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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활동가들은 인권의 원칙에 따라 정부와 기업에 쓴소리를 멈추지 않고 해왔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프면 쉬고 소진되면 재충전을 하듯, 인권활동가들도 적절히 쉬고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권활동가가 건강해야 우리 사회 인권의 자리가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권활동가 추석선물 나눔', '인권활동가 지원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인권재단 사람이 인권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글과 활동가 기고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아델(정용림) 활동가는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상담·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복지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아델(정용림) 활동가는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상담·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복지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 정용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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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떠난 것은 (…)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만이 아니었다. 만나면 인사 정도 나누던 이들, 친구의 친구들, 이름만 겨우 알던 이들을 포함한 수없이 많은 이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내 세계의 중심에 있던 이들뿐 아니라 내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까지 모조리 잃은 것이다. - <애도와 투쟁> 269쪽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재난과 함께 모두에게 잔인한 2년이 흘러가고 있지만, 최근 계절들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게 더 가혹했다.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몇 가지 통계만 살펴보아도 성소수자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라 부고'라는 자조적 말이 현실로 다가온다.

지난 1년간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응답은 성인 성소수자(LGB)가 비성소수자 인구보다 8.95배 높았다(주석1). 성인 트랜스젠더 중에서는 53.9%가 지난 1년 간 자살 생각을, 15.1%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응답했다(주석2). 18세 이하 청소년 성소수자 중에서는 45.7%가 자살 시도를, 53.3%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다고 보고했다(주석3).

이처럼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자살 위기의 심각성은 누차 접해왔지만, 예상치 못한 상실과 그에 따라오는 감정들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소식을 접하고 하루 이틀은 이렇게 지나간다. 각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눈이 퉁퉁 부어 만난다.

이제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서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장에 간다. 한눈에 보아도 성소수자임을 알 수 있는 이들이 나누어 서 있다. 왠지 눈에 띄는 염색이나 옷차림도 있지만, 젊은 나이와 어쩐지 쭈뼛쭈뼛한 태도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어떤 이는 자기 또래의 장례식에 처음으로 와봤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망인을 TV나 인터넷 건너로만 만나보았지만, 부고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발이 향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있는 공간은 우리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부모보다 이른 자식의 죽음과 자살은 충분히 애도할 만한 것이 못 되기에 발인까지의 시간은 급박하고, 망인이 관계를 단절했던 가족들의 목소리는 차갑다. 영정사진 속 그 이는 가장 그 이다운 모습이 아니다. 관은 남자들만 들어야 한다. 납골함에 새겨진 숫자는 주변 그 어떤 함보다도 어리다. 그렇게 우리는 황망하게 당신을 떠나보낸다. 

<애도와 투쟁>의 저자 더글러스 크림프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동성애자들(성소수자로 넓혀 읽어도 무리가 없다)이 성소수자 혐오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함께 '나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머무른다고 이야기한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으로 연결된 이들은, 그 이가 삶의 국면국면에서 부딪히고 싸워왔을 시간들을 마음 깊이 이해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일지라도 당신의 죽음은 나에게도 깊은 슬픔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생존한 유족. 상실 이전의 나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 인권활동가(주석4)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 정용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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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위기를 사는 활동가들에게는 울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자신이 감염인이면서도, 동시에 활동가여야 했고, 정치인이어야 했고, 간호사여야 했고, 연구자여야 했다. (…) 아침에는 부고 소식을 듣고, 점심에는 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추모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 가만히 있으면 또 다른 친구들이 세상을 떠난다. 싸워야 했고, 움직여야 했다. - <애도와 투쟁>, 옮긴이 해설, 433~434쪽

나는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이하 띵동)의 활동가이다. 띵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총 여섯 명의 상근활동가가 일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가정에서 성 정체성을 이유로 경험하는 학대와 폭력, 학교에서 겪는 혐오발언과 괴롭힘, 공적 자원이 취약하다 못해 오히려 이들을 몰아세우는 현실을 마주한다. 내담자의 마음을 돌보고 함께 방법을 찾고자 하지만, 으레 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보다는 그 이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해야 하는 문제다. 활동가 내면에 슬픔과 분노, 무력감이나 좌절감 같은 감정들이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올해 계속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 머물고 있는 상실의 고통. 여기에서 내가 놓친 건 또 한 명의 성/소수자인 활동가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이었다. 식장에서 돌아오고 나면 때로는 성명서 작성, 기자회견, 자살 위기 긴급 상담이 숨 가쁘게 잇따른다.

이런 바쁜 '일상'으로 돌아온 뒤 나는 내 안에, 우리 안에 해소되지 못한 무엇들이 고여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걸 들여다보는 건 그 자체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무언가를 하나씩 안고 있을 것 같기에 거기에 나의 감정까지 얹고 싶지는 않았다.

"인권활동가라는 이름의 무게만큼 그 몫을 자신이 하고 있는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다"(주석5)는 마음도 하나의 장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이대로 괜찮나"?(주석6) 싶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비온뒤무지개재단,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그리고 인권재단 사람 등에서 활동가의 자기보호와 일상 회복을 위한 지원 사업들을 진행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감정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을 때 필요한 것이 전문가의 도움이다.

그러나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상담·치료에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부득이하게 따라온다. 인권활동 단체 중 43.9%, 인권활동가 개인 중 30.4%가 최저임금 미만의 활동비를 받고 있는 현실(주석7), 주말과 야간에도 예상치 못한 업무가 생길 수 있는 이들에게 자기 돌봄은 그 자체로 적잖은 무게로 느껴질 수 있다. 활동가를 지원하는 기관들은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서 '그렇기에 당신에게는 더더욱 마음돌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우리 자연사하자(주석8)
 
인권재단사람은 2020년부터 ‘인권활동가 자기돌봄 프로젝트’ 중 하나로 ‘마음건강검진’을 지원하고 있다.
 인권재단사람은 2020년부터 ‘인권활동가 자기돌봄 프로젝트’ 중 하나로 ‘마음건강검진’을 지원하고 있다.
ⓒ 정용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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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해 인권재단 사람에서 활동가 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마음건강검진 지원 사업에 참여하였다. 사실 현재 갖고 있는 이슈를 털어놓기 위해서는 정체성과 직장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이에게, 특히 일상의 에너지와 마음의 힘이 소진된 상황에서는 '프렌들리'한 상담기관을 찾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권재단 사람을 통해 연결된 곳에는 애초에 그런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음을 살피는 작업은 심리검사와 해석상담으로 이루어졌다. 상담을 가는 날은 정작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잠깐 스쳤지만, 일단 상담실을 나오자 내게 이 시간이 절실했다는 걸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에 남은 외상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누군가와 함께 연고를 바르는 일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중요한 첫 발짝이었다.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재난과 더불어 힘 나는 소식보다는 슬프고 화나는 일이 많은 요즘, 활동을 하다 보면 스스로의 마음과 '거리두기'를 하기 쉽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삶부터가 지속 가능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인권운동이 지속되기 위해 갖춰져야 할 조건으로서 36.4%가 '활동을 통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34.4%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동료관계'를 꼽았다(주석9).

이때의 '동료'를 나는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피해자 곁에 서는(혹은 그 자신이 생존자인) 인권활동가를 애정하고 지지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넓게 해석해본다. 자신을 돌보고, 서로의 안부를 묻자. 그렇게 애도와 투쟁을 이어나가자.


[주석]
1) 김승섭 외, 2017, <레인보우커넥션프로젝트 I -한국 성인 동성애자, 양성애자 건강 불평등>.
2) 김승섭 외, 2017, <한국 성인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3) 나영정 외, 2014,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4) 인권운동 기획편집위원회 편집부, <인권운동> 창간호, 인권저널, 2018를 인용한 인권재단사람·인권운동더하기, 2019,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18쪽에서 재인용.
5)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123쪽.
6)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121쪽, 사례20의 인터뷰 중에서.
7)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67쪽
8) 미미시스터즈의 2018년 곡, '우리, 자연사하자' 가사 중에서.
9)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100쪽.

덧붙이는 글 | 이 글에는 애도와 상실의 마음에 대해 띵동의 동료들이 나누어준 이야기들이 조각조각 들어가 있습니다. 이 글은 인권재단 사람 홈페이지(https://hrfund.or.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인권활동가, #마음돌봄, #아델,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_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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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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