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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립대회가 열렸던 대공중학교. 이 자리에 지금은 후베이성 총공회 건물이 있다. 주소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 자양로 234호다. 1938년 창립대회장에서 김원봉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들의 역량이 적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의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입니다."
▲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조선의용대 창립대회가 열렸던 대공중학교. 이 자리에 지금은 후베이성 총공회 건물이 있다. 주소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 자양로 234호다. 1938년 창립대회장에서 김원봉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들의 역량이 적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의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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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신익희의 이념적 중심축은 무장투쟁노선이었다.

폭넓은 인맥을 활용하여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ㆍ중합작 등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어디까지나 목표는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국내에서 일제를 축출하는 데 있었다. 

기대를 모았던 민족혁명당을 떠난 후 진로를 두고 고심할 때,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베이징 교외 노구교사건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8월에 좌파계열 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이에 참여하고,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하였다.

1938년 9월 한구(漢口)에서 무장투쟁단체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한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은 김원봉 주도의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해공을 비롯한 최창익ㆍ김학무 등 당원 11명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한인특별훈련반 졸업생 35명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이다." (주석 4)

해공이 여기에 참여한 것은 그들의 좌익이념에 동조하였다기보다는 평소 무장투쟁을 강조해왔던 소신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성자분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 군사부 시절부터 교육시켜왔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주석 5)

중일전쟁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념과 노선을 떠나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조국해방을 이끌자는 계산이 깔렸다.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무장항일운동단체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을 비롯 김성숙ㆍ유자명 등이 중심인물이다. 신익희는 조선의용대 창설과 관련 중국 국민정부측의 승인을 얻는데 역할을 하였다. 

중국정부는 정치부에서 관할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하였다. '연맹' 측은 애초에 독자적인 무장부대로 조선의용군의 창설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은 침략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아무리 동맹군이라 해도 자국에서 외국군대가 창군되는 것을 거북스럽게 생각하였던지 의용군 대신 의용대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군(軍)은 규모가 큰 것을 이르는데 이제 설립하려는 부대는 그렇게 큰 규모는 못되니 '대(隊)'로 할 것"을 전제로 했다는 주장도 있다. (주석 6)
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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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한국독립운동 진영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신익희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좌우 이념의 벽을 넘어 항일무장단체에 적극 참여하였다. 

해공은 전위동맹원들을 이끌고 민족전선 산하의 무력으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하였고, 또 전위동맹의 대표로 1939년 8월 기강(綦江)에서 열린 '7당 통일회의'에도 참석한다. 중국 관내 좌우 세력의 핵심인 김구와 김원봉의 공동 명의로 1939년 5월 발표한 『동지ㆍ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이 계기가 되어 열린 것이 '7당 통일회의'였다. 

8월 27일 사천성 기강에서 열린 이 회의에 해공은 민족전선측의 조선청년전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7당 통일회의'를 주재하였다. (주석 7)

'7당 통일회의'는 차츰 이념갈등이 나타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독립운동 진영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1930년대에 만주와 중국 관내에 크게 세력이 형성되었다.


주석
4> 한시준, 「독립운동 정당과 해공 신익희」, 『우송 조동걸선생 정년 기념논총』Ⅱ, 811쪽, 나남출판, 1997.
5> 김용달, 앞의 책, 92쪽. 
6> 김삼웅, 『운암 김성숙』, 23쪽, 도서출판 선인, 2020.
7> 김용달, 앞의 책, 9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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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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