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5 13:37최종 업데이트 21.08.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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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라면은 동아시아인들의 입맛을 단시간에 바꿔놓았다. '이랏샤이마세' 하는 환영 인사와 함께 맛보게 되는 수제 라멘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이런 인스턴트 라면에 대해 일본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일본 상품으로 꼽을 정도다. 특허 전문인 김원준 변리사가 2003년 <전기의 세계> 제52권 제8호에 기고한 '간편한 식사의 국제화에 성공한 라면'에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에 일본의 후지종합연구소가 2천 명의 일본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20세기 최고의 일본 제품을 조사한 바 있는데 예상외로 라면이 1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가라오케, 3위는 헤드폰 스테레오, 4위는 게임기, 5위 CD, 6위 카메라······.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58년 8월 25일부터 인스턴트 라면을 시판한 안도 모모후쿠(1910~2007년) 닛신식품 사장은 일본 식민지 타이완에서 출생했지만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인이 됐다. 또 일본 식품산업의 경영 방식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라면 산업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이 20세기 최고의 일본 상품으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라면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것을 오로지 일본 식품산업의 성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라면의 확산을 도운 근본 요인이 있다.

하위 동맹국들에 대한 식량 원조
 

라면 ⓒ 최홍대

 
초기에 라면이 인기를 얻은 곳은 일본과 더불어 한국·타이완이다. 이 세 나라는 한때는 '한·중·일' 3국으로 불렸다. 일례로 1970년 12월 12일 자 <매일경제> 1면 하단 기사는 "한국과 일본 및 자유중국은 동지나해의 해저유류자원 탐사에 목적을 두고 상호 협력할 것에 합의했다"면서 3국 대표단을 "한·중·일 3국 대표들"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타이완(중화민국)을 중국으로 인정해주던 1958년 전후의 동아시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친 도널드 트럼프와 '더 나은 재건'을 외치는 조 바이든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기에 미군 주둔 국가들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인기를 끌었다. 미군이 주둔한 지역과 라면이 인기를 끈 지역이 그저 우연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미군이 주둔한 지역이라는 점이 라면 확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 정부가 고민한 것 중 하나는 농산물 재고 물량 처리였다. 밀로 대표되는 이 잉여농산물의 판로를 뚫을 목적으로 미국 정부가 고안한 것 중 하나는 하위 동맹국들에 대한 식량 원조였다. 2003년에 <농협경제 연구보고> 제135호에 수록된 이호철 경북대 교수의 논문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의 역사적 의의'에 설명된 바와 같이 이런 원조는 크게 4가지 형태로 제공됐다.

첫째는 달러가 아닌 상대국 통화를 받고 농산물을 판매한 뒤 그 대금을 상대국 중앙은행에 넣어두고 미국대사관이나 미국 기업의 비용으로 사용하거나 상대국과의 공동방위 비용 등에 활용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상대국의 빈곤층 등을 위해 농산물을 무상으로 증여하는 방식이었다. 셋째는 잉여농산물을 전략물자와의 교환 등을 위해 처분하는 방식, 넷째는 달러를 받고 잉여농산물을 판매하되 장기간의 외상거래를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많이 쓰인 방식은 첫째였다. 위 논문은 미국 공법(Public Law) 제480호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에 기초한 대외 원조를 예로 들면서 1954~1962년 기간에 "제1관(위의 첫째 지칭)이 전체의 68.7%를 차지"했다고 설명한다. 상대국 통화를 받고 미국산 농산물을 수출한 뒤 상대국 중앙은행에 대금을 예치해두는 방식이 가장 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셋째 방식이 23.6%를 차지했다.

상대국 입장에서는 자국 통화로 미국 농산물을 수입하고 그 대금 일부가 자국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수입대금의 용처뿐 아니라 거래 규모 등에 대해서도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 인한 문제점 중 하나는 상대국의 농업 기반이 취약해진다는 점이었다. 미국 농산물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상대국 시장에 넘쳐흘렀기 때문에 상대국 농업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외식민지를 발판으로 경제적 팽창을 도모하던 일본제국주의와 달리, 제2차 대전 이후의 미국 신제국주의는 해외 군사기지를 발판으로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동런던대학(University of East London) 교수인 국제정치학자 바실리스 포카스(Vassilis K. Fouskas)는 "한때 우리는 제국주의를 식민지의 수로 가늠하였다"면서 "그러나 오늘날 신제국주의 하에서 그 식민지는 해외주둔 군사기지의 수로 변모되었다"고 말한다.

구제국주의와 신제국주의의 합산물

미군 주둔을 배경으로 동아시아에 유입되는 미국산 농산물이 동아시아 농업을 위협하는 속에서, 일본 정부는 미국산 밀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가 생각한 것 중 하나는 그 밀로 빵을 만들어 소비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빵 대신 면이 어떻겠느냐'라고 설득한 인물이 1948년에 닛신식품을 설립하게 될 안도 모모후쿠였다. 1933년부터 오사카에서 사업을 경영하던 그가 일본 정부에 접근한 것이다.

2015년에 <아시아 리뷰> 제5권 제1호에 수록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동아시아 식품산업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밀의 유입은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하도록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 뒤 안도 모모후쿠가 일본 정부에 접근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이 밀을 이용한 음식인 빵을 일본인이 먹도록 적극 권장했다. 이에 대해 안도 모모후쿠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어느 날 당시 후생성의 영양과장이었던 아리모토 쿠니다로우를 만나서 자신의 불만을 제기했다.

빵식(パン食)에는 같이 먹을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차(茶)만으로 빵을 먹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영양이 치우칩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면의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같은 밀을 사용하여 일본인이 좋아하는 면류를 왜 분식 장려에 넣지 않는 것입니까?
 
아리모토 쿠니다로우 과장은 "당신이 해결해보라"고 권유했고, 안도 모모후쿠는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국수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8년에 치킨라멘이란 상표의 인스턴트 라면이 일본에서 시판을 개시했다.
 

인스턴트 라면 발명자인 안도 모모호쿠 회장(일본 닛신식품)이 2006년 4월 12일 삼성동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5회 세계라면총회 참석 CEO 합동기자회견을 마친 후 부축을 받으며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안도가 새로운 형식의 라면을 개발했다고 해도, 밀이 풍부하지 않았다면 충분한 양의 라면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농업을 살리기 위한 원조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산 밀이 충분히 보급돼 있었기 때문에, 또 일본 정부가 '이걸 갖고 빵을 만들까 뭘 만들까' 고민할 정도로 그 양이 넉넉했기 때문에, 라면이 폭발적으로 생산되고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위 논문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구제국주의와 미국으로 상징되는 신제국주의의 결합체가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인스턴트 라면 산업을 일으키는 현상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5년 9월 15일부터 삼양라면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위 논문은 "삼양식품의 창업자 전중윤(1919~2014)은 1961년부터 일본의 라멘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 뒤 "전중윤은 미국에서 수입된 잉여농산물 밀로 이 사업을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타이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이완은 1945년부터 미국 잉여농산물을 도입했고, 이를 발판으로 퉁이기업이 1969년부터 인스턴트 라면을 시판했다. 대륙 출신 타이완인들이 대륙식 라면에 익숙해 있어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이 결국 자리를 잡았다.

인스턴트 라면은 이미 한국 음식이 되어 한국인 식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의 원조가 어디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인의 미각을 장악하게 된 국제정치적 배경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미군 주둔지에 대한 잉여농산물 원조를 통해 자국 농업의 판로를 확보하면서 현지 농업을 일정 정도 희생시켰던 미국의 신제국주의 정책이 동아시아 인스턴트 라면 산업의 발흥을 도왔다.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배경을 이루는 장면이 라면 한 그릇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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