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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그녀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처음 들은 것은 아마도 제주도로 이주하기 위해 자주 드나들던 때였던 것 같다. 자세히 전말은 모른 채 대단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정도로만 여기고는 이내 잊고 말았다.

오늘 아침 한국연극협회 제주도지회가 창작연극 '홍윤애의 비가'를 비대면으로 공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잊고 있었던 그 사랑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주에 정착하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던 그녀, 홍윤애에 관한 관심이 갑자기 머릿속을 꽉 채웠다.

아침부터 홍윤애와 그녀의 연인 조정철과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무덤이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고, 조정철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해보니 집에서 불과 4.4㎞ 떨어진 곳이었다.

공의 생사는 나의 죽음에 달렸다
 
'洪義女之墓'(홍의녀지묘)라고 새긴 낡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무덤가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 홍윤애의 무덤 "洪義女之墓"(홍의녀지묘)라고 새긴 낡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무덤가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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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않고 차를 몰았다. 평소 자주 가는 주유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400여m 올라가니 바로 길가에 묘가 보였다. 주변에 인가는 보이지 않고 밭이 펼쳐져 있었다.

산담(묘지를 둘러싼 네모난 돌담)으로 둘러싸인 무덤은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봉분 앞에 세워진 오래된 비석에는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라는 글씨가 겨우 보였다. 희미하게 파인 비문은 세월이 흘렀음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산담 밖에는 '의녀 홍윤애지묘'라는 애월읍장의 글을 새긴 커다란 표지석이 설치돼 이 묘지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조정철이 남긴 추모시는 표지석 뒷면에 새겼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 지 몇 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 한문으로 지은 시를 번역
 
애월읍장이 세운 표지석이 놓여 있고, 주변엔 밭이 펼쳐져 있다. 표지석 뒤에 조정철의 추모시가 새겨졌다.
▲ 홍윤애 무덤 주위 풍경 애월읍장이 세운 표지석이 놓여 있고, 주변엔 밭이 펼쳐져 있다. 표지석 뒤에 조정철의 추모시가 새겨졌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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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야기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출셋길이 트인 것 같던 사대부 조정철(1751∼1831)이 1777년 정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되면서 시작된다. 무고를 당했다는 억울함과 절해고도에 유폐된 외로움,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땅에서 겨우 연명하며 살아야 하는 곤궁함 그리고 죄인을 감시하는 눈길.

27세의 나이에 기약 없이 고달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조정철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향리의 딸 홍윤애(?∼1781). 감시가 심한 중죄인의 적소에 남몰래 드나들며 조정철을 뒷바라지하는 비바리(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는 처녀) '홍랑(洪娘)'이 바로 그 천사였다. 연극에서는 빨래도 해주고 식사도 챙기다가 조정철에게 천자문을 배우기도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귀양살이 양반이 측은해 도와주려는 제주도 처녀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청춘남녀이기도 했다. 연민으로 시작한 윤애의 헌신적 도움은 '몰래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1781년 2월 조정철이 유배된 지 4년 만에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난다. 축복은커녕 그 존재를 숨겨야 했던 유배 죄인의 딸은, 홍랑의 언니에게 맡겨 애월읍의 한 절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딸이 태어난 다음 달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해왔다. 김시구는 남인 출신으로 노론인 조정철 집안과는 대대로 정적인 관계였다. 반대파의 씨를 말릴 생각으로 김시구는 조정철의 죄를 찾아내려 온갖 수단을 부렸다.

끝내 조정철의 죄를 찾아내지 못하자 김시구는 홍윤애를 붙잡아 가혹한 추궁을 해댔다. 조정철이 유배 죄인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 임금이나 조정 대신을 비방하지 않았느냐며 고문을 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단지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잔일을 거들어줬을 뿐이라며 김시구의 계략에 말려들기를 거부했다. 김시구는 뜻대로 되지 않자 유배인 거처에 출입했다는 죄를 물어 곤장 70대를 치며 홍윤애를 초주검에 이르게 했다. 마침내 홍윤애는 딸을 낳은 지 3개월 만인 윤오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 죽음으로 조정철의 목숨을 구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홍윤애가 묻혔던 지금의 제주시 전농로 주변 마을길이 홍랑길로 불린다.
▲ 홍랑길  홍윤애가 묻혔던 지금의 제주시 전농로 주변 마을길이 홍랑길로 불린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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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극적으로 역전했다. 김시구가 조정철이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장계를 올리자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결국 김시구의 거짓이 밝혀져 부임 4개월 만에 제주 목사에서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게 된다.

반면, 조정철은 음해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유배지가 정의현(지금의 성읍민속촌 지역)으로 바뀌고, 다시 추자도, 광양, 구례,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805년 귀양살이에서 풀리게 된다. 27살에 제주로 유배된 이래 29년간 귀양살이를 한 셈이다. 1811년에는 제주 목사 겸 전라도 방어사가 되어 극적으로 제주 땅을 밟는다.

환갑 나이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조정철은 홍윤애의 묘를 정비하고, 통곡하며 홍윤애를 기리는 묘갈명(墓碣銘, 무덤 앞 비석에 새기는 글)을 썼다.
 
신축년에 간사한 사람들이 나와 의녀를 죄를 꾸며 죽이려고 형틀에 묶어 치니 혈육이 낭자했다. 의녀는 '공의 생사는 나의 죽음에 달렸다'라 말하며 묻는 말에 불복하고 목매달아 순절했다.
 
홍윤애가 죽음으로 자신을 구했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앞에 소개한 추모시도 남겼다. 홍윤애가 공식적으로는 처녀로 죽어야 했기에 열녀비를 세울 수는 없었던 듯하다.

남성 중심의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를 통틀어 고위직의 사대부가 여인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운 예는 없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홍윤애 묘갈명과 추모시는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1997년 양주 조씨 종친회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에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조정철이 '의녀(義女)'라고 불러야 했던 홍윤애는 216년 만에 비로소 조정철과 부부로 인정받은 것이다.
 
홍윤애의 묘를 애월읍으로 이장하면서 표석을 놓았다. 벚꽃으로 유명한 제주시 전농로 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역본부 맞은편이다.
▲ 홍윤애의 무덤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 홍윤애의 묘를 애월읍으로 이장하면서 표석을 놓았다. 벚꽃으로 유명한 제주시 전농로 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역본부 맞은편이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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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대서사극

제주의 4월은 벚꽃으로 화려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벚꽃길인 전농로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 옛날 공동묘지였던 이곳에 묻혀 있던 홍윤애는 농업학교가 들어서게 되자 애월읍으로 옮겨졌다. 대신 묘지 터였음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이 놓였고 홍랑길이 생겼다. 천신만고 끝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뒤늦게 관운이 트인 조정철은 형조판서까지 지낸 뒤 81살에 죽어 수안보 박석고개에 묻혔다.

두 사람의 스토리는 한 편의 대서사극이라 할 만큼 다양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시대 치열한 당쟁과 권력투쟁, 억울한 유배, 절해고도에서 피어난 사랑과 권력자의 횡포와 정적 제거 음모, 최장기 유배생활 끝에 극적으로 유배지였던 제주로의 화려한 귀환 그리고 옛 연인을 그리며 남긴 애절한 추모시.
 
제주목사 김시구가 조정철과 홍윤애를 붙잡아 놓고 가혹하게 추궁하는 장면.
▲ 연극 "홍윤애의 悲歌(비가)" 한 장면 제주목사 김시구가 조정철과 홍윤애를 붙잡아 놓고 가혹하게 추궁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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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애의 묘소를 다녀와 저녁에 비대면 연극을 유튜브로 감상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또 처절했다. 어찌 보면 춘향전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춘향전은 꾸며낸 소설일 뿐이고, 이들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닌가. 게다가 극적인 요소는 춘향전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이 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최근 제주지역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기려지고 있다. 추모문화제, 연극, 문학제 등으로 제주 여인 홍랑, 아니 홍윤애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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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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