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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굴된 유골은 두개골 2개와 두개골이 발견되지 않은 3구가 엉킨 형태로 정강이와 주변의 뼈들이었다.
▲ 유골 당시 발굴된 유골은 두개골 2개와 두개골이 발견되지 않은 3구가 엉킨 형태로 정강이와 주변의 뼈들이었다.
ⓒ 박종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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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여'자도 꺼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하늘의 벌을 받은 것처럼 여수와 순천에서는 '여순반란사건'이라는 오명을 덧입고 사건 발발 이후 50년의 세월 동안 강요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국민을 '반공 국민'으로 만들기를 위해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을 사용했던 당시 군경은 사건 가담자 즉결처분장에서 시민들을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으로 죽이거나 곧바로 총살했습니다.

또, 법제적 폭력도 가했습니다. 위헌적인 계엄령 발포와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공포‧시행으로 피아의 구별이라는 군사 작전의 발상을 여순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이에 더해 연좌제를 통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을 수십 년간 옭아맸습니다.

여순사건 이후 물리적, 법적 폭력이 광범하게 사용되면서,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 지역민들은 사건에 대해 무서운 침묵을 강요당했고 국가로부터 '포섭'보다는 '배제'를 당했습니다.
 
발굴된 위치가 일반적으로 물 빠짐이 좋은 양지바른 곳이 아닌 음지 계곡이었으며 사건 당시 여러 주민들이 목격한 장소였습니다.
▲ 현장 발굴된 위치가 일반적으로 물 빠짐이 좋은 양지바른 곳이 아닌 음지 계곡이었으며 사건 당시 여러 주민들이 목격한 장소였습니다.
ⓒ 박종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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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의 시민 학살 사건'에서 '국군의 시민 학살 사건'으로 성격 바꿔

여수시민을 비롯한 전남 동부 지역민들은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도 이어졌습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유숙계' 제도를 통해 지역 사회 감시체제를 만들었고 사건 발생 직후 다양한 영역의 문인, 언론인, 종교인들은 현지를 방문해 '빨갱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을 창출해 냈습니다.

이렇듯 사회 전반적으로 무섭고도 두려운 '여순사건'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세상에 꺼내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역의 시민사회연구소인 사단법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하 연구소)입니다. 그들은 여순사건 발발 50주년이던 1998년 10월 12일, 호명마을 '돌종지'라는 곳에서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피해자로 추정되는 암매장 유골을 발굴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땅속에 묻힌 여순사건의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연구소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발굴을 통해 '여순사건'은 '여수 14연대 군인이 일으킨 반란으로 남로당 소속 군인들과 결탁한 지방 좌익세력들이 여수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에서, 사건 발발 후 '국군이 초토화 작전이라는 미명아래 진압된 여수에서 비 무장한 민간인들을 다수 학살한 사건'으로 성격을 바꿔 버립니다.  

연구소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 발굴을 통해 충격적인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Ⅰ(여수지역 피해실태)' 발간과 1998년 10월 19일 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보고서 발표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후, 여순사건은 수십 년간 치밀한 국가폭력의 공포 때문에 드러내지 못했던 진실을 역사의 현장 위에 조금씩 펼쳐내기 시작합니다.

1998년 10월 12일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전국 최초로 직접 발굴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부소장(당시 발굴단장)을 만나 당시 발굴 상황과 의미를 물었습니다. 다음은 지난 23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무실에서 박종길 부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연구소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 발굴을 통해 충격적인 반전을 만들어 낸 뒤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Ⅰ(여수지역 피해실태)’ 발간과 1998년 10월 19일 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보고서 발표 행사를 개최한다.
▲ 보고서 연구소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 발굴을 통해 충격적인 반전을 만들어 낸 뒤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Ⅰ(여수지역 피해실태)’ 발간과 1998년 10월 19일 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보고서 발표 행사를 개최한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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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세대 쉬쉬하며 말하던 이야기 궁금증이 출발점

- 사건 발발 50년 만에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최초로 발굴하셨는데 발굴 위치를 특정하기까지 과정을 설명 부탁드립니다.
"1995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창립되면서 '여순사건 재조명은 여수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는 회원들 간의 여러 차례 논의가 진행 되었습니다. 그 후 당시 30대 젊은 회원들 중심으로 여순사건 스터디 그룹이 만들어 졌고, 이 모임에서 여순사건과 관련된 소설이나 서적들을 탐독하고 토론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1996년도 여수지역 답사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만나게 되었던 저는 1997년도부터 여순사건 모임에 참여 했습니다. 저는 여사연 회원 가입 이전에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고향인 화양면 지역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 명단을 틈틈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 10여 명의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가 있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님 세대가 모이면 쉬쉬하며 말하곤 했던 이야기가 궁금해서 당시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 마을을 알고 나니 옆 마을도 알고 싶고 그렇게 30여 개의 마을을 틈틈이 돌아다니며 대략적인 피해자 86명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1998년도가 되면서 화양면 지역 피해자 자료를 여사연 여순사건분과 모임에 공개했는데 이를 여수지역 전체로 확대해 조사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때부터 여사연이 본격적인 여순사건 피해자 실태조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수지역 전체 조사는 여러 회원이 지역을 분담하여 이루어졌고 884명의 희생자가 조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피해자의 윤곽뿐 아니라 수십 군데의 학살지도 알려졌는데 학살 후 암매장을 했던 곳도 호명동뿐 아니라 국동, 둔덕동 큰골, 만흥동 등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첫 발굴을 호명동으로 택한 이유는 실태조사를 하면서 둔덕동 용수마을 주민들을 통해 사건발발 후 몇 일 동안 한밤 중에 호명동고개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차량으로 사람들을 실어가는 장면을 본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90년대 초반 남해화학으로 가는 큰 도로를 개설하면서 여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던 사례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넘어 다녔던 자내리와 호명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고개를 넘어서 여수장을 매일 넘나들었던 호명동 음지마을의 이순실씨를 통해서 더 구체적인 장소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지에 계곡지역이라 암매장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장소를 특정하고 여순사건50주년 행사를 계획하면서 모아진 성금으로 발굴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한밤 중에 호명동고개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차량으로 사람들을 실어가는 장면을 본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박종길 부소장 한밤 중에 호명동고개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차량으로 사람들을 실어가는 장면을 본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박종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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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호명동 '돌종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 발굴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호명동 암매장지 발굴을 통해 드러난 유골은 그동안 암매장이나 불법적인 학살이 없었다는 사람들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는 것과 여수사건 희생자의 진상규명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50주년 행사를 개최하던 1998년에도 소위 안보호국단체라는 보수단체의 방해로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행사를 치루지 못할 처지까지 놓였던 상황이었습니다. 암매장 유골발굴로 학살의 진실을 일부나마 알게 되었던 시민들의 여론이 보수단체의 입과 저지하려는 행동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수 호명동 암매장지 유골발굴은 여사연과 여수시민이 이루어 낸 여순사건 진상규명 활동의 시발점이자 촉진제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 발굴한 유해가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당시 발굴된 유골은 두개골 2개와 두개골이 발견되지 않은 3구가 엉킨 형태로 정강이와 주변의 뼈들이었습니다. 먼저 발굴된 위치가 일반적으로 물 빠짐이 좋은 양지바른 곳이 아닌 음지 계곡이었으며 사건 당시 여러 주민들이 목격한 장소였습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이곳에서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2차 발굴 후 호명동 유골과 함께 여순공원묘지에 희생자 묘지 만들었다.
▲ 여순사건 희생자의 묘 2차 발굴 후 호명동 유골과 함께 여순공원묘지에 희생자 묘지 만들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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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여러 학살지의 실태 정확히 규명해야

- 유해 발굴 1년 뒤 또 다른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를 발굴하셨는데 그 과정과 발굴한 유해를 어떤 과정을 거쳐 모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사연은 50주년 1년 뒤인 1999년 10월에 또 한번의 유골발굴을 진행했습니다. 두 번째 발굴이 진행된 장소는 봉계동 '큰골'로 골짜기 이름 때문에 대곡이라 부르던 마을 부근이었습니다. 이곳도 첫 발굴지인 둔덕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지금 시티골프장과 여천장례식장이 있는 지역입니다.

지금은 주변이 매립되어 계곡의 형태가 보이지 않지만 큰 골짜기라 부를 만큼 계곡이 큰 지역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고 특히 제 고향마을 이장 오씨는 총살되었지만 죽지 않고 부상만 입고 살아나 대곡마을 주민이 보름간 벽장에 숨겨서 살려냈던 사례가 있던 장소였습니다.

이곳도 계곡이라 발견된 유골은 훼손 상태가 심했는데, 계곡을 뒤져서 2구의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봉분도 없었고 물이 흐르는 지역이라 발견 된 게 기적이었습니다. 당시 2차 발굴 후에는 처음 발굴되었던 호명동지역 유골과 함께 위령제를 지내고 여순공원묘지에 여순사건 희생자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유골 안장에는 이전 발굴되었던 호명동 유골을 1년간 보존해주었던 석천사의 진옥스님과 함께 위령제에 무료로 참여해 성대한 행사가 되도록 도와주신 여수무속인 협회등 여러 단체와 개인의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여순사건이 특정 단체만이 아닌 여수 지역민이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여순사건 진상규명 활동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여러 학살지의 실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기록하는 작업 등 이 모든 일은 정부 주도하에 국가가 진행해야 할 몫이다.
▲ 묵념 그동안 알려진 여러 학살지의 실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기록하는 작업 등 이 모든 일은 정부 주도하에 국가가 진행해야 할 몫이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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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공포 됐습니다. 여순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할 텐데,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여순사건특별법은 너무 늦게 제정‧공포 됐습니다. 직접 피해를 보았던 이해 당사자들은 거의 돌아가셔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 활동도 증언자가 없어 미흡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최선을 다하는 진상규명활동을 통해 역사적 진실만이라도 제대로 규명했으면 합니다.

피해자 유해 발굴지 대부분은 개발이나 관련자의 사망으로 발굴이 어려운 여건입니다. 여수의 경우 만성리 형제묘는 발굴을 통해 혼백을 위로하고 피해규모를 확인하는 진상규명 활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형제묘 이외에도 애기섬 학살지의 진상조사와 그동안 알려진 여러 학살지의 실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기록하는 작업 등 이 모든 일은 정부 주도하에 국가가 진행해야 할 몫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부분에서 저희들이 해야 할 몫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역사적 진실규명 활동에 동참하겠습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특별법이 제정‧공포됐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사방법, 기간, 규모 등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실행 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보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앞으로도 특별법을 통해 여순사건이 제대로 진실이 규명되는 과정을 지켜보겠습니다.

연구소는 2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간의 영역에서 꾸준하게 여순사건 진실규명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앞으로도 진실규명 활동과 함께 여순사건이 역사에 바르게 기록되고 피해자들이 위로될 수 있도록 저희의 역할이 있으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태그:#여순사건, #여순사건특별법, #여수호명동, #민간인집단학살, #여수지역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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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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