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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 깃발을 든 김원봉 왼쪽 두 번째가 석정 윤세주다.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 깃발을 든 김원봉 왼쪽 두 번째가 석정 윤세주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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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방점이 찍히는 최대 규모의 좌우연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중국 난징시 금릉대학 대례당에서 창당대회를 열어 독립운동 진영의 오랜 숙원을 현실화시켰다. 거기까지에는 진통이 적지 않았다.

좌우익 통일전선 정당인 신당의 당명은 조선의열단 등 좌익 쪽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주장했고, 한국독립당 등 우익 쪽에서는 한국민족혁명당을 주장해서 일치하지 않았다. 절충을 거듭한 결과 중국측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 민중에 대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으로, 그리고 당내에서는 그냥 민족혁명당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다양한 계파가 참여한 민족혁명당 창당의 주역들이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포용력이 있고 의회주의자인 그를 대표로 선임한 것이다. 실권자는 당세가 강한 의열단의 김원봉이었으나 당대표는 김규식이 맡았다. 신익희는 선전부에서 부장 최동오와 함께 일하였다. '강령'과 '정책' 마련에 능력을 한껏 발휘했다.  

민족혁명당은 「당의(黨義)」에서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구적(仇敵) 일본의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5천년 독립 자주해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국민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선언했다. 조소앙의 3균주의 원칙을 수용하였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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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혁명당의 「강령」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혁명당 강령

 1. 일제의 타도와 한국의 독립.
 2. 봉건적이고 반혁명적인 세력의 숙청과 민주정권의 설립.
 3.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의 말살과 모든 서민이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제제도의 확립. 
 4. 군(郡) 자치제의 확립.
 5. 국민개병(國民皆兵).
 6. 평등한 선거 및 피선거권의 확립.
 7. 언론ㆍ집회ㆍ출판ㆍ조직 및 종교의 자유. 
 8. 남녀평등.
 9.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10. 대기업체와 독점기업체의 국유화.
 11. 국가적 경제계획 제도의 확립.
 12. 노동의 자유.
 13. 누진세 제도의 확립.
 14. 의무교육.
 15. 양로원, 탁아소 및 구제기관의 국영.
 16. 민족반역자와 국내 일본인 재산의 몰수.
 17. 전세계 피압박민족 해방과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

민족혁명당은 창당이념을 민족혁명과 민주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여 '조선혁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어서 민족혁명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전복과 민족자주 정권의 건립'을, 민주주의혁명은 '봉건유제의 완전 숙청과 인민자유정권의 건립'을 내세웠다. 또한 '혁명원칙'은 "민족의 자주독립 완성, 봉건제도 및 반혁명세력의 숙청과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건설,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과 민족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 건립"이었다.

신익희가 평소에 꿈꾸었던 신념이고 철학이었다.

민족혁명당은 대일투쟁과 독립에만 국한하지 않고, 멀리 해방 후의 민족ㆍ민주국가 건설을 내다보면서 건국 방략의 청사진을 내걸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일제 패망 직전에 제시했던 「건국방략」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된다.

민족혁명당은 근대정당의 구색을 두루 갖추고 출범하였다. 정책, 당장(黨章), 당보(黨報)를 만들고, 당가(黨歌)를 제작하여 각종 행사 때에는 게양하고 합창하였다. 『민족혁명당 당보』는 여러 차례 발간되다가 『민족혁명』으로 개제하여 간행했다. 현재 이들 당보는 남아 있지 않고 일제 정보 자료에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민족혁명당 정책

 1. 국내의 혁명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내외의 전민족적 혁명전선을 결성한다.
 2. 국내의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총동원을 준비한다.
 3. 적의 세력에 아부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한다.
 4. 국외의 무장부대를 확대강화한다.
 5. 해외 우리 민족의 총단결을 촉성한다.
 6. 우리 혁명운동에 동정 원조하는 민족 및 국가에 대해서는 이와의 연결을 도모한다. (주석 2)
난징대학의 예당.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원봉은 1935년 이 대학(당시는 금릉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난징대학의 예당.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원봉은 1935년 이 대학(당시는 금릉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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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은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민족교육운동을 폈다. 즉 민족혁명당 군사부에 편입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의 교양훈련을 맡은 것이다. 이때 해공은 '국내외 정세'라는 과목을, 한일래는 '산술대수', 윤세주는 '사회과학', 김두봉은 '한글', 안일청은 '한국역사', 이청천은 '유격전술과 정신훈화' 등을 가르쳤다.

이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당군인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되었다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해공의 이 시기 민족 교육운동은 뒷날 항일 무장투쟁의 주력군을 양성하였다는 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주석 3)

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을 떠나면서 민족혁명당은 심각한 내분으로 진통을 겪었다. 1936년 2월 조소앙이 탈퇴하고, 1937년에는 최동오ㆍ홍진ㆍ이청천 등 만주 출신의 조선혁명당 계열이, 1938년에는 최창익 계열이 이탈하면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계열의 독무대가 되었다. 신익희도 민족혁명당의 지나친 좌경화에 당을 떠났다. 이로써 당초의 좌우연합체는 깨어지고 다시 분열로 나타났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중국대륙은 폭풍전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증파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중국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세력은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있었으나, 여전히 서로의 주적은 일제가 아닌 동족의 반대세력이었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상하이를 탈출하여 가흥ㆍ진강 등지를 거쳐 국민당정부를 따라 난칭에 머물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난징을 떠나 장사ㆍ광주ㆍ삼수ㆍ유주ㆍ귀향ㆍ준의를 거쳐 충칭에 이르렀다. 흩어졌던 좌우진영은 얼마 후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게 된다.  


주석
2> 김삼웅, 『통사와 혈사로 읽는 한국현대사』, 94~95쪽, 인문서적, 2019.
3>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의 인물과 노선』, 91쪽, 한울아카데미, 200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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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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