹 빌었다.

"지난봄에 장리보리 얻은 걸 갚고, 남은 게 없어 당장 장리쌀을 얻어야 할 지경입니다. 제발 좀 봐주세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작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아이들의 원망에 찬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아이와 눈길이 마주친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재작년 겨울 강막골 아이들과 어울려 처음 토끼몰이에 나갔다가 넘어진 나를 업어준 녀석이었다.

"이름이 뭐야?"
"달음이. 잘 달린다고, 달음이."

한 번만 들으면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그 아이는 산에서 노루마냥 정말 잘 뛰었다. 나무를 탈 때는 다람쥐만큼 날래기도 했다. 나는 박서방과 김씨의 소매를 차례로 슬며시 잡아당겼지만 그들은 기어코 작료를 두 말 더 매겼다. 달음이와 나보다 더 어린 아이들 눈앞에서 차마 장부를 고쳐 적지 못하고 사립문을 나서는 나에게 박서방이 한숨을 쉬었다.

"난들 하고 싶어서 하겠냐."
"하고 싶지 않은 걸 왜 해요. 당장 먹을 게 없다잖아요."
나는 장부를 고치지 않고 버텼다.

"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그렇게 말하는 김씨 앞으로 내가 장부를 내밀었다.

"하세요."
까막눈인 김씨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비가 떠난 다음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 몰랐다. 내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아온 박서방은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려고?"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박서방이었다.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그의 앞에서 나는 장부를 고쳤다. "한 말 더 올렸어요."

그것은 타협도 양보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동정이었을 뿐이란 걸 깨달은 건 여러 해 뒤였다. 이틀 동안 내가 줄일 수 있었던 작료는 고작 한 석도 되지 않았다. 아니다. 내가 다시 늘려 적은 작료가 서른네 석이나 되었다.

심통이 난 나는 장진사네 선산을 돌아보는데 따라가지 않았다. 장진사의 어미, 아비가 죽었을 때 3년씩 묘를 지키며 날마다 백반을 올린 것은 내 아비였고, 본받을 효자가 된 것은 따뜻한 안방에서 드러누워 지낸 장진사였다.

선산을 다 둘러본 다음에도 박서방은 부지런히 산을 돌아다녔다. 줄어든 작료를 산삼이나 송이, 골쇄보로 벌충할 요량이었다. 아비가 산삼 캔 곳을 일러달라는 박서방을 나는 산너머로 데려가 딴청을 부렸다. 골쇄보가 있는 벼랑은 반대편으로 해서 제 자리를 찾아주었다. 골쇄보만 뜯고 산삼은 구경조차 못한 박서방을 보고, 자기도 걱정이 되었는지 마름이 송이를 제법 구해왔다.

나는 평양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에 산돌이를 데리고 토끼잡이를 간다며 마름의 집을 나섰다. 따라가겠다는 옥남이가 변소에 간 사이 나는 산돌이를 데리고 냅다 뛰었다. 산삼밭으로 가는 길은 나보다 산돌이가 더 잘 기억했다. 녀석은 작년에 산토끼의 숨통을 끊은 자리를 찾아 정확히 파헤쳤다. 산돌이를 바라보는 내 귓가에 아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삼밭에서 피를 본 게 좀 그렇구나. 산삼은 신령한 곳에서만 자라거든.'

산돌이가 여기서 산토끼를 잡지 않았으면 아비가 다치지 않았을까. 아비 대신 내가 피 묻은 토끼를 허리에 차고 갔으면 아비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에게 속한 것은 너 하나고 너에게 속한 건 나 하나인데 내가 네 아비여서 미안하구나.'

내가 심통을 부려 아비의 정신을 어지럽히지만 않았다면 아비가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내 어깨를 산돌이가 타고 올랐다. 가뭄이 지나간 겨울이어서 일까. 응달에만 눈이 쌓였고, 해가 드는 능선의 나무들은 앙상한 팔을 펼친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아비가 없는 산은 나무마저 외로웠고, 바람소리조차 슬펐다. 산돌이도 그랬을까. 등 뒤에서 어깨를 타고 오르던 녀석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산삼 세 뿌리를 캤다. 둘은 아비가 일러준 굵기를 넘어섰고, 하나는 좀 모자랐지만 캤다. 더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었다. 호미 하나로 캐다가 떨어져나간 잔뿌리를 그 자리에서 먹어버리려다 말았다. 병약한 옥남이가 떠올라 잔뿌리는 주머니에 따로 챙기고, 나는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마른 줄기를 씹었다. 질기기만 하고 아무 맛도 없는 이걸 맛있다고 씹으며 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던 아비가 떠올랐다.

"너 이거 먹어."
나는 저녁을 먹기 전에 물에 깨끗이 씻은 산삼 잔뿌리를 옥남이에게 주었다.
"형아,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럼. 도라지 뿌리야. 감기 기침에 좋대."
옥남이는 겨우내 감기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럼 큰 거 주지, 나 다시 안 아프게."
"어른들은 큰 거 먹고, 애들은 작은 거 먹어야 나아."

다음날, 강막골을 떠나기 전날 오후에 나는 토끼잡이를 가자며 달음이를 불러냈다. 토끼잡이는 하지도 않고 나는 들고 간 포구총으로 참새 사냥을 했다. 달음이는, 달음질은 최고였지만 총질은 영 아니었다. 녀석에게 저격하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포구알만 낭비했고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얼음 아래로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에서 내가 잡은 참새 세 마리를 달음이가 아주 먹음직스럽게 구웠다. 녀석은 가장 큰 놈을 내게 내밀었다. 입안에 고인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가게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나는 그가 내민 큰 참새를 도로 그에게 쥐어주었다. 한 마리는 산돌이에게 주고, 마지막 남은 한 마리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고마워."
녀석이 구운 참새를 든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
"한 말로 줄여줘서."

나는 녀석의 눈을 피하며 가슴에 숨겨온 삼 한 뿌리를 꺼냈다.

"내가 미안해. 이거 가져가. 한 말 값의 몇 배는 될 거야."

달음이는 절대 내게 받았다는 얘기를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강막골산이 아닌 소마대산의 깊은 산중에서 달음이가 캔 것으로 입까지 맞추어 두었다. 김의원과 달음이, 산돌이 외에는 내가 산삼을 캔 것을 알 리 없었다.

 
10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매보다 센 놈이 추위고, 추위보다 센 놈이 배고픔이고, 배고픔보다 센 놈이 졸음이다. 매를 맞고 추위에 떨며 배고픔에 시달리다 잠이 들었다. 가마니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든 내 뺨을 덮은 따스한 손길에 눈을 떴다. 옥희였다. 내 머리를 무릎으로 받친 옥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춥지?"
"쫌."
내 뺨을 감싼 옥희의 작은 손이 일어나려는 내 얼굴을 눌렀다.

"얼굴이 얼음덩이야. 좀 녹으면 일어나."
내 왼쪽 뺨을 받친 옥희의 허벅지와 오른쪽 뺨을 감싼 손바닥의 따뜻함에 묻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갑산댁의 젖을 함께 나누어 먹고 자란 옥희는 오누이와 같았다. 여름이면 서로 스스럼없이 등목을 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서먹해졌다. 옥희는 입고 있던 마고자를 벗어 시린 내 허리를 덮어주었다. 내 코에 닿은 배꼽을 통해 옥희의 들숨과 날숨이 전해왔다. 스르르 다시 잠이 들려는 순간 옥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녁 굶었나?"
"누나는 감자밥 먹었다. 너는 배 많이 고프지?"
두 달 먼저 태어난 옥희는 자기가 누나임을 앞세우곤 했다.

"쫌... 뭐 먹을 거 없나."

옥희가 내 뺨에서 손을 떼고 감자를 싸온 보자기를 풀었다. 두개는 밥솥에 찐 것이고 하나는 군불에 구운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개는 갑산댁이 쪄 준 것이고, 하나는 옥희가 군불에 몰래 구웠을 것이다. 구운 감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남은 감자를 쪼개 반을 내밀었지만 옥희는 고개를 저었다.

"난 내일 아침 먹을 건데, 뭐."
"이유내일?"

내일이 있다고? 이유내일(而有來日)은 아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었다. 원래는 '물위 금일불학 이유내일(勿謂 今日不學 而有來日)'이었다.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드문드문이지만 아비는 나와 옥희에게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쳐주었다. 아비는 그것을 통해 내가 노비가 아닌 양인의 자식임을 일깨워주려 한 것 같지만 나는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깟 글을 배우나 안 배우나 머슴이긴 마찬가지란 것 정도는 천자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딴전을 부릴 때마다 아비는 이 열 글자를 읊게 했지만 나 대신 낭랑하게 '물위 금일불학 이유내일'을 외는 것은 언제나 옥희였다. 내게 젖을 나누어주고 어미 대신 옷을 기워주는 갑산댁에 대한 품앗이로 아비는 옥희와 옥남이를 내 옆에 앉혀 함께 가르쳤다. 아비에게 꾸중을 들으며 글공부를 마치고 둘만 있게 되면 옥희는 운율을 넣어가며 제법 양반처럼 점잖을 떨었다.

'물∼위, 금일불학 이유내일∼'
옥희는 나와 달리 글공부를 좋아했고, 아비가 가르쳐준 명심보감의 글귀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곧잘 외웠다. 그러면 나는 금일불학, 네 글자를 빼버리고 맞받았다.

'물∼위. 이유내일∼'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 아비 생전에 장난으로 했던 이 말이 오늘은 현실이 되었다는 걸 나는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 너나 나나 내일이 없긴 마찬가지지만 나에게 내일 아침밥은 있네. 넌 그것조차 없고."
"그깟 감자죽?"
"넌 그깟 감자죽도 구경 못하고 굶어야 하잖아. 이것도 마셔."
옥희가 표주박에 담아온 숭늉은 식었지만 이가 시리지는 않았다.

"산돌이는 뭐 좀 얻어먹었나."
"지금 네가 산돌이 걱정할 때야?"
"산돌이한테는 나뿐이잖아."
"산돌이 없어. 팔뜩이 아저씨가 데리고 강막골로 갔어. 진사어른이 부른 약초꾼들하고 같이."
비스듬히 누워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뭐?"
산돌이를 앞세워 산삼밭을 찾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려고 했다. 옥희가 팔을 뻗어 내 허리춤을 잡았다.

"어쩌려고?"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옥희와 갑산댁, 박서방을 곤경에 빠뜨릴 순 없었다. 산돌이가 나를 배신하고 그들에게 산삼밭을 안내할까. 아니다. 그건 배신이 아니다. 나 아닌 누구도 그곳에 데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녀석이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다음이었다.

"산돌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걱정은 안 돼?"
옥희는 나란히 기대앉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
"나 여기 떠나."

옥희가 함경도로 시집 살러 갈 거라는 소문은 지난여름부터 떠돌지만 나는 설마 했다. 자기가 누나라고 우겼지만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처럼 여겨지는 옥희였다. 똑똑하고 야무졌지만 마음이 여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집살이 간다고?"
"시집살이 가기는 무슨, 종살이 가는 거지."
"언제?"
"곧."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두운 광 안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어디를 바라본다 해도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이 어두운 허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내일이 그곳에 있었다.

"양반집이야?"
"머슴의 딸이?"
옥희는 떠나기 전에 나를 안아주었다. 내 명치에 밀착된 옥희의 작은 가슴이 콩콩 뛰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았네. 물∼위 이유내일. 우리에게 내일 같은 건 없었어."
"어쩌려구?"
"무엇이 되던, 난 어미처럼 소만도 못한 종으로 살진 않을 거야. 넌?"
"..."
"야, 깡. 너 내가 없어져도 내 동생 지금처럼 돌봐줄 거지? 옥남이 지금처럼 살펴줘. 이 누나가 부탁해."

밖에서 광의 문을 걸어 잠근 옥희가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보처럼 서 있었다. 가지 마. 옥희가 그렇게 아주 사라져버릴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나는 벌써부터 산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가 돈을 얼마나 모아두었는지도 얘기했을 것이다.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될까?"
옥희가 남긴 마지막 말이 광을 삼킬 듯이 불어대는 겨울바람 소리를 밀어냈고, 나는 그 밤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 밤의 외로움은 추위보다 더 떨렸고, 배고픔보다 더 서러웠으며 졸음으로도 도무지 가릴 수가 없었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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