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금만 더 지켜주면 안 될까!"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 영하 10도 내외의 매서운 겨울이었다.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춥대. 다른 상황 없을 것 같으니 집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오라고 할까봐."

가만있으면 학다리 춤이라도 추듯 양다리가 덜덜덜 떨리는 날씨였다. 발은 얼음처럼 굳어서 계속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고, 장갑을 꼈어도 손끝이 아려왔다.

아침에 집을 나온 후 모두 그렇게 거리에서 날을 새고 있던 터여서 체력적으로도 버티기 힘든 지경. 조금이나마 추위를 피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곤 정부청사 바로 옆 작은 공원 지하도 공간뿐이었다.

우리는 그나마 맨몸이었지만 사진가들과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를 들쳐 메고 1박 2일 동안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만약 다시 들어온다면 해 뜨는 시각일 거야. 대부분 그러니까. 하지만 카메라들이 있으면 들어오기 힘들 거야. 미안하지만 잡혀가면 안 되는 사람들도 많아서 그래. 이왕 지켜준 것 아침까지만 있어주면 안 될까. 해 뜨고 출근 시간대 되면 못 칠 거야."
"알겠어. 얘기 해볼게."


그런 날들이 참 많았다. 2015년 1월 11일. 위에서 얘기한 날은 '정리해고 없는 세상! 쌍용차 정리해고자 복직을 위한 3박 4일간의 오체투지' 마지막 날이었다. 대법원에서 출발해 청와대까지 느리지만 한 명 한 명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분노를 밀고 서울 시내를 관통했다.

오체투지로는 도심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다는 경찰 벽 하나를 뚫고 간신히 전진하는 데 대여섯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1차 때는 경찰이 선두 방송차 유리를 깨고 운전하던 동지를 연행해 구속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경찰들과 거리에서 얽혀, 연행당하거나 다쳐 병원으로 후송된 동지들도 여럿이었다.

가장 첨예한 격돌은 늘 청와대 인근에서 벌어졌다. 그날도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는 데만 두어 시간이 걸렸고,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건너는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는 데 또 두어 시간이 걸렸다. 걸어서 이동한다면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선두 북소리가 울리면 화살촉처럼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방 어떤 도로로든 뛰어들어 미동도 않은 채 누웠다. 껌딱지처럼 아스팔트 위에 붙은 사람들을 떼어내 다시 인도로 올리는 경찰들과 길 막힌 차들의 경적 등으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연대단체 참가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요구하며 3시간 넘게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자 시민들이 이들의 몸을 걱정하며 모포를 덮어주고 있다. 2015.1.11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연대단체 참가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요구하며 3시간 넘게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자 시민들이 이들의 몸을 걱정하며 모포를 덮어주고 있다. 2015.1.11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정부서울청사 앞부터는 길목마다 수십 겹의 경찰병력이 막고 서 있어서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길을 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그렇게 예정에 없었던 날을 새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쌍용차, 유성, 콜트콜텍, 교육공무직 비정규직 동지들이 누웠다.

해산명령 3회에 이어 모두 현장 체포하겠다고 공포한 것도 벌써 몇 차례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근처 세월호 농성장에 있던 유가족분들이 깔개와 모포 등을 모두 가져와 길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을 덮어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누운 자리가 무덤처럼 볼록해져 인적 없는 도심에 공동묘지 하나가 세워졌다.

사실 우리만 있었다면 진작 연행했을 터였다. 경찰이 두려운 건 연행을 각오한 우리들의 결의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카메라'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부터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을 꾸려 그늘진 현장과 거리의 일들에 함께했던 사진가들과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지키고 있으니 경찰은 시기를 못 잡고 카메라들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결국 그날 경찰은 정부서울청사 앞 밤샘 농성장을 침탈할 수 없었다. 오히려 찬 바닥에 엎드려 있어야 했던 이들은 무덤 같던 모포 더미 속에서 한숨 잘 자고 일어난 표정이었고, 밤새워 그 곁을 언 발 동동거리며 뜬눈으로 지새운 카메라들은 사람 몰골이 아닌 아침이었다. 오전 11시 밤샘 투쟁 소식을 듣고 몰려든 연대자들과 함께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고 단 한 명의 연행자도 없이 3박 4일의 긴 투쟁을 마칠 수 있었다.

때로 노동자들이나 빈민들이 한강다리 위나 철탑이나 광고탑 또는 공장 굴뚝 위로 오르는 까닭도 그 카메라 한 대에 목이 메어서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억울과 비참을, 이 삶의 현장의 모순과 폭력을 제발 조명해 달라는 목숨 건 외침들이기 십상이었다.

다른 이들이 돕겠지 외면하지 마시고

"좀 도와주십시오! 만 원도 좋고 이만 원도 좋습니다. 당장 굶게 생겼습니다."

수중에 남은 돈 2700원. 며칠째 굶었다고 했다. 전화기도 끊겨 피시방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집회에 연대하러 갔다가 뒤풀이를 하며 카메라와 노트북, 외장하드, 노동강좌 촬영비로 받은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마지막 수중에 남은 3만 원으로 소주 20병을 사서 인천 연수동 무보증 반지하 월세방에서 뇌를 마비시켰다고 했다.

"다른 동지들이 돕겠지 하고 외면 마시고 꼭 좀 도와주십시오!"
"꼭 다시 일어나서 동지들 곁에서 당당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2011년 4월 9일 가까운 동지들에게 보낸 위 내용의 메일이 닉네임 '숲속홍길동'(이상현)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6월 25일 주변 주민 신고를 받고 간 경찰들이 문을 따고 들어가 극단적 선택을 한 지 한참 된 그를 발견했다. 방안에 뒹구는 빈 소주병들이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2020년 이상헌 동지 9주기 추도식 및 제8회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시상식 웹자보
 2020년 이상헌 동지 9주기 추도식 및 제8회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시상식 웹자보
ⓒ 주최측

관련사진보기

  
편하게 살 수도 있는 친구였다. 한때는 취업 희망 1순위의 공기업이었던 한전 삼성동 본사의 정직원이었다. 전력산업 민영화(사영화)에 반대해 싸웠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가 한전 투쟁 와중에 극단적 선택을 한 김시자 열사 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영상을 배운 건 이때였다.

내가 구로 지역에서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 일을 거들 때여서 자주 보게 되었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사무실에서 밤새워 함께 술을 기울이다 메이데이 집회를 함께 나가던 날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진짜 노동자'였다. 그것도 너무나 순진한.

그는 안으로는 어용노조와 싸우고 밖으로는 연대 활동을 다녔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첫 사회적 진출이었던 2003~2004년 380일간의 명동성당 점거 농성 때는 두 차례에 걸쳐 휴직을 하곤 명동성당을 함께 지키기도 했다. 그 후 아예 퇴직을 하곤 영상활동가로 숱한 투쟁의 현장, 분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실 그가 퇴직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답답함을 얘기하던 당시 회사를 다니면서 연대를 다니는 게 어떠냐고 조언도 했던 것 같다. 자기 현장을 지키는 일도 소중하고, 전업 활동가의 삶이란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은 경험한 탓이기도 했다.

대책 없이 순정하기만 하던 그는 약간의 퇴직금과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 등을 금세 활동비로 날려 버렸다. 그 후에는 겨울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단체 사무실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는 그렇게 나날이 피폐해져 갔지만 그가 생전에 남겨준 수백 건의 영상물은 늘 기운찼고 생생했다. 단 하나의 속보 영상이 간절한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고마운 동지였다. 특히 연대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장애인 운동과 이주노조 운동에 전념해 주었던 그에게 우리 모두가 진 빚도 있을 터다.

죽기 1년여 전이었던 2010년 10월엔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 함께 있었다. 새벽 침탈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받고 밤새 농성장 건너편 건물 어두운 2층 계단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함께 밤을 새우던 때가 기억난다. 그 전인 2009년에는 주로 용산 철거민 농성 현장에서 만났다. 나도 몇 번인가는 전 재산에 가까웠던 몇 만 원씩을 털어 부쳐주곤 했으니 나는 그래도 동지를 '외면하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이 바보야. 마석모란공원에 가서도 묘지 하나 못 갖고 거기서도 십년에 몇 만원하는 사글세 납골당 한 칸살이 하는 바보 새끼야. 그렇게 가니 좋니."

가끔 그를 생각하면 나도 소주를 한 스무 병 사서 뇌를 마비시켜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니는 어떻게 사는지 보자"

"마흔이 넘으면 다 혁명의 적이어서 뒈져 버려야 해요."
"허, 이 새끼는 어디에서 운동을 저렇게 교조적으로만 배웠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럼 나는 어떠한가' 늘 곰곰 생각해 보게 되는 부끄러운 말이었다. "니는 새끼야 어떻게 사는지 보자." 이렇게는 말 못 하고 "야, 사는 게 다 호락호락하지는 않더라. 삶은 때로 간교한 거라서 길게 생각하며 살아갈 필요도 있을 것 같아"라고 에둘러 말하곤 했었다. 그렇게 말하던 천석이었는데...

"형, 천석이가 죽었대요."

2009년 용산 철거민 학살 진상 규명 투쟁에 작은 힘이나마 함께한다고 용산 현장에 붙어 몇 개월째 살고 있을 때였다.

"뭐라고, 아니 뭐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죽기 얼마 전에도 용산 현장에 들러 뭐 도울 일 없을까요, 하고 갔던 영상활동가 김천석이었다. 그날 '요즈음은 신나는 일이 없네요'라던 그의 쓸쓸했던 말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집 나간 지 며칠 되던 날. 얼마 전 구로동맹파업동지회 선배가 물려준 중고차 안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채 구로공단 철로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유서 한 장도 없었다. 딱 마흔이었다.
 
마석모란공원 납골당 앞 고 김천석 영상활동가 추모 펼침막
 마석모란공원 납골당 앞 고 김천석 영상활동가 추모 펼침막
ⓒ 현카

관련사진보기

 
2008년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투쟁 당시에는 영상 활동가인데도 초기 기륭 공대위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학교 마치고는 구로공단으로 와서 청년회 활동 등을 하다 영상 활동가로 나선 친구였다.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 때는 정태춘 선배 등이 함께한 '들사람들'의 공식 기록 영상 활동가로 함께했다. 천석이도 마석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영상자료는 아직 채 정리해 주지도 못했다.

"뭐라도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현장을 지켜주던 카메라들이 그렇게 쓸쓸하게 쓰러져 가는 걸 겪으며 가까웠던 친구들이 나서보자 했다. 사실 민주노총이나 산별노조들이 나서주어야 할 일이었지만 늘 일이 많다는 이유로 정작 어떤 상층 활동가들보다 많은 시간과 공력을 쏟아 부으며 모든 투쟁 현장을 헌신적으로 지켜주는 영상미디어 활동가들에 대한 연대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김천석을 보내고 3년, 숲속홍길동을 보내고 2년이 되던 2013년,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아는 우리라도 시작하자 했던 게 오늘 얘기를 전하려 하는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하 현카) 운동이다. 기륭전자 등 비정규 노동자들과 가난한 동료 영상미디어활동가들이 모여 집행위원회를 꾸리고 한 달에 5천 원, 만 원씩을 내는 CMS 연대 회원들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1천만 원 내외의 작은 기금이었지만 1년에 한 번씩 마석모란공원 납골당 앞에 모여 천석이처럼, 숲속홍길동처럼 오늘도 기성 언론의 카메라들이 잘 비추지 않는 삶의 그늘진 곳과 지하층을 쫓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의 빛이 되어주고 있는 영상미디어 활동가들을 지원, 응원하는 기금을 전해온 게 벌써 올해로 10년째다.

나 역시 홍길동의 마지막 메일 내용처럼 "다른 동지들이 돕겠지 하고 외면"하던 무책임한 한 명이었다. 그러다 마침 근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이하 길동무) 일에 함께하며 조금은 함께해 나갈 계기가 마련되어 오는 9월 10일(금) 오후 4시에 현카와 연대협력을 위한 협약식과 기념상영회를 하게 되었다.

길동무를 열어주신 김판수 선생님도 과거 스무 살 시절엔 영상감독을 꿈꾸며 해외 유학까지 갔던 영화 학도였는데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동유럽유학생간첩단사건' 피해자가 되어 오랜 시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50여 년이 흘러 재심을 통해 무죄는 받았지만 그때 못다 한 꿈은 찾을 길이 없다.   그 꿈을 잇기 위해 소박하게 시작한 게 '길동무예술창작기금'이다. 이 기금은 무엇보다 '현카' 운동을 돕는 데 쓰이면 좋겠다는 뜻을 모았다.

천석이와 숲속홍길동에게,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모임'에게, 그간 10여 년 간 본인들도 정말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현카'를 지켜 온 넝쿨, 하샛별, 김수목, 장은경, 주현숙 다큐감독 등 수고해주신 분들에게 마음의 빚 조금을 갚는다는 마음. 더 많은 이들이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보태는 길동무들로 나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박한 자리에 대한 소식을 알려 본다.
 
 협약식 및 상영회 웹자보
  협약식 및 상영회 웹자보
ⓒ 길동무

관련사진보기

 
○ 연대후원 문의 : 010-8436-2738 / 070-4252-2012
○ 현카 : fieldcamera@mediact.org
○ 길동무 홈페이지 : gildongmu21.com

지난 '현카' 제작지원 및 응원 목록 

○ 2021년_아홉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은주>_김미애 • <양지뜸>_김상패 
[활동지원] • <Tiny Light(작은 빛) 프로젝트>_오로민경, 전솔비, 무밍 
[응원합니다] •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투쟁 외 투쟁 현장 유튜브 제작 활동_스튜디오 R(양동민) 

○ 2020년_여덟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보라보라>_김도준, 김미영, 김승화 •사진 프로젝트 <잊히지 않을 권리>_정택용 [활동지원] • <양말은 누가 빨아요?>_소람 • <퀴어 캔 댄스>_빼갈 • <어떤미래유산>_김은석 • <군산에서 부는 평화의 바람(잡지/음악/영상 프로젝트)> _군산지역연대미디어프로젝트 '난리법석' 

○ 2019년_일곱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장기자랑>_이소현 • <허공(완성작 제목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_김상패 • <라이프>_장민경 
[활동지원] • <나무의 말>_부성필(비자림로 시민모니터링단)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제주>_'미디어로 행동하라'팀 

○ 2018년_여섯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첨단전자살인산업과 나>_이병국(미디어 뻐꾹) • <민주노조 KEC,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완성작 제목 '깃발, 창공, 파티')>_장윤미 • <강정 해군기지 반대투쟁 사진집>_이우기 [활동지원] • <투쟁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 영상 연대작업>_이승훈 • <오류시장,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_최종호 

○ 2017년_다섯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독>_송윤혁 • <불편한 여행>_나경, 재연 • <화산도의 기억(가제)>_김경만 
[활동지원]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성주/김천>_'미디어로 행동하라'팀 •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 선전팀>_이경진(신청자) 

○ 2016년_네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내가 살던 그 곳(완성작 제목 '사수')>_김설해, 조은영, 김종민 •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만덕5지구>_미디토리 • <가현이들>_윤가현 • <깨어난 침묵>_박배일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충북>_'미디어로 행동하라'팀 

○ 2015년_세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삼평리 전투>_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미디어팀 • <마르지 않는 금광(완성작 제목 '플레이온')>_변규리 • <그녀의 청소(완성작 제목 '같이')>_이병기 

○ 2014년_두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연대의 감정(가제)>_넝쿨 • <한통 속 선거>_이진우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000>_'미디어로 행동하라'팀 • <세월호 참사의 이유를 묻다>_'세월호참사국민대책위원회 미디어'팀 

○ 2013년_첫 번째 제작지원 
[작품지원] • <대한문을 지켜라>_하샛별, 유명희, 크롬('대한문에서 만나'팀) • <니가 필요해>_김수목 • <밀양아리랑>_박배일

태그:#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길동무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