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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한 인물과 관련된 선의의 글이 나에게는 슬픔과 고통일 수 있으나, 타인에게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넋두리일 수 있다는 사실, 또 자칫 불필요한 오해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록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신 분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한편의 삽화로 그릴 수 있다면 크게 욕되지는 않을 것 같아 짧은 글로 남기고자 한다.

1991년 4월 29일. 당시 전남대학교 2학년이었던 박승희는 자주와 민주를 외치며 교정에서 분신하였다. 그해 봄, 승희의 뒤를 이어 열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과 청년 학생이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산화해간 사실을 여기서는 길게 쓰고 싶지 않다.

박심배씨는 박승희 학생의 아버지였다. 전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딸을 보고 비통한 모습으로 담배만 피우던 아버지에게 내가 무슨 말로 접근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5월 같이 담배를 피웠고 끼니를 놓치지 않고 챙기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형과 아우라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이 되었던 박승희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책임을 맡았고, 7년 전에는 승희 배상금과 사재를 털어 장학 재단을 만들었던 형을 도와 동참했던 이유는 형과 아우의 인연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심전심으로 살았던 30년 세월. 그런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이견이 없었던 까닭은 우리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믿고 기다려주었던 형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다.

형이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은 것은 은 7년 전이었다. 기나긴 항암의 고통을 하소연하면서도 재단 설립을 위한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목포와 광주를 오가던 형에게 나는 힘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재단 설립이 끝나고 첫 장학금을 전달하던 무렵 나조차 암이라는 병과 만나게 된다.
같은 암 환자였음에도 형은 자신의 아픔보다 내 걱정을 했다. 지금도 아내는 뒤늦게 암 수술과 투병에 들어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자주 찾아주고 위로해 준 사람이 형이었다고 기억하며 고마워한다.

망월동에 거행된 민주열사의 추모제라도 있는 날이면, 목포 가는 지름길을 두고 우리가 사는 집에 들러 우리를 위해 챙겨온 떡이라며 내놓았던 형과 형수님의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더러는 형에게 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몰아내듯 어서 가시라고 보낸 적도 있었으나 목포에 도착한 형은 또 나를 걱정하며 용기 잃지 말라는 전화를 남겼다.

지난 5월, 의지로 버텼던 형은 딸의 30주기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서둘러 아내와 함께 목포를 찾았던 날, 짧은 시간에 너무 앙상해진 형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형의 손만 잡고 있었다. 겨우 빨리 일어나 민어를 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했지만, 내 말에 눅눅한 습기를 느꼈음인지 형은 잠시 창밖의 하늘을 보더니 눈을 감았다.

7월 7일 아침, 형의 전화를 받으면 꺼지고 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받으면 꺼지기를 6번이나 계속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큰딸 정휘와 통화를 했더니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으나 의식이 가물거린다는 형에게 직접 물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목포에 달려갔더라면… 지금의 회한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나 또한 대상포진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6월 말경 왼쪽 갈비 부근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질겁할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담이 결리는 증상으로 오해하고 조용히 쉬면 나으려니 생각하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1주일쯤 지난 후 배의 왼쪽과 왼쪽 등판에 붉은 돌기가 나타날 때까지도 병명조차 알지 못했다.

7월 2일에야 병원을 찾았더니 남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대상포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형의 부름에 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핑계밖에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름을 넘길 수 없으리라고 했던 병원의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불과 1주일 후인 7월 13일, 아들 선경으로부터 형의 부음을 들었다. 지금도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승희를 보낸 후, 형수와 함께 민주투사가 되어 딸의 죽음을 승화시켰던 형이었다. 광주 전남은 물론 전국을 돌며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한 젊은 넋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묵묵히 뒷바라지를 도맡았던 형이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유머를 잃지 않은 자상한 아버지가 되었고, 후배들에게는 따뜻하게 배려하는 형이었다. 이제 그 형은 영원히 잠들고 서러우면서 빛나던 세월도 끝났다.

사실 나는 그동안 형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려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물론 지난 1월의 담낭 결석 수술 이후 다시 만나게 된 대상포진으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과 무기력증 때문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형의 부재가 넓고 깊게 느껴지고 혼란스러워 심지어 일상의 내 행위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등 감성의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찾아간 승희의 친구들에게 "오종렬 선생님과 선생님께 마음의 빚이 크다"라고 남겼다는 형의 말은 여러 차례 찍혔던 불통으로 끝난 전화의 기억과 함께 묵직한 아픔이 되어 오래도록 가슴을 눌렀다. 늘 내가 감사하고 미안했던 형인데…

49재는 사람의 영혼이 저승 좋은 곳에 안식하기를 기원하는 날이라고 한다. 내일은 형의 49재다. 나도 이제 형께서도 아프게 보냈던 딸을 만나 선한 영혼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 누리기를 빌어본다.

생소한 가을장마가 너무 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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