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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일본인의 기부? 군산 주민센터 아래 묻힌 슬픈 역사에서 이어집니다.

역사 연구자 하지연에 따르면, 구마모토는 자신이 소유한 농장을 '치밀하게' 관리했다. 헨리 포드(Henry Ford)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과학적 영농'을 지향했다. 영농 전문가를 영입하고, 제국대학과 상업학교, 농림학교 출신을 농장 직원으로 채용했다. '구마모토 농장의 농사 기술이 조선총독부 농정당국 정책보다 10년 정도 앞서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사람들이 일본에서 우수하게 공부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을 갖다놓고 지도했는데 (구마모토는) 머리가 보통 사람들이랑은 달라. 직원을 뽑아도 다 유능한 사람들만 뽑아. 그때 당시 그 주위 집장보다 월급을 조금 더 줬어. 더 주면서 뭣을 했냐면 농촌사업을 겸했어. 소작료를 많이 받음과 동시에 농사짓는 개선방안 권장을 했어. 머리를 조금 더 쓴 것이지."

구마모토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한 사람의 회고다. 구마모토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 썼고, 직원 급여도 다른 농장보다 많이 줬다. 1940년 당시 구마모토 농장 일본인 직원은, 농사시험장 소속 일본인 직원보다 30% 이상 급여가 높았다.

여의도의 13배에 달했던 구마모토 농장
 
공덕비에 새겨진 정식 명칭은 '구마모토 리헤이 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적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구마모토 공덕비는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죽산주재소 앞마당에 있다.
▲ 구마모토 리헤이 공덕비 공덕비에 새겨진 정식 명칭은 "구마모토 리헤이 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적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구마모토 공덕비는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죽산주재소 앞마당에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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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농장은 옥구군 개정면에 '본장'(本場)을 두고, 지경과 대야, 화호에 '지장'(支場)을, 전주에 '분장'(分場)을 두었다. 구마모토 농장은 옥구, 김제, 부안, 정읍, 완주 5개군 26개면에 걸쳐 있었다.

1935년 2월 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개인 농장을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으로 바꾸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주식회사였지만 회사 지분의 90% 이상을 구마모토가 소유했다. 자신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면서, 농장을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둘째 동생을 감독으로 뒀다. 구마모토의 과학적 영농은 수탈과 착취의 극대화를 위한 방편이었다.

조선에서 큰돈을 번 구마모토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학교에 학자금을 기부했다. 1923년 나가사키 이키고등여학교 설립 때 1만 엔을 기부했고, 1931년부터 10년 동안 경성제국대학에 매년 3천 엔씩 기부했다. 세이조학원고등학교(成城學園高等學校) 창립 때도 5년 동안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다.

1918년 2월부터는 군산소학교 출신을 지원하기 위해 군산교육회에 장학금을 기부했다. 1919년에는 '보인회'(補人會)라는 장학단체를 만들어, 조선인과 일본인 유학생을 지원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몇몇 <인명록>에는 구마모토에 대한 평이 남아 있다.

"학식과 경험, 담력, 삼박자를 갖춘 사람"
"명석한 두뇌와 냉정한 판단력을 지님"
"세상 물정과 민심 변화를 파악하는데 뛰어남."


다른 한편, 식민지 치안을 담당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그를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교활하고 말이 많다[多辯]"
"신용도 후하지 않다"


일본에서는 구마모토의 성공과 공덕을 칭송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부와 공덕은 조선인 수탈의 결과물이었다.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앞뜰에는 '구마모토 리헤이 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가 서 있다. 1924년 흉년이 심하게 들자, 이 일대 땅을 가졌던 구마모토가 종자를 제공한 일에 감사를 표하는 비석이다. 구마모토는 왜 종자를 제공했을까? 그의 종자 제공 역시, 수탈을 위함이었다.

이영춘이 구마모토 농장으로 간 까닭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이영춘은, 군산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장으로 부임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그는, 한국인의 위생 개선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영춘 흉상은 군산간호대학교 교정에 있다.
▲ 쌍천 이영춘 흉상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이영춘은, 군산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장으로 부임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그는, 한국인의 위생 개선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영춘 흉상은 군산간호대학교 교정에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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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농장 안에 '진료소'(병원) 설립을 구상했다. 소작인이 건강해야 더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산은 조선 농민에 의한 소작 쟁의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농장주의 수탈이 가혹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모범농장으로 꼽힌 구마모토 농장은, 1930년대 초반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증산(增産)을 전제로 소작료를 높였기 때문에, 소작인은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을 통한 수탈', '수탈을 위한 증산'을 추구한 그의 농장 경영은 '구마모토형(熊本型) 지주(地主)'라고 불렸다.

구마모토 농장은 소작료도 비쌌지만, 증산을 위해 빌려준 비료에서 차익을 또 뗐다. 농장 방침을 어기면 욕설과 구타가 이어졌다. '모범농장'이라는 그의 농장 경영이, 얼마나 가혹한 착취에 기반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소작인에게 구마모토 농장은 '악덕농장'일 뿐이었다.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나자, 구마모토는 이를 무마할 생각으로 농장에 진료부와 자혜진료소 설립을 계획했다. 채찍과 당근을 함께 구상한 것이다. 이를 위해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돌볼 '조선인 의사'를 구했다. 구마모토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던 이영춘(李永春)에게 농장 의사 자리를 제안했다.

이영춘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명문인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에서 공부했다. 1935년에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구마모토의 제안을 받은 시점에 세브란스의전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경성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이영춘은, 고심 끝에 구마모토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 진료를 시작한 지 10년 되는 해에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해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선예방, 후진료'를 통해 질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영춘은, 연구소 설립을 통해 조선 농촌의 위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

이 제안을 구마모토가 받아들이면서, 이영춘은 경성을 떠나 구마모토 농장으로 향했다. 이영춘의 자혜진료소 의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얼마든지 의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그는, 군산에 와서 수많은 조선인을 돌봤다. 구마모토는 개정본장에 이어, 화호지장과 지경지장에도 진료소를 추가 설치했다. 이영춘과 함께, 세브란스의전 출신 김성환과 김경식이 진료를 담당했다.

구마모토 농장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해, 조선과 이영춘은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패전하자, 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구마모토 별장이 이영춘 가옥이 된 사연 
 
군산시 개정동 봉정요양병원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대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가 별장으로 지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00호다.
▲ 이영춘 가옥 군산시 개정동 봉정요양병원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대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가 별장으로 지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00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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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의 농촌위생연구소 설립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영춘은 군산 개정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진료를 이어가던 그는,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영춘은 농촌의 보건과 위생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대다수 한국인이 농민인 시절이었다. 농촌의 보건 개선은, 한국인 전체의 위생을 향상시키는 사업이었다. 이영춘은 기생충, 결핵, 성병, 이 3가지를 '민족의 독'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가 1980년대까지 체변 봉투를 통해 기생충을 확인하고, 구충약을 먹은 것도 이영춘의 노력 덕분이다. 이영춘은 대한기생충학회와 대한기생충박멸협회를 이끌며 기생충 '퇴치'를 위해 힘썼다.

군산에 있는 적산 가옥 중 일반에게 공개된 곳이 두 채 있다. 히로쓰 가옥과 이영춘 가옥이다. 히로쓰 가옥은 <타짜>를 비롯한 여러 영화를 통해 널리 소개된 곳이다. '이영춘 기념관'이 된 이영춘 가옥은, 군산의 근현대사가 압축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농장에 별장을 지었다. 대지주였던 구마모토는 일본에 머물다가 한 해 두세 번 이곳 별장에 머물며 농장 사업을 챙겼다. 바닥에는 티크 목재를, 벽에는 백두산 낙엽송을,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했다. 1920년대 구마모토가 이 집을 지을 때 들인 비용은, 조선총독 관저의 건축 비용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의 부와 위세가 조선 총독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되면서 구마모토 리헤이가 머물던 별장에 이영춘이 살게 됐다. 구마모토 별장이 '이영춘 가옥'으로 불리는 이유다. 구마모토의 연구소 설립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영춘에게는 별장과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만 남았다.

1951년 7월 이영춘은 자신이 설립한 농촌위생연구소에 '고등위생 기술원 양성소'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이영춘은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4년제 간호대학인 군산간호대학교는 이렇게 출발했다.

두 도서관 이야기
 
1951년 설립된 군산간호대학교는 2021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사진은 2010년 신축한 군산간호대 경암관의 모습이다. 군산간호대학교 도서관은 경암관 3층에 자리하고 있다.
▲ 군산간호대학교 도서관 1951년 설립된 군산간호대학교는 2021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사진은 2010년 신축한 군산간호대 경암관의 모습이다. 군산간호대학교 도서관은 경암관 3층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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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돌아간 구마모토 리헤이는 어떻게 됐을까?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구마모토는 2934정보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패전 상황으로 기울자, 그는 전쟁에 협력하는 한편, 자신의 땅을 담보로 조선은행과 일본 권업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일본으로 반출했다.

1945년 8월 말 구마모토는 자신의 고향 이키로 돌아갔다. 조선에서 큰돈을 번 그는, 고향 소학교에 강당을 짓고, 도로를 개설했다. 이키군 인도지항(印通寺港)에 방파제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기부 활동 덕분인지, 이키(壱岐)시립 이시다(立石田)초등학교 교정에는 1970년 세운 구마모토의 흉상이 있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1968년 8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구마모토가 유명을 달리한 해로부터 12년 후인 1980년 11월, 이영춘이 세상을 떠났다. 문화훈장을 받았던 이영춘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었으나, 자신이 일생을 바친 군산 개정에 묻혔다.

이영춘이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인 1983년, 군산간호대학교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군산간호대 도서관은 경암관 3층에 자리하고 있다. 좌석 수 346석, 3만8350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이영춘이 아니었다면, 군산간호대학과 그 도서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군산간호대학 교정에 이영춘의 흉상이 서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구마모토 리헤이의 기부로 전기를 맞은 군산도서관은, 군산부립도서관 시절을 거쳐, 해방 후 '군산시립도서관'이 됐다. 1976년 1월 9일 '군산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도서관은 문화동 885번지에 있었다. 2009년 6월 9일 '군산시립도서관'은 지금 위치인 수송동 798-1번지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

군산의 두 도서관, 군산시립도서관과 군산간호대학 도서관은 구마모토 리헤이와 이영춘 두 사람이 있었기에 문을 열었다. 두 도서관 사이에, 수탈로 성장하고 쇠락한 '군산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도서관은 우리에게 왔다
 
역사가 100년이 넘은 군산시립도서관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공공도서관이다. 군산도서관, 군산부립도서관, 군산시립중앙도서관 시절을 거쳐, 2009년 건물을 신축했다. 역사에 비해 장서량이 많지는 않다. 2021년 5월 현재 151,377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 군산시립도서관 역사가 100년이 넘은 군산시립도서관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공공도서관이다. 군산도서관, 군산부립도서관, 군산시립중앙도서관 시절을 거쳐, 2009년 건물을 신축했다. 역사에 비해 장서량이 많지는 않다. 2021년 5월 현재 151,377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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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군산은 급속히 성장했고, 높은 도시 집적도를 보였다.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가 '쌀의 군산'이라고 칭했던 도시는, 해방 이후 '쌀 수출항'으로서 위상과 기능을 급속히 잃었다.

쌀 수출항구라는 일제 전략 속에 급성장한 군산은, 대한민국 수립 후 경부선을 축으로 하는 중화학공업 성장 전략 속에 쇠락했다. 제3세계 여느 도시처럼 '정책의존형 도시'였던 군산은, 국가 정책에 따라 성쇠를 맞았다.

일제가 물러간 후 군산은 쇠퇴했고, 대한민국 시대에 호남이 저개발 상태에 놓이면서 식민지 시절 건축물이 그대로 남았다. 다른 도시와 달리 군산에 일제강점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건, 군산을 비롯한 호남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군산이 최근 들어 주목받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저개발이 남긴 '시간의 상흔'이라고 해야 할까.

도서관을 통해 우리는 군산이라는 도시의 성쇠를 들여다볼 수 있다. 군산시립도서관은 현존하는 호남 공공도서관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 역사가 100년을 넘긴 도서관은, 호남에서 군산시립도서관이 유일하다. 군산시립도서관보다 역사가 오랜 공공도서관은, 한국 전체를 통틀어도 1901년 문을 연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이 있을 뿐이다.

구마모토와 이영춘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린 도서관은 우리에게 남았다. 한국 도서관의 특징은 뭘까? 일본으로부터 제도를 이식한, 우리 도서관 역사는 어떤 특성을 지닐까?

구마모토의 농장에 '개발'과 '수탈'이 공존했듯, 우리 도서관 역시 '근대성'과 '식민성'을 함께 지녀왔다.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서관'은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도서관'이 됐다. 이 과정이 바로 우리 도서관의 역사다.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도시가 군산이며, 사람으로는 구마모토 리헤이와 이영춘, 도서관으로는 군산시립도서관과 군산간호대 도서관이다.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시설과 장서를 거둬, 우리는 도서관을 다시 열었다. '그들의 도서관'은 비로소 '우리의 도서관'이 됐다. 도서관은 이렇게 우리에게 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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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 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춘기 딸과 고양이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하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썼습니다. sugi95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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