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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2015년 여름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났다. 제주 이주를 앞두고 떠난 마지막 가족여행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대중교통을, 프랑스에서는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짤 때의 일이다.
 
여행코스를 두고 어디를 넣고 어디를 뺄지 고치기를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곳 중 하나가 프랑스 남부 레 보-드-프로방스 지역의 폐채석장을 개조해 만든 '빛의 채석장'이었다. 미술작품을 빛의 예술로 재창조해 보여주는 곳으로, 세계 각처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였다.

아쉽게도 이곳은 끝내 일정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제한된 시간에 그곳까지 가기에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았다. 관람객에게 독특한 예술적 체험을 선사한다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은 결국 여행일정에서 빠졌고 곧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잊고 있었던 미디어 아트를 뜻밖에도 제주에서 감상했다. '빛의 벙커'라는 미디어 아트 전시장이 성산읍에서 오픈한 것이다. 이곳은 원래 국가 기간통신망, 즉 한국과 일본, 한반도와 제주 사이에 설치된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시설이었다.

이 시설은 축구장 절반 정도 면적의 대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흙과 나무로 덮여 산자락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외부의 빛과 소리가 차단된 이 시설이 리모델링을 거쳐 미디어 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로 재탄생한 것이다.
 
빛의 벙커 구스타프 클림트 전 국내 최초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를 선보인 클림트 전의 한 장면.
▲ 빛의 벙커 구스타프 클림트 전 국내 최초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를 선보인 클림트 전의 한 장면.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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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00m, 세로 50m의 이 단층건물은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을 물색하기 위해 2년간 전국을 뒤진 끝에 찾아낸 최적의 장소였다. 2018년 가을 개관하면서 선보인 첫 상영작은 구스타프 클림트 전이었다.

프로방스에서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기에 개관 소식을 듣고는 기꺼이 성산까지 찾아갔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키스' '유디트' 등 클림트의 대표작이 빛으로 재창조돼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벽은 물론 천정과 바닥까지 온통 클림트 작품의 화려한 색조로 물들었다. 처음 보는 미디어 아트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두 살배기 손녀도 신기해서인지 좋아라 휘젓고 다녔다.
 
생애 첫 미디어 아트

미디어 아트라는 예술 장르를 생애 처음으로 경험했다. 사실 이런 형태의 예술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도 말만 들었을 뿐 어떤 내용인지는 정확히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신기한 첫 경험은 기존의 미술 감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빛의 벙커 내부로 들어서면 수많은 빔프로젝터와 스피커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온 듯하다. 우선 엄청나게 넓은 화면(?)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시야를 확대시켜 준다. 묵직한 사운드의 배경음악에 감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무엇보다 캔버스에 표현된 거장의 원작이 생명을 얻어 살아난 느낌이다. 정지된 풍경이 천천히 바뀌고, 캔버스 속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박제된 작품에 생동감과 현실감을 부여하는 마법을 부리는 듯하다. 미술관에서 원작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화려한 컬러의 작품일수록 미디어 아트 형식으로 감상한다면 즐거움이 배가될 것 같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클림트 전에 이어 고흐와 고갱 전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장료가 다소 비싸긴 하지만 이번에도 빛의 벙커를 찾았다. 저 유명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등의 작품이 화려한 빛의 연출로 눈앞에 펼쳐졌다.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반 고흐의 작품이 미디어 아트로 재창조돼 전시 중이다. 전시장 내부는 자유롭게 촬영이 허용된다.
▲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반 고흐의 작품이 미디어 아트로 재창조돼 전시 중이다. 전시장 내부는 자유롭게 촬영이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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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해바라기' 빛의 벙커에서 미디어 아트로 선 보인 고흐의 대표작중 하나인  '해바라기'. 사진 상단의 검정색은 전시장의 천정 부분.
▲ 반 고흐의 "해바라기" 빛의 벙커에서 미디어 아트로 선 보인 고흐의 대표작중 하나인 "해바라기". 사진 상단의 검정색은 전시장의 천정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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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여행 시 고흐가 1년간 지냈다는 작고 아름다운 전원도시 아를에 묵으면서 바라본 그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제주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1시간여 상영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흘렀다. 예술은 이렇게 재창조되나 보다.
 
빛의 벙커는 짧은 시간에 제주의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오픈한 지 2년 만에 백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엄청난 인기다. 프랑스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예술 장르를 제주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육지에서 손님이 왔을 때 궂은 날씨로 외출을 망설일 때면 주저 없이 빛의 벙커를 추천했다. 대부분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빛의 벙커 폴 고갱 전 반 고흐 전과 폴 고갱 전이 번갈아 미디어 아트로 전시돼 오감을 만족시켜 주었다.
▲ 빛의 벙커 폴 고갱 전 반 고흐 전과 폴 고갱 전이 번갈아 미디어 아트로 전시돼 오감을 만족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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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첨단예술

그런데 최근 애월읍 중산간에 또 하나의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 생겼다. 아르떼 뮤지엄으로, 스피커 제조공장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마침 집 부근이어서 개관 첫날 다녀왔다. 코로나19 방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랴 싶었는데, 예상외로 관람객이 많아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입장료는 빛의 벙커와 같은 수준이었다.
 
아르떼 뮤지엄에서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관람객들 빛의 벙커에 이어 제주에서 두번째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으로 오픈한 아르떼 뮤지엄 내부.
▲ 아르떼 뮤지엄에서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관람객들 빛의 벙커에 이어 제주에서 두번째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으로 오픈한 아르떼 뮤지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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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벙커가 특정 화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 아르떼 뮤지엄은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시공을 초월한 자연을 콘셉트로 10개의 전시공간에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선보였다. 시각적 강렬함과 감각적 사운드와 향기까지 가미해 독특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플라워(Flower), 비치(Beach), 워터폴(Waterfall), 스타(Star), 나이트 사파리(Night Safari) 등 10가지 주제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눈을 사로잡았다.
 
워터폴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금빛 폭포수가 눈앞에서 쏟아진다. 8m 높이에서 쏟아지는 웅장한 미디어 폭포는 14각 거울을 통해 무한 확장하면서 장엄한 공간 속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플라워 공간으로 들어가면 벽에서 꽃비가 쏟아져 내린다. 진짜 꽃밭에 와있는 듯하다. 나이트 사파리 앞으로 갔다. 고요한 밤이 내려앉은 사파리, 밤의 연주가 들려오고 기린 코끼리 사자가 천천히 지나간다. 마치 가상현실(VR) 체험을 하는 듯하다.
 
이외에도 기획전시공간인 가든에서는 제주의 자연과 서양미술사를 소재로 한 30분가량의 몰입형 미디어 아트쇼가 펼쳐졌다. 눈에 익숙한 제주의 자연풍경을 미디어 아트 기술을 통해 감상하는 맛도 특별했다.

아르떼 뮤지엄은 빛의 벙커보다 더 넓다. 바닥면적만 1400평에 높이가 10m에 달한다. 관람하는 시간만 2시간은 걸린 듯하다. 볼거리들이 다양하지만, 빛의 벙커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유명화가의 작품을 감상한다기보다는 첨단과학의 세계를 경험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제주에서 이런 첨단 예술의 세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빛의 벙커와 아르떼 뮤지엄이 경쟁하면서 발전했으면 한다. 더욱이 제주에는 이중섭 미술관이라는 훌륭한 콘텐츠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문화적 거점이 있으니 잘만 연계하면 문화예술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국가 기간통신망 관리시설과 스피커 제조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 리모델링을 거쳐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빛의 벙커 진입로(왼쪽)와 아르떼 뮤지엄 외관(오른쪽)
 국가 기간통신망 관리시설과 스피커 제조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 리모델링을 거쳐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빛의 벙커 진입로(왼쪽)와 아르떼 뮤지엄 외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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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제주가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섬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63빌딩보다 연건평이 훨씬 크다는 초대형 건물이 도심 한복판에 들어선다고 제주가 관광도시로 발전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문화예술의 자산이 풍성해져야 제주가 제주다운 발전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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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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