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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사적 제242호 지정된 장성 필암서원. 2019년 7월 유네스코에서는 필암서원을 포함해 9곳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국가 사적 제242호 지정된 장성 필암서원. 2019년 7월 유네스코에서는 필암서원을 포함해 9곳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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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 조선 말기에 어린 아들, 고종을 등에 업고 왕보다 더한 왕권을 누렸고 '국태공(國太公)'이라는 최고의 존호를 받으며 '척화(斥和)와 쇄국(鎖國)'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사람.

왕 위의 왕, 제왕으로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그가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권좌를 잃었다. 절치부심하며 전국을 유람하던 대원군이 호남 땅 여러 곳을 둘러보고 난 후에 그 소회를 여덟 문장의 글로 남겼다. 지금까지도 많은 인구에 회자되거나 혹은 다른 버전으로 변형되어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이른바 대원군의 '호남 팔불여(湖南八不如)'다.

호 불여 영광(戶 不如 靈光)/ 곡 불여 광주(穀 不如 光州)/ 지 불여 순천(地 不如 順天)/ 결 불여 나주(結 不如 羅州)/ 인 불여 남원(人 不如 南原)/ 전 불여 고흥(錢 不如 高興)/ 여 불여 제주(女 不如 濟州)/ 문 불여 장성(文 不如 長城)

인구로는 영광만 한 데가 없고/ 곡식으로는 광주만 한 데가 없다/ 기름진 땅은 순천만 한 곳이 없고/ 세금을 거둬들이기에 나주만 한 곳이 없다/ 인심으로는 남원만 한 데가 없고/ 돈이 많기로는 고흥만 한 데가 없다/ 여자가 많기로는 제주만 한 곳이 없고/ 학문으로는 장성에 견줄만 한 곳이 없다.

  
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에 있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 동상. 광주광역시에서는 북구 운암동 광주문화예술회관 사거리에서 전남 담양군 경계인 북구 태령동까지 11.4km를 ‘하서로’로 지정하고 김인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에 있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 동상. 광주광역시에서는 북구 운암동 광주문화예술회관 사거리에서 전남 담양군 경계인 북구 태령동까지 11.4km를 ‘하서로’로 지정하고 김인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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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호남 민생투어를 끝내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여덟 번째로 들른 곳이 장성이다. 장성에 들러서는 '문불여장성(文不如 長城)'이라 했다. 학문으로는 장성을 따라올 곳이 없다는 뜻이다. 천하의 흥선 대원군이 장성을 상징하는 수사(修辞)로 '장성에 가서 학문 자랑하지 마라' 했던 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세계가 인정한 조선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
 

장성이 '문필(文筆)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호남 유림들이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세운 '필암서원(筆巖書院)'의 영향이 크다. 국가 사적 제242호 지정된 필암서원은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書院)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공립에 해당하는 관학으로 중앙에 '성균관(成均館)'과 '학당(學堂)'이 있었다. 지방에는 부·목·군·현마다 '향교(鄕校)'를 두었다. 지금도 전국에는 200여 곳의 향교가 남아있다.
     
서원의 정문으로 사용하는 확연루(廓然樓). 위층은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아래로는 출입하는 누문 형식의 외삼문이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서원의 정문으로 사용하는 확연루(廓然樓). 위층은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아래로는 출입하는 누문 형식의 외삼문이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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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의 중심을 이루는 청절당이 사당을 마주 보고 있다.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서원의 강당이다
 강학의 중심을 이루는 청절당이 사당을 마주 보고 있다.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서원의 강당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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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교육기관으로는 고등교육을 담당한 '서원(書院)'과 초등교육을 맡았던 '서당(書堂)'이 있었다. 서원은 지방의 명망 있는 유림들이 성리학의 이념을 교육하고 '제향과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과 선현들의 연고지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조선 중종 때 경북 영주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을 필두로 조선말까지 전국적으로 약 60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2019년 7월 유네스코에서는 장성 필암서원을 포함해 한국의 서원 9곳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한 바 있다.

조선시대의 학맥(學脈)을 보면 크게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을 기반으로 한 '기호학파' 전라도 중심의 '호남학파' 등 지역적 연고를 두고 형성돼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 세워진 서원을 중심으로 학맥을 넓히고 발전시켰다.
     
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인 숭의재
 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인 숭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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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경상북도 안동의 '도산서원'이 영남 학맥의 중심이라면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은 호남 유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안동에 도산서원이 있다면 장성에는 필암서원이 있고, 필암서원에는 하서 김인후가 있다.

조선 중기 '군신관계의 표본'이 된 학자이자 시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16세기 호남 성리학의 초석을 놓았던 하서 김인후. 1510년(중종 5년) 전라도 장성현 맥동에서 태어났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 시를 잘 짓고 문장이 뛰어났다. 먼저, 조선 후기 가인 김천택이 지은 가사집 <청구영언>에 실려있는 일명 '자연가(自然歌)'로 널리 알려진 하서의 시 한 편 읊조려 보고 가자.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
 

22살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격인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안동에서 올라온 퇴계 이황과 함께 공부했고 훗날, 이황과 '사칠논변(四七論辯)'을 벌였던 기대승, 노수신 등과 사귀었다. 31살 되던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 그림 아래에는 하서가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썼다. 대나무는 인종을 상징하고 바위는 충성스러운 신하 김인후를 상징한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 그림 아래에는 하서가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썼다. 대나무는 인종을 상징하고 바위는 충성스러운 신하 김인후를 상징한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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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뒤 왕세자를 가르치는 벼슬 '시강원의 설서(設書)'가 되었다. 1년 뒤 하서를 유독 따르던 세자가 임금으로 등극했다. 조선 12대 왕 인종(仁宗)이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아꼈다. 인종은 세자 시절 손수 그린 묵죽도를 하서에게 선물할 만큼 깊이 신뢰했다.
  
그러나 어쩌랴.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다. 인종이 등극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서의 나이 36살 인종의 나이 30살이 되던 1545년의 일이다. 하서는 문을 닫아걸고 몇 날을 대성통곡하며 슬픔을 달랬다. 그때의 슬픔과 그리움을 '유소사(有所思)'라는 시로 남겼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임의 나이 서른이 되어가고/ 내 나이는 3기(1기는 12년)가 되려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 이별은 화살 같네/ 내 마음은 굴러갈 수 없는데/ 세상 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김인후에게 '홍문관 교리'를 제수했으나 하서는 병을 핑계로 고향 장성으로 낙향해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해마다 음력 7월 1일 인종의 기일이 되면 하서는 집 앞 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하루 종일 통곡했다. 난산 앞에 세워진 김인후 난산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41호
 해마다 음력 7월 1일 인종의 기일이 되면 하서는 집 앞 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하루 종일 통곡했다. 난산 앞에 세워진 김인후 난산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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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음력 7월 1일 인종의 기일에는 집 앞에 있는 '난산(卵山)'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실성한 듯 통곡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서가 태어난 맥동 마을 난산 입구에 '통곡단과 난산비'가 세워졌고 인종과 하서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군신관계의 표본'이 되어 후대로 전해지고 있다.

문묘에 배향된 '해동18현' 중 유일한 호남의 인물

하서가 세상을 떠나고 30년이 지난 1590년. 하서를 존경하는 후학들과 호남의 유림들이 나섰다. 하서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장성군 황룡면 기산리에 사당을 창건하고 위폐를 모셨다. 7년 후 왜군들이 호남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1624년에 복원하였다.
  
하서 선생을 배알 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또 하나의 문, 내삼문이다
 하서 선생을 배알 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또 하나의 문, 내삼문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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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 현종 때 호남 유림들이 임금에게 청액의 소를 올려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필암'이라 이름 지은 것은 하서가 태어난 황룡면 맥동 마을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167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1786년부터 그의 학맥을 이은 고암(鼓巖) 양자징(1523~1694)의 위패를 하서의 위패와 나란히 봉안하였다. 양자징은 하서의 절친이며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자 하서의 사위다. 소쇄원 제월당에는 하서의 시 '소쇄원 48영'이 걸려 있다.

1796년 정조는 "조선 개국이래 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라며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성균관 문묘에는 신라부터 고려와 조선시대에 높은 학문과 지조를 지킨 성현 18명의 위폐를 봉안하고 있다. 이 인물들을 '해동18현(海東十八賢)'이라 칭하는데 하서 김인후는 18명 중 유일한 호남의 인물이다.
  
제향의 공간인 우동사. 우동사에는 하서의 위패와 그의 사위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양자징은 하서의 절친이자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다
 제향의 공간인 우동사. 우동사에는 하서의 위패와 그의 사위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양자징은 하서의 절친이자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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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은 '교육과 제향'이라는 서원의 기능에 맞게 학문의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의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서원 입구에는 이곳이 신성한 곳 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뒤에는 누각 형태의 '확연루(廓然樓)'가 있다. 위층은 휴식 공간을 사용하고 아래로는 출입하는 누문 형식의 외삼문이다. 우암 송시열의 현판이 걸려 있다.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의 중심을 이루는 청절당이 사당을 마주 보고 있다. 청절당 마당의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인 진덕재와 숭의재가 있다. 하서 선생과 그의 사위 양자징을 배알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내삼문이다. 내삼문 앞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서있다. 계생비는 제향할 때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놓은 비석이다.
  
내삼문 앞에 서있는 계생비. 계생비는 제향 할 때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놓은 비석이다
 내삼문 앞에 서있는 계생비. 계생비는 제향 할 때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놓은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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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의 공간 중심에 사당 '우동사(佑東祠)'가 있다. 우동사라는 당호는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 동방에 태어난 인물이 하서 김 선생이다"라는 뜻으로 지었다. 북쪽 벽에 하서의 위패가 있고 동쪽 벽에 그의 학맥을 이은 양자징의 위패가 있다.

필암서원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 한 채 있다. 소중한 것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의 '경장각(敬藏閣)'이다. 하서와 인종의 각별한 인연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인종이 스승이었던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경장각
 인종이 스승이었던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경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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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각 현판. 정조의 친필 글씨다. 왕의 어필은 함부로 볼 수 없다 하여 얇은 망사로 덮여 보호받고 있다
 경장각 현판. 정조의 친필 글씨다. 왕의 어필은 함부로 볼 수 없다 하여 얇은 망사로 덮여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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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 하서에게 선물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해 오던 건물로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왕의 어필은 함부로 볼 수 없다 하여 얇은 망사로 덮여 보호받고 있다. 소중한 것을 공경하게 보관하라는 의미와 달리 2006년에 묵죽도판을 도난당했다가 다행히 올 2월에 되찾았다.

필암서원은 비교적 옛 모습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원 옆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유물 전시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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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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