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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명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썼다는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 현판
 당대 명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썼다는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 현판
ⓒ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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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딜 간다고? 백련사랑 초당? 이이, 그라믄 우선 백련사부터 가씨요. 거기서 초당 가는 산길이 하나 있는디, 거긴 좀 가바르고 오르막길이라 평지로 가는 길을 물어 가요. 초당부터 들르믄 백련사까지 오르막길잉게 쌔가 빠지고, 이 날씨에. 날씨라도 엔간해야제."

택시기사님이 루트를 정해주신다. 그대로 가야지, 초행자가 무슨 토를 달겠는가.

백련사 정류장에 내렸다. 뙤약볕이 여전히 반겨주는 날씨.  차양모를 고쳐쓴다. 경사진 길, 일주문을 지나 산문으로 진입한다.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길 따라 슬슬 걸어간다. 배롱나무가 흐드러지는 입구에 닿았다. 크고 실하고 짙은 빛으로 짐작컨대 수 백 년 수령은 되는 듯했다. 나무가 해를 등지고 달군 땅을 감싸는 보시가 한창이었다.

종무소를 지나니 그간 다녔던 여느 절과 달리 대웅(보)전부터 마주한다. 일단 현판이 눈에 들었다. 굉장한 박력. 갈라진 나무와의 조화가 나를 사로잡았다. 현판을 쓴 사람은 당대 서예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글씨체의 원류가 조선에 전래됐고, 사대부 풍토에서 이리저리 시도되는 동국진체를 거쳐 자신만의 체로 체계화 한 사람이다. 해남 윤씨부터 시작돼온 문인화와 글씨 풍을 자신만의 집체로 삼았다.

내가 지나온 종무소 역시 기념할 만한 건축이다. '만경루(樓景萬, 좌로부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백련사 건축의 한 묘미로 자리 잡았다. 만경루 자리 아래로 돌계단 양 옆으로 펼쳐지고, 그 곁에 종무소를 지어 공간 활용의 효과성을 기했다.

돌계단을 하나, 둘 건너다 대웅보전 자리 배치와 사진을 찍을 화각을 점검한다. 계단 한 개를 오르면 내 전화기 기준, 딱 좋은 구도가 나온다.

화사한 색이 사방에 발하는 탱화와 맞배지붕과 다포양식으로 지탱한 오랜 세월의 무게, 더불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경판을 만들었던 조상들의 슬기를 생각한다.

요즘 개념으로 '건폐율'이라고 하던가. 넉넉하게 곁을 둔 가람배치(伽藍配置)가 여유로웠다. 때문인지 누굿한 마음으로 경내를 둘러보는 분들을 마주한다. 흰 물감을 붓에 묻혀 한 번 휘둘러 뿌린 듯한 하늘이 멀리 내다보였다. 날이 더울 뿐이지 궂은 날은 아니었다.

대웅보전과 만경루 현판을 썼다고 알려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는 "조선 정종대왕의 열째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10세손으로 1705년 8월 28일, 부친 각리 이진검(角里 李眞儉)과 모친 파평 윤씨 지상의 따님 사이의 5남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참고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59)

이광사의 삶과 예술을 내가 짚기엔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다만 하난 눈에 드는 건, 이름 가운데 '匡' 字. 바르다, 바로잡다, 구원구제하다, 라는 의미를 띤다. 보통 정권이나 기관장이 바뀌면 큰 개혁이란 의미의 '광정(匡正)'이라는 데에서 이 글자를 발견하는데, 내가 태어나고 이 나라에서 한 번도 그러한 기색이나 움직임을 본 적이 없어 글자의 규모와 실제를 가늠하기 어렵다.

'師' 자는 흔하나 남용되지 않는 글자로, 그의 이름을 짓던 무렵 당대 세가(勢家)였던 집안의 기대를 짐작하게 한다. '匡'이라는 글자에는 '앉은뱅이'라는 멸칭도 담겼는데, 앉아 세상 쪽에 눈을 덮고 눈을 아래 둔 뒤 글씨와 그림으로 사람들을 일깨워주려는 포부도 느껴진다. 물론 비약과 자의에 바탕한 해석이다. 그는 평생 사찰과 고택지를 돌며 현판을 쓰고 서예집을 내어 글자를 전수하는 한편 그림도 쉬지 않고 그리며 살아갔다고 전한다.
 
강진 백련사 천불전
 강진 백련사 천불전
ⓒ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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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역시 오래된 사찰로, 사의재에서 뒤를 얻어 맞은 듯한 다산이 인근 초당에 살면서 산길을 넘나들며 교류한 고승 혜장의 보이지 않는 흔적이 경내 곳곳에 묻어있다. 차(茶)에 밝았던 혜장과 주역 등 경전에 능했던 다산이 서로가 서로의 장점은 흡수하고 단점은 물리쳐 친교를 쌓았다는 사연은 아름다워 뒷날에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기 충분하게 느껴졌다.

여름이면 풀모기가 한창인 초당에서 성가신 소리를 쫓으며 글을 짓다 속이 헛헛하고 사람이 그리워 산길을 넘었던 모양이다. 그 길을 나도 밟고 돌아왔다.

그러니 이 남녘의 오래된 절집은 당대 글씨로 세상을 풍미했던 사람의 어깨 결림과 신앙과 배교 사이에서 혼돈을 거듭하며 취미이자 일상으로 글을 짓던 학인의 한숨, 이 두 사람을 마주 보며 속에 끓어넘치는 업화를 차로 달래주려던 고승의 알뜰함이 담겨 있는 것이지, 그밖에 목조의 연력이나 팔작지붕과 다포식 건물의 견고함, 탱화 색감의 농담같은 것들은 내 눈밖에 있었다.

이광사의 대웅보전과 만경루 현판을 파노라마 사진에 담는다. 

대웅보전의 규모에 놀라 둘러보고, 명부전에 들러 사후를 더듬더니 '천불전(千佛殿)'이라는 곳에 이른다. 짐작하던 그대로 삼존의 불상이 중앙에 모셔져있고, 뒤에 시주를 하거나 원을 위해 종무기금을 기탁한 분들의 이름을 하나씩 품은 천 개의 불상이 펼쳐져 있다. 

백련사 만경루에는 세 개의 큰 창이 나있다. 창밖으로 배롱나무 빛깔 짙었고 눈을 저 멀리에 두면 강진만이 펼쳐져있다. 왼편의 상록수림과 더불어 풍경배치가 황홀할 지경이었다. 큰 사고가 날까 창가에 매달리거나 기대는 일은 금하고, 산개미가 끓을 염려에 단 음료와 가공식품을 금하는 곳이다.

백련사에서 초당 가는 길에 접어든다. 사적비를 지나며 잘 다듬은 나무 지팡이 하나를 줍는다. 발다리 고단한 여행자에게 맞춤한 느낌이었다. 행여, 한 스님의 길벗과도 같은 녀석을 집어가지고 온 건 아닌지. 
 
백련사 만경루에 서서 내다본 강진만
 백련사 만경루에 서서 내다본 강진만
ⓒ 이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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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https://blog.naver.com/leehhwanhee/222474109410)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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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지망생으로 살았다. 가수지망생, PD지망생을 거쳐 취업지망생까지. 지망은 늘 지망으로 그쳤고 이루거나 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야기를 짓는 일을 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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