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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괜히 살림을 더 잘하고 싶어 진다. 내년 육아휴직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살림하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가 같으면 아내가 장 봐올 것도 내가 자진해서 간다. 퇴근 직후의 한 시간은 몹시 피곤하지만 그래도 직접 가게 된다. 오늘 구입해야 하는 항목은 세 가지. 저지방 우유, 동물 복지 계란, 잡곡 식빵이다.

접이식 장바구니와 지역 화폐 카드를 챙긴다. 머릿속으로는 동선을 짠다. 현재는 맞벌이라 살림 부담이 반반이지만, 내년부터는 내가 주 살림 책임자가 될 것이다. 1학년 아이의 과제와 학교 일정을 챙겨야 하고, 필요하면 간식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빠듯할 테니 최적화된 쇼핑 동선은 필수다. 지역화폐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이번 달에 받을 수 있는 할인 한도를 점검했다. 절반 이상 남아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0% 할인은 굉장한 혜택이다. 동네 상인분께도 약소하나마 보탬이 될 수 있고.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지금은 휴직 생활 몹시 기다려지고, 나와 가족을 위해 살림을 꼼꼼히 챙기고픈 마음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취를 하던 이십 대 초중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집에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트에서 혼자 장 보는 것도 어색했다. 필요한 물건만 냉큼 사서 서둘러 나왔다.

그밖에 특이한 점은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종량제 봉지에다 담은 채 걷는 걸 무척 부끄러워했다. 모양이 빠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큰 백팩을 메고 가서 물건을 넣어왔다. 심지어 한 번에 다 들어가지 않을 때는 집에 들러 가방을 비운 뒤 다시 가기도 했다. 과거의 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이번에 구입한 판란
 이번에 구입한 판란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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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과거 생각이 난 건 오늘 마트 계산대에서 과거의 나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계란과 우유 계산을 마친 나는 결제를 마치고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있었다.

그 사이 내 뒤에 있는 사람이 계산 할 차례가 왔다. 품목은 1.5리터짜리 콜라 페트병 두 개. 점원은 그 사람에게 포인트 카드 번호를 입력하라고 했으나, 손님은 등록된 계정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포인트 적립을 해야만 원 플러스 원인데 부모님 카드 없어요?"

손님은 십 대 후반에서 많아 봐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점원은 콜라를 제값 주고 사면 아까우니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나 보다. 급기야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이 손님한테 번호 한 번 눌러 달라고 하세요(웃음)."

하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뻘 되시는 분이 악의 없는 말투로 말씀하시기에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순히 멤버십 번호만 눌러주면 되는 일이고, 개인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며, 아주 소액이나마 포인트도 쌓인다. 사소한 친절이라 여기면 귀찮지도 않다. 뒷사람은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혹시 점원의 의도를 오해했을 수 있으니 되물었다.

"제가 멤버십 번호를 입력하면 이 분이 원 플러스 원으로 사실 수 있다고요? 그럴게요."

끄덕끄덕. 점원은 '학생, 눌러준다잖아. 어여 사고 가' 같은 눈빛으로 뒷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곧 아니요, 아니요 하는 대답이 정확히 두 번 나왔다. 표정으로 봐서는 기분이 상했다거나 그렇다기보다는 어서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나는 왠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할인 조건에 안 맞으면 한 병만 사거나 다른 브랜드를 고르는 게 합리적이지만, 그러기에는 번거롭게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빨리 매장을 빠져나가고 싶다.

대학생 시절에 나도 행사하는 줄 알고 두부를 들었다가 특정 신용카드에만 할인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계산대에서 알았다. 당황한 나는 그 두부를 안 사겠다고 하고, 다른 두부를 골라오지도 않은 채 집에 왔다. 계산 줄을 밀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그런 실수를 한 사실 자체도 싫었다.

만약 지금의 내가 뒷사람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꾸벅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재빨리 계산을 마쳤을 것 같다. 앞사람이 흔쾌히 도와준다는데 쑥스러워할 까닭이 없지 않나... 이러면서. 적잖이 뻔뻔스러워진 건지, 생활력이 강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잘살고 있다.

나는 왼손에 30구짜리 판란을 들고, 오른손에는 우유 두 팩과 식빵이 든 장바구니 그리고 우산을 받쳐 들고 씩씩하게 걸어서 귀가했다. 이제는 백팩 따위 없어도 아치형의 달걀 머리가 훤히 보여도 아무렇지 않다. 살림하고 장보는 게 다 이렇지 뭐.

그나저나 큰 콜라를 내 돈 내고 구입한 지 참 오래된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탄산음료를 못 마시게 하니 자연스럽게 콜라와 멀어졌다. 내 뒤에 섰던 그 사람은 여러 가지로 옛날 생각이 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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