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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몇 달 전 이사를 얼마 앞두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내다 버리는 건 산더미인데 집안에서는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수선하기만 하고, 버릴 것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저 많은 걸 어떻게 껴안고 살았는지. 2년 전 이사 와서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 번 열어보지도 못한 짐 상자도 수두룩했다. 2년 동안 없어도 되었다면 앞으로도 없어도 되겠지. 아쉬움과 아까움이 복잡하게 얽힌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한때 좋아했던 철 지난 옷가지와 낡은 수첩과 일기장들을 버리기로 했다. 겨울옷이 한참 매달려 있던 녹슨 행거, 그 옆에 오랜 화장대, 프레임 없이 바닥에서 사용하던 매트리스, 10년 전에 중고로 구매한 냉장고, 그릉그릉 돌아가며 우리들의 더위를 식혀주던 구형 에어컨, 작아진 아이들 책상, 역시 중고로 얻어온, 이제는 고양이가 다 뜯어 놓은 소파. 중고지만 한때는 깨끗하고 좋은 물건을 싸게 구했다고 다 좋아하던 것들인데, 지금은 낡고 보기도 흉한 데다 제 기능도 못 한다. 버리는 게 당연하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든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 주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성인이 되어 본가에서 독립한 후,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물건을 버리고 잃었는지 모른다.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갓난 시절 사진이 담긴 하드디스크, 언니가 준 보라색 구찌 샌들, 즐겨 탔던 바구니가 달린 파랑 자전거, 사는 동안 의지가 되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릴케의 영한 번역 시집. 이제 기억이 점점 사라져서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저 많은 걸 어떻게 껴안고 살았는지.
 저 많은 걸 어떻게 껴안고 살았는지.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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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정이 급하여 10평도 되지 않는 집에 네 가족이 들어가 월세살이를 했다. 들어가지 않는 짐들을 지인의 가게 창고에 보관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가게가 문을 닫더니, 건물에 유치권 행사 현수막이 붙었다. 나중에 다시 그 건물을 찾았을 때 그곳은 폐쇄된 상태였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다 철거되고 말았다.

그 후, 건물 주인은 바뀌었고, 지인은 연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잃어버린 물건들이 밤마다 머릿속에 떠올라 몇 날 며칠,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득 밤공기가 서늘해졌을 때 좋아하던 스웨터가 보이지 않으면, 오랜만에 차려입은 날에 언니가 보내 준 구두가 보이지 않아 집을 나서지 못하거나, 삶의 온도가 몇도 떨어져 기운이 없던 그날, 감기약 같던 시집이 책장에 더는 없는 걸 알게 되어 난 순간순간 잃음을 앓았다.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 났잖아.'"

제대로 인사하고 보냈다면, 충분히 헤어짐에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좀 나았을까? 언젠가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에서 강박증 있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더는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창고를 대여해 보관하던 에피소드를 보고 너무 부러워 마음이 아린 적이 있다. 한 번씩 내가 잃어버리거나, 급히 버린 것들을 다 모아 놓고 아쉬움 없이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먼저 떠난 내 물건들이 머무는 그곳일 것이다.

곧 떠나올 나를 기다리며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 내 손때가 묻은 그것들. 다 쓰지 못한 12색 색연필과 사인펜, 마른 장미 꽃잎이 장식된 생일 카드, 중학교 졸업식에서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헤어진 친구가 전해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있어서 더 귀해진 물건들.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그럼에도 사람과의 이별보다 물건과 헤어지는 일이 더 아쉬운 건 진짜 '끝'이기 때문이다. 기능을 못 하면 쉽게 버려지고 그대로 잊힌다. 하지만 그 기능 뒤에는 나와 함께한 시간이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사기 전의 고민과 받아볼 때의 설렘이, 매일매일 서로가 예전 같지 않음을 확인하고 토닥이며 버티던 순간이.

8월엔 온라인으로 1일 1폐 모임에 참여했다. 하루에 하나씩 버리며 집과 내 안을 정리하고, 버린 것을 매일 인증하는 모임이다. 천천히 버릴 것을 찾으며 이번엔 좀 더 신중하자, 제대로 된 애도를 하자 마음을 먹었다.

하나하나 꺼내 재활용이 가능한 것과 폐기물 신고해야 할 것, 종량제 봉투로 들어갈 것을 분류하며 느려도, 제대로 인사한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내 오랜 친구, 나 또한 언젠가 너를 따라가겠지. 그래도 바라본다. 기능보다 마음이 오래 더 남기를. 18년을 함께한 전자레인지, 색 바랜 별자리 지구본, 이제 돌아가지 않는 하늘색 선풍기.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하고 외쳐 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트릴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함께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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