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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다른 시공간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문을 지나야 한다. 이렇듯 문은 다른 시공간을 잇는 통로이자 다름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문을 세워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는, 이전에 누리던 가치관, 세계관을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새롭게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이자 선언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커다란 이상이나, 전쟁 승리 같은 거대 담론을 담아내는 상징으로서 문은 더욱 그러하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한 영은문 주초 2개가 독립문 남측에 자리한다. 오래된 중국으로 부터 예속을 벗어나자는 상징인가?
▲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청나라 사신을 맞이한 영은문 주초 2개가 독립문 남측에 자리한다. 오래된 중국으로 부터 예속을 벗어나자는 상징인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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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문을 가지고 있다. '독립문'이다. 문이 내세운 독립이라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이면에는 욕망 그득한 급진의 어설픔이 짙게 배어있다. 엉거주춤하다. 갑신정변 연장선상에 서 있으면서 그 조급한 미몽(迷夢)에 갇힌 외침만 북쪽으로 열린 홍예에 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

당시 '독립'은 어떤 의미였을까? 누구로부터 독립이며, 단순히 예속과 의존을 벗어난 상태만을 의미했을까? 오히려 '자주'가 시대 상황이나 당시 처한 여건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피동적 어휘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한계가, 엉거주춤한 저 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 뒤에 서 있는 서재필 동상.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다.
▲ 서재필 동상 독립문 뒤에 서 있는 서재필 동상.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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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서재필,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 계약기간 10년의 중추원 고문자격으로 1895년 12월 귀국한다.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한 지 11년 만이다. 가장 우선시되는 현안이 언로 확보라고 판단한 서재필이 신문 창간을 서두른다.

김홍집 내각이 신문발행자금 지원을 약속하지만 상황은 비우호적이다. 일본의 방해와 암살 위협도 만만치 않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한다. 그때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1896년 4월 7일 첫 신문이 발행되었다. 첫 신문은 개신교에 속한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고, 순 한글 3면, 영어 1면 총 4면이었다.
▲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첫 신문이 발행되었다. 첫 신문은 개신교에 속한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고, 순 한글 3면, 영어 1면 총 4면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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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내각이 4400원을 지원하여 실질적 국정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된다. 첫 신문이 1896년 4월 7일 '삼문출판사'를 통해 발행된다. 순 한글로 된 신문은 구독료 부담도 적어, 각계각층의 호응이 무척 뜨거웠다.

신문 창간 배경에 권력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나라에 큰 사건이 터져도 전파가 어렵고, 열강의 내정간섭에 여론 형성 또한 어렵다. 일본신문 <한성신보>에 대항해야 하고, 서재필과 약속은 곧 미국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가로로 쓴 제호(題號)의 혁신적 시도와 띄어쓰기가 시작된다. 보급에도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나선다. 학부(學部)는 각 학교 생도들에게, 내부(內部)는 각 지방관청에 신문 구독을 지시한다. 발행허가도 내주어 우송(郵送) 편의도 배려한다. 또한 기자의 취재를 위해 자유로운 관청 출입도 보장해 준다.

독립협회와 서재필
  
모화관을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개수 작업을 거쳐 독립관으로 삼았다. 현판을 왕세자가 내린다.
▲ 독립관(1910년 경) 모화관을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개수 작업을 거쳐 독립관으로 삼았다. 현판을 왕세자가 내린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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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신문을 발판으로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협회에는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전·현직 고위관료가 다수 포진한다. 또한 모화관을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협회는 창립 상징으로 독립문 건립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독립은 여러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농후한 한계를 드러낸다. 명백하게 청일전쟁 전후처리 시모노세키조약에 근거한 '청나라로부터 독립'이다. 이는 곧 일본으로 예속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람 차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 유공자'라 칭송한 독립신문 기사(1898년 8월 20일자)가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들이 말하는 독립을 여실히 드러낸 논조로 아연 실색케 하는 짧은 글이다. 협회 간부 3인이 용산까지 마중 나가 이토를 영접(8월 25일자)하고, 그가 경성학당에서 행한 연설을 싣기(8월 30일자)도 한다.

물론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1896년 6월 20일자)을 통해 독립문의 상징이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를 비롯하여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서재필은 비판점이 있는 대상이다. 갑신정변 때 자신으로 인해 죽은 부모 묘소는 물론 일가친척의 만남 요구까지 거절한다. 그의 정체성은 '미국인'이었다. 서재필은 친러 수구파와의 대립으로 중도에 추방되는데, 누군가 이를 만류하자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해 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 조선은 단지 '귀국'일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좀 가혹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2만 8800원을 받아낸다. '중추원 고문'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계약한 기간이 10년이다. 잔여 기간 7년 10개월 급료 2만 8000원과 여비 800원을 요구한다. 뒤에 미국이 있다.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같은 서재필의 행보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위협을 맹렬히 성토했다. 때문에 두 나라는 공히 서재필을 제거 대상으로 여긴다. 그가 겪은 이러한 생명 위협에 미국 국적이 일종의 '방패'가 되어줬다는 주장이다. 

또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가족들 묘소를 찾기가 괴로웠을 수도 있고, 이미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 교리에 충실한 입장에서 유교적 사고와 행동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 더불어 미국식 '계약'에 충실한 사고방식은 당연하게 중추원 고문이라는 잔여 계약의 이행을 요구했을 개연성 또한 존재한다. 이렇듯 대립하는 양가성(兩價性)이 서재필의 본 모습이다.

성금모금운동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자 학생들이 협성회를 조직, 이 회를 중심으로 독립과 민권, 개혁을 위한 토론회가 활발해진다. 이는 독립협회로 확산되어 나중에 만민공동회로 이어진다.

입지가 넓어진 서재필은 신문을 통해 조선이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성은 1896년 7월 내정개혁 단행 의지로 표출되기도 한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왕이 아관에 있어 독립 명분이 미약한데다, 친러 수구파들이 환궁을 주장하며 전제정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배후에는 절대로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고종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변이 허름한 초가와 기와집 몇 뿐이다. 우측으로 인왕산이 보이고, 좌측으로 좁다란 무악재가 멀기만 하다. 아치 위 '독립문' 석판과 채색 된 것으로 보이는 좌우 태극기가 또렸하다.
▲ 1911년 경 독립문 주변이 허름한 초가와 기와집 몇 뿐이다. 우측으로 인왕산이 보이고, 좌측으로 좁다란 무악재가 멀기만 하다. 아치 위 "독립문" 석판과 채색 된 것으로 보이는 좌우 태극기가 또렸하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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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개화파들이 독립을 표방할 소재를 찾아낸다. 바로 '독립문과 독립공원, 독립관' 건립이다. 고종이 이를 승인한다. 하지만 이는 여러 정치집단의 이해관계와 복선이 깔려있는 타협의 산물일 뿐이었다.

외세에 의존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려는 고종, 정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정동파, 대중의식을 고양시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독립협회 등 '독립'에 제각기 입장과 해석이 다른 집단들이 하나의 우산 아래 모여 빚어낸 어정쩡한 결과물이었다.

신문과 협회는 목표액 2만 원으로 성금모금을 시작한다. 왕세자가 1000원을 보내자, 각계각층이 호응한다. 관료들과 학생들, 하급군관들이 참여한다. 그러자 백성들 성금이 줄을 이었다. 친러 수구파는 물론 천인 취급받던 기생들도 모금에 참여한다. 독립협회 발기인은 이완용 100원 등 도합 510원을 모은다. 1896년 말까지 4700여 원이 모인다.

독립관과 독립문 정초식
 
옛 모화관 자리에서 밀려나 수백미터 북측에 다시 지어졌다. 지하는 전시장으로, 지상 한옥은 독립유공자 추모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 독립관 옛 모화관 자리에서 밀려나 수백미터 북측에 다시 지어졌다. 지하는 전시장으로, 지상 한옥은 독립유공자 추모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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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터에서 1896년 11월 21일 호기로운 정초식이 열린다. 수천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완용은 미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장황한 연설을 한다. 왕세자가 '독립관' 한글 편액을 하사하고 협회는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사용한다. 편액은 1897년 5월 독립관 개수 작업 완료 후 내건다.

1897년 2월 왕이 경운궁으로 이어한다. 왕은 권력을 지켜내려 전제정치를 지지하는 수구파에게 힘을 싣는다. 러시아 영향력과 내정간섭도 여전하다. 군권은 물론 관료임면과 재정까지 장악하고 있다. 복잡하게 꼬인 정세에서, 신문과 협회는 강력한 반러시아 정책을 표방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 신문과 협회가 친미 성향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독교 정신과 시민참정권을 주장하나, 조선에 대한 미국 이권과 자신들의 정치권력 획득에 목적이 있었음도 배제하기 어렵다. 왕이 환궁하자 성금모금이 지지부진해진다. 왕은 결국 그해 10월 전제적 왕정복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독립문

협회는 독립공원을 3구역으로 나누어 대규모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금액으론 독립문 완공도 장담할 수준이 아니다. 신문은 연일 모금참여를 읍소할 지경이다.
 
커다란 홍예기단석 위에 성벽쌓기 기법으로 화강석을 쌓아 올렸다. 아치 양측에 돌기둥을 두어 멋을 부리려 애쓴 모습이 보인다.
▲ 독립문 커다란 홍예기단석 위에 성벽쌓기 기법으로 화강석을 쌓아 올렸다. 아치 양측에 돌기둥을 두어 멋을 부리려 애쓴 모습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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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재정에도 독립문 건립은 이어진다.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고 공사 담당은 심의석(沈宜錫), 시공엔 중국인 노무자들이 참여한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두께 6.25m다. 정초식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 가까스로 완공된다.

서재필 의도로 파리 개선문을 본 딴 설계라 하나, 비례나 미적 감각 등 건축 수준은 한참 뒤 떨어진다. 뛰어난 건축가인 사바틴의 설계로 읽히지 않는다. 설계에 서재필의 아집이 끼어들고, 열악한 재정 여건이 만들다 그만둔 형상으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석재 축조 기법도 엉성한 성벽 쌓기와 유사하다.
 
홍예 천장을 붉은 벽돌로 마감한 모습이 보인다. 하부 작은 문이 위로 오르는 계산실이다. '독립문' 석판과 좌우 태극기 문양이 보인다.
▲ 독립문 세부 홍예 천장을 붉은 벽돌로 마감한 모습이 보인다. 하부 작은 문이 위로 오르는 계산실이다. "독립문" 석판과 좌우 태극기 문양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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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기단석 위에 화강석을 쌓아 올렸다. 홍예 양측에 돌기둥을 세워 멋을 부리고 천장은 붉은 벽돌 마감이다. 문 안 왼쪽에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고 정상은 돌난간을 둘렀다.

홍예문 이맛돌에 오얏 꽃문양과 앞뒤 현판석에 '독립문'과 '獨立門' 글자를 새기고 좌우로 태극기 문양을 넣었다. 글자를 이완용이 썼다는 설이 있으나, 최근에 김가진의 글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남아 있다.
 
독립문 위로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신촌과 광화문을 연결하는 저 도로의 확장으로 독립문은 끝내 제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1980년 70미터 떨어진 현재 자리로 옮겨지고 만다. 역사 유적을 대하는 우리 민낯이다.
▲ 독립문(1971년)모습 독립문 위로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신촌과 광화문을 연결하는 저 도로의 확장으로 독립문은 끝내 제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1980년 70미터 떨어진 현재 자리로 옮겨지고 만다. 역사 유적을 대하는 우리 민낯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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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독립문을 부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관리하고 보존하려 애썼다. 문을 세운 취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에 수리하고, 1928년엔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하여 4000원이란 큰돈을 들이기도 한다.

독립문 건립을 통해 분출하는 민중의 혁명적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민중들은 오로지 자주와 독립, 민주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음을 실천으로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왕과 위정자들은 자기 권력 안위라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말았다. 엇갈린 욕망이 빚어낸 독립문이 그래서 더 초라하고 엉거주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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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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