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사랑을 할 때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만남이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날 수도 있고 학교나 직장, 취미생활 속에서 만남이 이뤄지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 오는 날 운명의 상대가 우산 속으로 뛰어 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물론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매우 드무니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일단 남녀가 만나야 다음 단계인 썸을 타고 연애로 발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멜로 영화에서도 모든 사랑은 만남으로 시작한다. 전도연·박신양 주연의 <약속>처럼 환자와 의사로 첫 만남이 이뤄지기도 하고 <접속>이나 <후아유>처럼 채팅을 통해 만남을 갖기도 한다. 물론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를 보내는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도 있고 같은 배를 탔다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타이타닉> 같은 영화도 있다. 여기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 모든 사랑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만남의 과정을 생략한 상태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질 수는 없을까. 물론 현실에서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지만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이 한마디 대화조차 나누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슴 시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송해성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9.08, 다음에서 9.1점이라는 높은 평점을 받은 최민식-장백지 주연의 멜로 영화 <파이란>은 만남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다.
 
 송해성 감독은 <파이란>으로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을 휩쓸었다.

송해성 감독은 <파이란>으로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을 휩쓸었다. ⓒ 튜브엔터테인먼트

 
남우주연상 그랜드슬램 달성한 최민식

대한민국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논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우 최민식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최민식은 1989년 <야망의 세월>에서 '꾸숑' 역할을 통해 거친 상남자의 매력을 뽐내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1994년에는 <서울의 달>에서 순박한 시골청년 춘섭 역으로 연기변신에 성공하며 대중들의 뇌리에 최민식이라는 이름을 깊게 각인시켰다.

아킬레스건 부상 등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던 최민식은 1997년 영화 <넘버3>의 마동팔 검사로 재기에 성공한 후 1999년 <쉬리>의 북한군 박무영으로 최고의 카리스마를 뽐냈다. 당시 최민식은 악역이었음에도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같은 해 연말 <해피엔드>에서 무기력한 실직가장을 연기한 최민식은 2001년 <파이란>의 이강재를 만났다. 최민식의 필모그래피에서 흔치 않은 멜로 영화였다.

최민식은 <파이란>에서 친구가 이끄는 조직에서 말단으로 일하는 3류 건달 강재를 연기했다. <파이란>은 최민식과 홍콩스타 장백지를 캐스팅했음에도 곽경택 감독의 <친구> 열풍에 밀려 서울관객 22만(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최민식도 "관객과의 소통이 아쉬웠던 작품"이라며 <파이란>의 흥행부진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최민식은 <파이란>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3대 영화제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출연한 최민식은 2003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통해 최고배우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2000년대 중·후반 대부업체 광고 출연과 강우석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공백을 가졌던 최민식은 2010년 <악마를 보았다>에서 소름 끼치는 살인마를 소화하며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2012년에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와 2013년 <신세계> 역시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최민식은 2014년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명량>을 통해 1700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 극장가의 흥행 역사를 새로 썼다(<명량>은 최민식의 유일한 1000만 영화다). 같은 해 할리우드 영화 <루시>에 출연해 스칼렛 요한슨, 모건 프리먼 등과 연기했던 최민식은 2017년 <침묵>과 <특별시민>, 2019년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 잇따라 출연했다. 2019년 <봉오동 전투>에서는 지난 광복절 고국으로 봉환된 홍범도 장군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강재와 파이란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
 
 <파이란>에서 두 주인공은 딱 두 번 스치고 지나갔을 뿐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파이란>에서 두 주인공은 딱 두 번 스치고 지나갔을 뿐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 튜브 엔터테인먼트

 
당초 송해성 감독이 생각했던 <파이란>의 원제는 <친절한 강재씨>였다. 강재는 최민식의 극중 이름으로 여주인공 파이란(장백지 분)은 입버릇처럼 "강재씨는 친절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멜로 영화의 제목으로는 다소 투박하다고 느껴졌는지 영화의 제목은 여주인공 이름인 <파이란>으로 변경됐다(당시 폐기된 제목은 훗날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마지막편 <친절한 금자씨>의 작명에 모티브가 됐다).

용식이파의 일원인 강재는 미성년자들에게 음란비디오를 유포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3류 건달이다. 친구이자 보스인 용식(손병호 분)의 살해 현장을 목격한 강재는 배를 살 돈을 받는 조건으로 대신 자수를 하기로 약속했다. 용식이 돈을 주기만 기다리던 어느 날, 집으로 경찰이 찾아오고 강재는 얼굴도 모르는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소개비를 받고 위장 결혼을 했던 중국인 아내인데 강재는 한 차례 얼굴만 스쳤을 뿐 그녀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한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국에 있던 친척마저 캐나다로 떠나 졸지에 고아가 된 파이란은 강재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비록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편이지만 파이란에게 강재는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그렇듯 파이란도 불치병에 걸린다. 파이란은 어렵게 아픈 몸을 이끌고 강재를 찾아가지만 마침 그날 강재는 미성년자 음란물 유포로 경찰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파이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골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강재는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파이란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리고 파이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간 파출소에서 너무 건조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찰들을 보며 강재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난동을 부린다.

영화 <파이란> 최고의 장면은 역시 파이란의 장례를 치른 강재가 부둣가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강재는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라는 유언을 남기며 연신 강재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파이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특히 허탈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힘없이 담배를 입에서 떨어트리고 오열하는 최민식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파이란>이 애절한 멜로영화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명장면이기도 하다.

소름 끼치는 손병호의 깡패 두목 연기
 
 중화권 최고의 여성 스타 중 한 명이었던 장백지는 2008년 10여 명의 여성배우가 연루된 진관희의 성추문 사건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화권 최고의 여성 스타 중 한 명이었던 장백지는 2008년 10여 명의 여성배우가 연루된 진관희의 성추문 사건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 튜브 엔터테인먼트

 
<파이란>에서는 최민식과 장백지 외에도 2명의 조연배우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 먼저 강재의 친구이자 용식이파 보스를 연기했던 손병호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강재에게 죄를 뒤집어 쓰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비열한 연기가 돋보인다.

<파이란> 이후 한동안 악역만 들어와 연기에 고민이 많았다던 손병호는 드라마 <하얀 거탑>의 착한 변호사, <화려한 휴가>의 강직한 교사 역을 통해 선학 역할도 어울린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보스 역이 잘 어울리는 배우 손병호는 최근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에서 박태구(엄태구 분)의 칼에 찔려 큰 상해를 입는 북성파 보스 도회장을 연기했다. 참고로 <파이란>에서 친구 역할로 나온 최민식과는 실제로도 1962년생 동갑내기다.

사방이 적인 강재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할 수 있는 후배 경수 역의 공형진도 <파이란>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울하고 무거운 <파이란>에서 공형진이 등장하는 장면만큼은 관객들이 긴장을 풀고 웃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경수는 파이란에게 마후라를 선물하며 강재가 준 것이라고 말하고 파이란의 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강재와 파이란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담당했다.

1991년 SBS공채 탤런트로 데뷔 후 오랜 기간 무명생활을 하다가 <파이란>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공형진은 2004년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영만 역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다만 주연을 맡았던 <동해물과 백두산이>, <라이어>, <미스터 주부 퀴즈왕>, <대한이, 민국씨> 등이 나란히 흥행에 실패하면서 스타배우로 도약하진 못했다. 지난 2019년에는 전직 북파공작원을 연기한 <미친 사랑>에 출연했지만 극장 개봉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파이란 송해성 감독 최민식 장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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