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6 21:24최종 업데이트 21.08.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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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술감독이자 다양한 영상매체 아트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최연식 미술감독. ⓒ 유성호

 
정말 열심히 놀던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익스트림 스포츠에 빠져 살던 소년은 자라서 프로 스노우보더(snowboarder)가 되었다. 겨울을 쫓아 세계를 돌아다니며 스노우보드를 타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짜릿한 아드레날린을 만끽했다. 실은 그는 운동 자체보다는 익스트림 스포츠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화'가 좋았다.

그런데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면서 뿜어져 나왔던 아드레날린을 느낀 현장이 또 있었다. 바로 영화 현장이었다. 그에겐 거리의 문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감각이 있었고, 그것은 영화 현장과 잘 들어맞았다.


영화미술감독이자 다양한 영상매체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최연식 미술감독. 그는 어느새 영화 <부러진 화살>부터 <쎄시봉>, <아이캔스피크> 외에 각종 드라마와 뮤직비디오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소위 영상매체 업계의 '베테랑'이 되었다. 지난 7월 28일, 최연식 감독의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스펙이 아니라 재미를 찾던 소년
  

최연식 영화미술감독이 영화현장에 있는 모습 ⓒ 최연식

 
- 스노우보드 프로선수에서부터 영화미술감독, 다양한 장르의 영상 아트디렉터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나는 이것만 평생 하면 돼,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10년 동안 익스트림 스포츠가 주는 강렬함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부상도 생기고, 나이를 먹었다는 걸 실감하면서 두려웠던 것 같다. 뭔가 다른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 마침 영화미술 현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과거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 디자인이나 예술 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스포츠와 예술이라는 두 카테고리로 나의 경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과거에 내가 했던 일들과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문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다.

다른 스포츠 선수들과 달리 스노우보더들에겐 그들만의 문화와 세계가 있다.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음악을 즐기는지, 어떤 문화를 향유하는지 등 모든 일상이 예술적 감각과 맞닿아 있다. 단순히 기술적인 우위를 가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일상을 모두 문화 소비재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 다양한 작품의 미술감독을 맡아온 만큼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을 고려할 때 무엇을 우선시하나?

"일단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보는 것 같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 공간이 이렇게 보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바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통해 '시나리오 속 인물의 공간이 이렇게 표현되면 재밌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예를 들어 영화 <아이캔스피크>(2017)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나문희 선생님이 맡았던 인물(극 중 옥분 역할)의 집이 바로 떠올랐다. 옥분은 특정 시대, 한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과거를 숨긴 채 그저 동네 괴팍한 할머니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영화에서는 할머니가 시장의 작은 가게를 시작으로 조금씩 가게를 늘려나가는 과정을 빠르게 보여줬는데, 그 할머니의 삶이 공간과 함께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시나리오에 딱 맞는 실제 공간을 찾는다는 것(location, open set)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공간을 변화시키거나 세트를 제작하여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옥분의 집도 시나리오 상으로는 가게와 집이 따로 있는 설정이었지만 한 공간에서 점점 가게를 넓혀가는 설정을 연장했다. 집과 가게가 연결, 확장되면서 인물의 삶을 좀 더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미술적 제안을 했고, 협의를 통해 (설정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인물, 사건들을 배가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발견되는 시나리오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최연식 영화 미술감독,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영화미술감독이자 다양한 영상매체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최연식 미술감독이 28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영화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 영화미술 또는 드라마 속 미술은 뭐가 미술이고 뭐가 실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저게 영화미술이야?'라고 반응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게 맞는 대답인 것 같다. 꾸민 티가 나는 것보다 화면에 봤을 때 실제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잘 녹아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한 영화미술이니까 '근사해야지, 내가 이만큼 힘을 줬는데 이 정도는 보여야지'라고 생각하기보다 관객들이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자연스러운 공간을 연출하는 것. 세트라고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힘을 주고 빼는 건 기본을 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물론 판타지나 공포 같은 장르적 성격이 강한 작품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관객이 영화 속 공간을 실제라고 인식하고 믿게 하여 영화 전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외에 중요시하는 것은 효율적인 촬영이 될 수 있게 공간을 구조화하는 것이다. 영화미술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내 파트만 용이하게 만든다고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영화 현장과 삶의 균형
  

영화 현장속의 최연식 미술감독 ⓒ 최연식

 
- 영화나 드라마, 뮤직비디오가 'K-컬처'라고 묶이는 범주에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영화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또는 미술감독으로서 한국영화-영상산업의 현장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는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여전히 제작 과정보다는 결과물이 중시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변경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허점들이 있다. 합리적이지 않거나 비효율적인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 부분은 현장에서 균형을 맞춰가며 해결해야 하는 것 같다. 현장은 매 상황이 정해진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이 일의 매력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임금에 관한 문제가 심각했다. 미술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팀장이었을 때는 주는 대로 받았다. 임금에 대한 협의나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한 추가금은 전혀 없었고, 그런 사건들이 너무 당연시되었다. 지금은 노동환경과 조건에 대한 권고가 시작되어 달라진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시스템도 과도기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산업적 시스템을 살펴보면 표준근로에 대한 임금기준이 마련이 되면서 영화 예산 규모가 커지긴 했다. 5~6년 전에는 30억~40억 정도면 중간 정도의 예산이었는데, 지금은 60억이어도 저예산 영화로 여기는 추세다. 노동 시간의 경우도 연장노동시간이 12시간 이상이 되면 안 되고, 휴가를 보장해야 하는 부분들이 적용이 되고 있다.

표준근로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 개인적으로 변화를 느낀 건 노동 시간 부분이다. 이전에는 일하는 시간에 대한 한계점이 없었다. 그저 할당된 일을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 내에 끝내는 식이었다. 미술감독이 되고 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를 주고 싶었다. 가끔 일이 많을 때는 '이 방식을 꼭 지켜야 할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것을 개인적인 욕심으로 정당화할 순 없으니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팀원들이 오후 6시에 퇴근하면 나도 퇴근한다. 이렇게 변하기 시작한 지 7~8년 정도 된 것 같다. 이 인터뷰를 읽는 영화인 중에 '그렇게 일을 해도 돼?' 혹은 '그러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까지는 결과적으로 마감 기한을 못 맞추거나 원하는 만큼의 결과물을 시간에 쫓겨 놓치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영화는 어찌 보면 짧은 기간에 집약적인 에너지를 소비하는 작업인 것 같지만, 나는 집약적으로 긴 호흡을 갖고 가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컨디션도 중요하다. 좋은 컨디션에서 시간 대비 효율성이 높다."

아이를 만난다는 건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

- 그렇게 노동 시간을 지키고 나면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다. 한편으로는 영화미술감독 또한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의 불안감도 있을 것 같다.

"사무실에서 나가면 몸은 퇴근이지만 사실 머리는 퇴근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시간 나는 대로 계속 자료를 찾아보고 자기 전에도 이미지를 상상한다. 일을 시작하면 일에 중독된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는 끝나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야지 하지만 일이 막상 끝나면 공허함이 몰려오거나 번아웃이 된다.

일이 있을 때도 불안하고 일이 없을 때도 불안하다. 이런 생활의 반복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프리랜서라 좋은 점을 꼽자면 일이 없는 시기에 육아와 가정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은 아내랑 아이와 부족했던 모든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만큼 수입은 줄겠지만 말이다."
 

딸과 함께 있는 최연식 미술감독 ⓒ 권은비

 
- 한국 사회는 '저출생 시대다,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돌봄노동이 필요한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각자의 몫'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최연식 미술감독은 어떠한가?

"결혼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아이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내도 나도 아이를 낳으면 마냥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를 낳으면 옆에 눕혀두고 뜨개질을 한다던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을 상상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그런 상상은 모두 상상일 뿐이었다. 현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과 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육아가 힘들다고 하면 '남들 다 하는 건대 징징대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육아와 돌봄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내의 입장에서(여성의 입장에서는) 더욱 힘든 부분이 많다. 나의 힘듦과 아내의 힘듦은 다른 차원에 있다. 아무리 육아를 같이 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중되거나 불리한 부분들이 많다. 출산 후 육체적, 정신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경력 중단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정말 크게 내 삶이 변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나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는 어린이집 외에 아이를 돌봐줄 곳이 없다. 급한 상황이 생겨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돌봄의 시간과 일하는 시간이 겹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어떻게든 아내와 시간을 조율해 해결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가 자신의 일을 양보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 부분에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 요즘은 어떤 것이 가장 즐겁나?

"아이랑 있을 때 가장 즐겁다. 육아가 힘들기도 하지만 목적이 생긴 것 같다. 가족과 아이한테 집중해야지 하는 목적. 가족에게 집중한다. 아내도 나도 부모가 되는 게 처음이다 보니 돌이켜보면 늘 반성하면서 생활한다. 아이라는 존재가 나를 많이 바꿨다."

- 20년 동안 영화미술감독을 한 입장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나는 함께 일할 사람을 뽑을 때 면접을 꼭 보는 편이다. 그 사람들의 스펙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아이덴티티를 보려고 한다. 이력서를 보기보다 평범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줄 아는 친구들을 뽑는 편이다.

영화미술은 기본적인 시스템과 기술이 있지만, 순간순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학습된 것보다 다양한 경험 - 여행의 경험, 책을 통한 경험, 아르바이트의 경험 - 등이 쌓여서 발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좋다. 계획이 변경되었을 때 바로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일에는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 미술감독으로서 앞으로 만들고 싶은 세계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장르적 색채가 명확한 영화를 해보고 싶다. 전쟁영화라든지. RETRO SCI-FI(복고풍 공상과학), 공포, 스릴러 같이 이미지가 강렬하게 나올 수 있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드라마타이즈의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와서 다른 장르는 감상으로만 즐겼던 것 같다.

개인적인 관심은 장르물이지만 아이를 낳고 육아와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었거나 아이가 있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도 하고 싶다. 아이가 없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아가가 내 삶에 들어오고 나서 육아와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모두 진심으로 몰입이 된다."

최연식 미술감독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어른이 되서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이 꺼려진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른'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같은 길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에게서 스펙을 보지 않고, 경험으로 축적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며 함부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와 놀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최연식 미술감독. 그는 내가 최근에 만난 '어른' 중에 가장 재미난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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