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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에서 초당 가는 숲길
 백련사에서 초당 가는 숲길
ⓒ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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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 전 고려시대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사적비 옆에 현재에 이르러 새로 깎아 올린 비가 있었다. 석굴암이고 석빙고며 경복궁의 건축 양식을 들어 이제 우리는 그런 건축과 축적을 못 이룰 것이라는 한탄이 잦았지만 내 눈엔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는데, 굴삭기와 덤프트럼으로 자재를 나르고 폐기물을 버리는 요즘 기술로 짐작해봤을 때, 약간의 엄살 아닐까 싶다. 물론 지게차나, 포크레인, 자재 조달용 트럭으로 고작 5분여 만에 수령 백 년은 좋이 될 나무를 베는 일은 인근 절간에 울력을 청해 절집이에 응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아무튼 백련사 신도들이 희사해 새로 마련했을 법한 비는 그럴싸했다.

초당 가는 산길은 거칠었다. 잘 조성되고 풀도 싸악 정돈된 길을 기대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가는 길에 부도(浮屠_본래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을 이르나, 절집에서 오래 살다 고요함에 들던 당대 개결한 스님들의 사리를 안치한 탑으로 오늘날에 이어진다)를 여러 기 봤고 이름과 생애를 알 수 없는 묘도 몇 기를 지나쳤다. 요행히 얻은 지팡이를 짚어 그냥 걷던 때보다 걸음은 한결 수월했다.

구례 연주암, 하동 불일폭포를 걸으며 들렸던 녀석들의 소리가 계속됐다. 모기향을 피우며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었다. 나뭇가지에 매어진 한국 천주교 순례(순교)길을 안내하는 띠가 이채를 띠었다. 오던 길을 되짚어가면 천년 고찰이라는 산문에 다시 들어선다. 다산이라는 이단생이 유교, 천주학, 불교 모두 참례했고 교류했기 때문에 벌어진(?) 동선이다. 박학(博學)에 달하는 그의 관심이 교를 넘었고 강진 땅에 남아있다. 지팡이로 산길을 누르며 걷는다.

꽤나 걸렸다. 평지에선 몇 Km를 걸어도 팔팔하던 나는 산중에만 오면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람이 된다. 천행으로, 요즘 일군의 젊은 사람들이 산행에 진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은 연세 지긋한 분들의 취미이자 만남의 광장으로 알았건만, 그들의 발 디딤에 환호작약했다. 제한이 필요하겠지만 산을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는 사실에 산 아래 있는 내가 좋아했던 때가 여러 날이었다.

습한 기운과 잠깐 내린 비에 젖어 흙길은 부풀어 올랐다. 신발에 토흔이 남을까 바위 사이 사이로 발을 대어 작은 재를 넘어간다. 백련사에 내려주시던 기사님의 말을 들을 걸 계속 생각했다. 평지 길을 고르라던. 어른 말은 들어야 한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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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현판
 다산초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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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후배가 예약했다는 우이령길을 걷던 기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때쯤, 골이 깊어 사위 이끼로 가득할 듯한 초당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다산이라는 대학자의 집안과 지위를 생각해서 아무리 유배되었다 한들 이름이 그렇지, 한미한 초당 정도에서 묵지는 않았으리라 내심 기대했다. 기대는 무산되었다. 초당 접어드는 입구에는 작고 깊어 보이는 연못이 조성돼 있었는데, 아마 현재에 이르러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유배객이 당대에 그럴 수는 없었으리라. 멋들어진 자취였다.

초당은 천일각, 서암, 초당, 동암 네 가지 건물로 지어져 있다. 현판으로 매달아 놓은 글씨가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이 궁벽한 골짜기까지 내몰리는 과정을 더듬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미 강진읍 사의재에서 주모에게 얻어맞은 듯 뭔가를 깨우친 뒤라 자신의 처지에 크게 개의하지 않았을까.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가 지정한 순례길에 속한다. 초당 옆에 스탬프가 마련돼 있고, 방명록도 준비돼 있다. 수첩을 꺼내 도장을 누르고 방명록에 글 한 줄을 적었다. '다신 형제(茶山 兄弟)님과 만민의 평화를 빕니다!'. 요즘 몇 주간 손으로 글 적을 일이 없었기에 우툴두툴한 글자가 맘에 안 들었고, 이미 선종해 세상을 떠난 인물에겐 '안식(安息)'이라는 표현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 글자를 덧 적었고 결국 안 더하기만 못한 꼴이 되었다. 괴발개발인 글자를 두고 '고졸(古拙)'하다고 여겼지만 정신승리일 뿐이었다. 에이.
초당 방명록에 남겼던 글씨
 초당 방명록에 남겼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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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써야 할 원고가 있어 초당에 주저앉았다. 선각이 후몽(後蒙)의 글씨를 내려보시겠거니 했다. 해당 원고는 미국 모더나 사가 이미 계약됐던 백신 제공분을 계약 내용대로 전부 제공할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던 날의 소식이었다. 마진(痲疹)이라고 불리던 홍역을 연구해 어떻게 하면 돌림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서를 짓기도 했던 그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버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노트북 자판을 누르는 족족 풀모기에 쏘이는 느낌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왔던 나의 몽매함을 한탄했다. 강진읍내로 돌아가면 기피제와 물파스를 꼭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기사를 매조지하고 전화기 테더링을 이용해 데스크에 넘겼다. 그 옛날이면 재와 강을 넘고, 말을 갈아타며 거듭 졸린 눈을 비비면서 몇날 며칠을 지쳐 달렸어야만 가능한 일을 나는 고작 몇초 사이에 치워버렸다. 편리와 쾌적에 익숙한 현대인은 내내 쏘는 풀모기의 공격에 그런 고마움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것이겠거니, 이런 생각도 안 했다.

다산 형제님께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나왔다. 산길을 힘들게 오르는 방문객들이 보였다. 가족 단위 분들로 아이에게 이곳을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인가 싶었다. 그러나 사실, 아잇적엔 몸 편하고 시원하고 쾌적하며 눈앞을 부실 정도의 화려한 무엇이 번쩍번쩍 거리는 곳을 선호하지, 이런 데는 좀 성가셔하지 않나. 내가 그들을 과소평가하나. 암튼 나는 그랬다.

그래도 꽤 걸었는지 발을 쿡쿡 누르는 바윗길이 묵지근한 통증을 전했다. 백련사에서 주워온 지팡이로 땅을 세게 짚는다. 어디 누워 막걸리나 한 잔 들이켜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돌아다니는 일이 쉽잖다. 일상에 매여 이럴 염도 못 내는 분들이 이 글을 읽지 않으시길. 한량은 말을 줄인다.

백련사 정거장에 내려주신 기사님은 늦어도 오후 5시 30분에는 다산초당 버스 정거장에 나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 그것이 막차일 것이라고 했다. 서둘러 걸어 그 전에 도착했다. 호젓한 정취. 정거장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과 수지가 함께 앉았던 간이 정거장을 닮았다. 그 장면을 보는 동안 상영관 내부에는 일말의 공기도 돌 틈이 없었다. 배우 둘 사이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 곁엔 누구도 없었다.

하늘이 좋았고 해가 식어가는 무렵이었다. 앉는 자세마저도 불편해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고, 자가용 몇이 내 곁을 지날 때 안에 탄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듯하여도 그걸 내가 개의할 건 아니었다. 한국처럼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회에서 이번 부유를 통해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초연함 하나만 얻어도 여정에 쏟은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묵직한 경유 배기음 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온다. 노랗고 큰 덩치가 마냥 정겹게 보인다. 버스에 오를 때 혜장과 초의선사가 우편에서, 다산 선생이 왼편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듯 느껴졌다. 길은 마냥 고라 흐뭇하고, 길 저편으로 일망무제 들판과 다붓한 능선이 눈 안에 들어올 때 편안했다. 계절은 여름 지나,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https://blog.naver.com/leehhwanhee/222476924606)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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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지망생으로 살았다. 가수지망생, PD지망생을 거쳐 취업지망생까지. 지망은 늘 지망으로 그쳤고 이루거나 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야기를 짓는 일을 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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