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북경특급'의 한 장면

영화 '007 북경특급'의 한 장면 ⓒ 이력지 감독

 
영화 <007 북경특급>(1995)을 본 지 오래돼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주성치 특유의 뻔뻔한 이미지만 파편적으로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원영의가 주성치를 암살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총을 쐈는데 총알이 반대로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어깨에 맞는다. 고통스러워하면서 제대로 겨누기 위해 총을 반대로 잡고 쐈더니 이번에는 총알이 앞으로 나와서 또 자기 어깨에 맞는다. 그 꼴을 보고 주성치가 천진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뒤로, 그다음에는 앞으로 발사되는 총이에요."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웃길 수 있는지 어이없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주성치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로맨틱한 장면이 있다. 주성치는 시종일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감미로운 노래를 열창하는데,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담배꽁초가 절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 장면의 포인트다. 담배꽁초를 입술에 붙여놓은 것이다.

갑자기 왜 1995년 영화 이야기냐고? 이 영화의 포스터가 지난 25일 한국 뉴스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홍콩 정부가 강화된 홍콩 국가보안법에 따라 영화 심의 관련 '전영(영화)검사조례'를 발표했는데, 이 개정안에 의해 상영이 금지될 영화 중 하나로 주성치 주연의 <007 북경특급>이 언급된 것이다. 

홍콩 당국은 24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영화를 상영 금지(허가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을 에드워드 야우 홍콩 상무장관에게 부여하는 개정안 계획을 밝혔다. 야우 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 개정안이 "국가 안보에 반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영화 검열 작업에 대한 법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 6월 홍콩보안법을 발표한 지 두 달여 만이다.

주성치의 <007 북경특급>이 금지 대상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중국의 부패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007 북경특급>이 중국의 부패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걸 확인하려면 이 영화를 봐야하는데, 이 조례가 통과되고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된다면 영화를 볼 방법이 없다.

<경향신문>의 25일 '홍콩 영화, 국가보안법으로 '검열의 길'에 들어서다' 기사에 따르면, 상영 허가가 취소된 영화의 경우, DVD도 배포 또는 판매할 수 없으며, 불법으로 상영하는 경우 징역 2~3년 또는 벌금 20만~100만 홍콩달러의 벌금에 처한다고 한다. 심지어 허가받지 않은 영화 상영을 단속하기 위해 영장 없이 어디든 수색할 수 있다. 그 영화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는 셈이다.
 
 주성치 주연의 영화 '007 북경특급' 포스터

주성치 주연의 영화 '007 북경특급' 포스터 ⓒ 이력지 감독


<007 북경특급>이 국가 안보를 실제로 위협하는지 그 여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국가 안보에서 '안보'란 안전 보장의 줄임말이다.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는 조치가 어떤 위협으로부터 누구의 안전을 보장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홍콩 명보는 "지난 6월 개정안은 단속 대상이 국가 안보에 위해한 영화였으나 이번 개정안에는 국가 안보에 불리한 영화로 문구가 바뀌었으며, 그에 따라 레드라인이 훨씬 넓어져 영화에 더 큰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마도 당국은 영화 <007 북경특급>이 중국의 부패를 다뤘기 때문에 안보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으리라.영화 제작과 상영의 권한을 국가 권력이 통제하는 것은 안전 보장보다는 폭력에 가깝다. 당국이 말하는 안보란 사실상 '영화 제작과 감상을 안전하게 누릴 자유'에 대한 침해의 다른 말이다.

이 위협으로부터 무사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홍콩 영화가 있을까? 주성치의 다른 영화들,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왕가위 감독과 두기봉 감독의 영화들이라고 해서 안전할 수 있을까? 국가 안보 위협의 여부를 가늠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다. <007 북경특급>이 금지 대상이 될 영화의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국이 말하는 '국가 안보에 반하는 행위'란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경우 안보법 위반의 근거는 만들어 붙이면 그만일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휴일>은 1960년 당시 한국사회를 어둡게 그렸다는 이유로 개봉하지 못했다. 엔딩 장면을 수정하면 검열을 통과시켜주겠다는 정부의 회유가 있었으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가 이를 거부하고 상영을 포기했으며, 그 결과 이 영화는 2005년에야 공개되었다. <휴일>이 당시 검열에 통과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된 것은 '암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다. 우리는 암울하고 퇴폐적이고 아름다운 홍콩 영화들을 많이 안다. 

홍콩의 비극이 남의 나라의 먼 불행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설령 <007 북경특급> 외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들이 이 검열로부터 살아남는다 해서 안도하거나 기뻐할 수 없다. 또는 내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가 상영 금지 조치되기 전에 미리 DVD나 블루레이를 소장해 둔 것을 다행으로 삼고 싶지도 않다.

영화 제작과 감상의 자유를 국가 권력의 심판에 맡겨야 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영화의 수명이 당국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 자체가 영화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홍콩 영화계가 처한 현실은 그 자체로 모욕적이다. 홍콩 영화는 세계 영화사의 일부이며 문화유산이다.

국적에 관계없이 영화인들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사태를 우리와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들이 사라지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지 않을 수 있도록, 홍콩과 홍콩 영화인들과 연대할 길을 찾았으면 한다. 
홍콩보안법 홍콩영화 007북경특급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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