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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이트 포인트 비치에서는 더이상 법적으로 전복 채취를 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해안가로 뿜어져 나오는 유황 온천이었다. 농부였던 토주로 타가미와 타미지, 즉 타가미 형제는 고된 농사로 악화한 류마티즘을 치료하러 1910년 이곳에 왔다. 그때 형제는 온천욕을 하다 이곳의 상업적 가치에 눈을 떴다.
 
드론으로 촬영한 팔로스 버디스 반도다. 해양판 위에 있으며 육지 아래에는 바닷물이 흐른다.
 드론으로 촬영한 팔로스 버디스 반도다. 해양판 위에 있으며 육지 아래에는 바닷물이 흐른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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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지형을 팔로스버디스 반도라고 부른다. SBS 드라마 <상속자들>과 이병헌 주연의 드라마 <올인>이 촬영됐던 곳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바다를 옆에 두고 직각 절벽 위를 차로 달리면 항공 카메라가 그 모습을 뒤쫓으며 부감을 찍는다. 이곳의 전형적인 구도다.

이곳은 지구의 시선으로 봤을 때 육지가 아니라 섬이다. 지하 수천 미터 아래에 바닷물이 흐른다. 200만 년 전부터 태평양 해양판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해양산맥이 북미 대륙판과 만나 충돌했다. 이때 해양산맥이 대륙판과 밀착하면서 땅이 휘고 균열이 생겼다. 마그마와 함께 가까이 카브릴로 단층도 형성됐다. 

이 때문에 이곳 해안가 15미터 아래 수백 곳에서 온천수가 흐른다. 이 영향으로 바다 수온도 따뜻해 다양한 어류와 수생명체가 살고 있다. 다이빙 명소로도 인기가 있다. 간조 때가 되면 짙은 색의 화산암이 해변가에 모습을 드러낸다.
 
화이트 포인트 비치를 둘러싼 절벽이다. 땅이 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화이트 포인트 비치를 둘러싼 절벽이다. 땅이 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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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시설 분리주의

타가미 형제는 리틀 도쿄 상인에게 후원을 받아 1917년 세풀베다 가족의 땅을 임대했다. 땅을 파 온천수를 더 확보했다. 형제는 1925년 2층짜리 호텔에 올림픽 경기장 크기의 바닷물 수영장과 무도장, 도박장을 만들었다. 새와 원숭이를 구경할 수 있는 작은 우리도 만들었다. 

야외에는 돌로 의자를 만들고 화로를 설치했다. 또 다른 일본인 미츠오 엔도는 해안가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바지선을 설치해 낚시터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역 대표 관광지가 됐다. 일본인 거주촌 로스앤젤레스 리틀 도쿄에서 무료 셔틀버스가 다녔고 신혼 부부가 허니문 여행을 왔다. 의사들은 환자를 이곳으로 보내 온천 치료를 하도록 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올림픽 때는 일본 카약 국가 대표팀과 달리기 대표팀이 이곳에 머무르며 대회 준비를 했다. 형사물 영화 딕 트레이(Dick Tracy)가 촬영됐다. 
 
100년 전 온천 호텔이 만든 해변가 화로와 돌의자다.
 100년 전 온천 호텔이 만든 해변가 화로와 돌의자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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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곳은 일본인 이민자에게 안식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유색인종이 무도장과 공원, 도박장을 이용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오락시설 분리주의로 유색인종은 놀이시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인종이 섞이면 무질서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종, 봉기, 그리고 롤러코스터, 미국 내 오락시설 차별에 대한 투쟁(Race, Riots, and Roller Coasters, The Struggle over Segregated Recreation in America)>을 쓴 사회과학자 빅토리아 월콧은 책에서 "여러 인종의 젊은 남녀가 한 공간에서 야한 옷을 입고 함께 있는 모습은 인종 간 성관계 같은 끔찍한 상상을 하게 하고, 무질서 속 젊은 백인 여성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백인들은 생각했다"고 썼다. 이런 차별은 1964년 민권운동이 일어난 뒤 지역에 따라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현재까지도 백인 문화 깊숙한 곳에 망령처럼 남아있다.
 
화이트포인트 온천 호텔 과거 모습이다.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수영장에는 바닷물과 함께 따듯한 온천수가 들어왔다.
 화이트포인트 온천 호텔 과거 모습이다.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수영장에는 바닷물과 함께 따듯한 온천수가 들어왔다.
ⓒ 샌페드로 베이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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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당하던 아시안들, 태평양전쟁에 결국 수용소로

1928년 폭풍이 덮치면서 온천 야외 수영장이 부서졌다. 이어 1933년 12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롱비치 대지진으로 온천수 줄기가 끊겼다. 대공황(1929~1939)의 충격도 잇따라 받으면서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타가미 형제는 온천을 계속 운영하고 싶었다. 땅 주인도 형제에게 땅을 팔고 싶었지만 현행법상 판매가 안 됐다. 1913년 시행된 외국인 토지법에 따라, 시민권을 받을 수 없는 이민자는 땅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말 온천은 결국 폐쇄됐다. 해당 토지법은 1952년 위헌 판결이 났다(앞서 소개한 한인 스포츠 영웅 새미 리도 1950년대 땅을 사려고 했지만 부동산 업자들이 여러 핑계를 대며 주택을 팔지 않으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는 의사였고 입증된 스포츠 스타였는데도 말이다).
 
해변 언덕에 설치된 나이키 미사일 포대다. 그 흔적만 방치돼 있다.
 해변 언덕에 설치된 나이키 미사일 포대다. 그 흔적만 방치돼 있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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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이 터지자 일본인들은 사실상 스파이로 간주됐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 검은색 자동차와 챙이 짧은 중절모를 쓴 FBI 요원이 국가 안전을 이유로 타가미 가족과 낚시터를 운영하던 엔도를 체포했다. 이듬해 4월까지 어촌 마을에서 살던 많은 일본인이 붙잡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연방정부는 일본인 거주지를 빼앗아 포트 맥아더 군사 보호 단지에 통합시켰다. 호텔 건물도 박살냈다. 언덕과 해변가에는 미사일 포대와 방벽, 방공호를 만들었다. 포문은 일본을 향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그들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소수만 이곳으로 돌아왔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주가 이 해변을 샀다가 199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로 팔았다. 1997년에는 카운티가 200만 달러를 투자해 놀이터와 화장실 등을 설치하는 재건공사를 했다. 개관식 때 타가미 가족 후손이 초대됐다. 

차별받았던 이민자 역사는 해변 언덕 위 화이트 포인트 자연 보호구역에 설치된 빛바랜 안내판에만 몇 줄 소개돼 있다. 무연고 묘지처럼 말이다.
 
해변 위 언덕에 있는 화이트 포인트 자연 보호구역이다. 언덕 끝에 방공호 두 개가 설치돼 있다.
 해변 위 언덕에 있는 화이트 포인트 자연 보호구역이다. 언덕 끝에 방공호 두 개가 설치돼 있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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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황상호, #온천, #화이트 포인트 호텔 온천, #일본계 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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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트레블러17 대표 인스타그램 @rreal_la 전 비영리단체 민족학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전 CJB청주방송 기자 <오프로드 야생온천>, <삶의 어느 순간, 걷기로 결심했다>, <내뜻대로산다> 저자, 르포 <벼랑에 선 사람들> 공저 uq2616@gmail.com

LA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 폭력 생존자를 돕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기방송에서 기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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