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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10일 전에 돌아가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
 선거 10일 전에 돌아가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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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깊게 생각하고 신속히 실천하는 행동파에 속한다. 임시정부와 민족운동진영의 분열상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중국의 혁명세력과 힘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꿈이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을 하면서 사귀었던 중국 지방군벌 오패부(吳佩孚)를 통해 한ㆍ중 합작 방법을 찾고자 했다. 오패부는 당시 장작림(張作霖)의 봉천군을 물리치고 직예계의 여원홍(黎元洪)을 총통으로 세워 베이징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오패부는 우리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이고 도움에 인색하지 않겠다는 의향을 보였다.

오패부와 같은 계열이다가 갈등을 빚은 풍옥상(馮玉祥) 장군과도 만났다. 그 즈음에 오패부와 풍옥상은 권력투쟁 중이어서, 더 이상 한국독립운동의 협력관계가 성사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신익희는 섬서성의 서안(西安)으로 갔다. 일본유학 시절에 만났던 호경익(胡景翼)이 섬서성의 독군(督軍)으로 국민당과 제휴하여 중국혁명 수행에 적극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호경익은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 크게 활약한 신익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면담한 자리에서 신익희는 3가지 방략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첫째, 군사적으로는 한ㆍ중ㆍ소 세 나라 청년으로 분용대(奮勇隊)라는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서 훈련시킨 뒤 중국 혁명에 이바지하고, 한인(韓人) 출신 일부는 동삼성으로 진출해서 점차 성장하면 한ㆍ중 국경에서 압록강ㆍ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넘어 들어가 군사 행동을 일으키자 함이고,

둘째로는 손문(孫文)의 국ㆍ공합작으로 인해서 중국 혁명군을 대표하여 그때 북경에 와 있던 소련대사 카라한과 절충하는 외교를 맡아 소련과 국민당 정부와 군벌 섬서성 도독 호경익과의 삼자(三者) 관계에 원만한 성과를 거두도록 노력하자 함이며, 

셋째, 중국 국민당의 중진 대천구(戴天仇)ㆍ장군(張群)ㆍ전동(田桐)ㆍ주도유(周道腴)ㆍ우우임(于右任)ㆍ거정(居正)ㆍ장계(張繼)ㆍ유수중(劉守中)ㆍ이대고(李大釗) 등과 교유하여 한ㆍ중 합작, 국ㆍ공 합작의 실을 도모하자 함이었다. (주석 5)

신익희는 특히 한ㆍ중 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를 편성하고, 임시의정원 출신 성주식을 북만주에서 초빙하여 중국국민군 제2군 육군중위에 임명하고 분용대 연성대장에 보임, 이 부대로 한ㆍ중 국경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키려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 카라한과 외교적인 접촉을 벌였다.

신익희의 역량을 익히 알고 있었던 호경익은 그를 자신의 자문역으로 위촉하는 한편 제2군의 육군중장의 직책을 겸하도록 하였다. 중국어는 물론 영어와 일어에 통하고 국제정세를 꿰고 있는 신익희의 존재가 그만큼 소중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익희는 중국혁명의 요인들을 두루 만나 교유하였다. 이는 뒷날 중경임시정부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는 인맥이 되었다. 손문의 비서 대천구(戴天仇), 신문화운동의 지도자로서 국공합작을 일궈낸 이대고(李大釗), 중국혁명의 책사인 장군(張群) 등이다.  

신익희가 호경익의 우호를 받으며 한중합작운동을 시작할 무렵 1924년 가을에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 실망과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지우(智友)를 만나 조국독립의 큰 설계를 하던 중에 당한 그의 죽음이었다. 

후계자로 등장한 악유준(岳維嶟)은 용속하고 우유부단하여 함께 일을 도모할 위인이 못되었다. 어느날 그가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요청하면서 창고에 은닉한 다량의 아편을 팔아 앞으로 살길을 찾자는 제안을 했다. 

악유준이 제딴에는 생각해 준다는 생색으로 "범칙 물자를 팔아 오면 구전(口錢)을 줄 터이니 받아서 권속 데리고 호의호식이나 하면서 여생을 편하게 지내라."는 말에 큰 모욕감을 느끼고 술잔을 그자의 면상에 내던지고 벌떡 일어서서 그대로 서안(西安)을 뜨고 말았다.

그래야 할 것이 그 당시 한 개 성(省)의 독군(督軍)이라면 사람 한 사람쯤은 죽이거나 살리고, 빼앗는 쯤은 다반사로 하던 중세사회였다. 이 때 집에 연락하고 떠날 겨를조차도 없이 떠나야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전파되어 갔다. 섬서성 일경(一境) 만이 아니고 중국 사회에서 해공의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혀를 내두르며 그 성품과 행실의 높고 맑음, 금전에 대하여 욕심이 없고 깨끗한 심성이 화제가 되었다. 성 정부의 자문위원과 제2군의 육군중장이라는 높고 큰 감투에 연연하지 않고, 미련없이 이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훌쩍 떠났다고 하는 데에서 많은 칭송과 찬양과 숭앙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주석 6)


주석
5> 신창현, 앞의 책, 161쪽.
6> 앞의 책, 166~1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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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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