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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는 8월 14일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화단에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다.
 창원시는 8월 14일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화단에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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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의 친절도 성의도 영혼도 없는 답변을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심사 관련한 정보공개를 요청할 것이다." - 열린사회희망연대

"심사 대상이 수백 명이다. 불가피하게 포상 여부와 간략한 미포상 사유 중심으로 1차 심사 결과를 안내하고 추가 문의가 있으면 상세 안내한다." - 국가보훈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재심)했던 열린사회희망연대와 보류를 통지한 국가보훈처가 각각 이같이 밝혔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포상 신청(1차)했고,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포상 제외 결정 통지를 했다. 이에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자료를 추가해 올해 7월에 재심을 신청했으나, 보훈처는 8월 회신을 통해 보류 통지를 결정했다.

보훈처는 김명시 선생에 대해 "2019년 심사에서 1925년 8월 경남 마산에서 고려공산청여년회 가입, 1928년 6월 동방피압박민족반제대동맹 조직, 1929년 10월 북만주 길림성 아성현에서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 조직 등의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됐다"면서도 "광복 후 남한으로 귀국한 뒤 1949년 사망 시까지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행적 불분명의 사유로 보류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훈처는 "1949년 9월 신문 기사에서 김명시 선생이 모종의 혐의로 부평경찰서에 유치되었고,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소개되었던 점과 관련하여 선생의 마지막 활동이 확인되는 1949년 11월부터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보훈처는 "보류 사유에 관한 소명자료가 추가로 확인될 경우 가능하나, 이번에 제출한 자료는 이미 지난 심사에 반영되어 공적 재심사가 어려움을 알려드린다"고 설명했다.
  
김명시 선생은 누구?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되어 동방피압박민족반제대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팔로군에 들어가 항일 투쟁했다. 이후 테진, 베이징 등지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한 손에는 총과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운 그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김명시 선생은 광복 후 귀국했고, 1949년 10월 10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김효석 내무부 장관은 김명시 선생이 북로당 정치위원이고, 유치장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보훈처로부터 2019년 11월 회신을 받은 뒤, 1년 넘게 자체적으로 자료 조사를 벌였다. 이 단체는 국토통일원에서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1988년)에 근거해 "김명시 선생이 북로당 정치위원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 김명시 선생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동조했는지에 대해, 이 단체는 "북에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을 보면 김명시 선생과 같은 시기 남쪽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활동가들이 여럿 있지만, 거기에 김명시 선생은 없다"고 설명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부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던 김명시 선생의 당시 혐의와 행적 등을 파악하기 위해 경기경찰청에 공문을 보냈고, 경찰로부터 '자료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명시 선생의 광복 후 행적에 대해, 이 단체는 "당시 당국의 주장대로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제 앞잡이였던 친일경찰에 고문을 받는 것에 치욕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며 독립운동 행적은 너무나 뚜렷하기에 포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보훈처가 2019년 11월 낸 김명시 여장군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안내' 통지문.
 국가보훈처가 2019년 11월 낸 김명시 여장군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안내" 통지문.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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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장군은 북로당 정치위원 아냐"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해 보훈처에 재심 신청을 했던 것"이라며 "새로운 소명자료를 추가로 확인했다. 이 새로운 사실은 심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김 고문은 "북한 정권 수립에 공로가 있는 남쪽 사람들의 묘가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에도 김명시의 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재심신청 때 적시했다"며 "간접적이지만 김명시 장군이 북의 정권 수립에 뚜렷하게 기여한 바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두 가지는 1차(2019년 1월 19일) 신청에서는 없었고, 2차 때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었다. 당연히 재심 때 참고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재심도 하지 않고 1차 때와 비슷한 답변을 보내왔다"며 "이에 담당 공무원에게 구체적인 재심 불가 사유를 질의했는데 깜짝 놀랄만한 답변을 받았다. 이미 1차 심사 때 심사위원들이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심사를 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보훈처는 1차(2019 11월 7일 회신) 때 심사 탈락 사유를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이라는 딱 13자뿐인 회신을 보내왔다"며 "신청 후 11개월이나 기다린 국민에게 국가는 무성의한 회신을 보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심 신청에 대한 회신 역시 문장만 길었을 뿐 1차 답변과 다를 바 없었다"며 "보훈처가 회신에 단 한 두 줄만이라도 김명시 장군의 직책과 사망에 이르게 된 피의사실 불분명, 사망 직전 약 2년 3개월간의 행적 불명 등을 적시해 줬다면 상호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영만 고문은 "우리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1년 넘게 자료를 찾아 헤맸다.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북한 로동당 창립대회와 2차대회 자료를 입수하여 확인했던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며 "국가가 국민에게 아주 작은 배려만 해 주었더라면 그 결과에 대한 실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보훈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이상, 보훈처의 성의도 영혼도 없는 답변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심사위원들이 우리가 재심 신청 때 냈던 자료를 1차 심사에서 알고 심사를 했는지에 대한 사실을 확인코자 정보공개를 요청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2021년 8월, 김명시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재심요청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회신문.
 2021년 8월, 김명시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재심요청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회신문.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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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추가 문의 있을 경우 보다 상세히 안내"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는 활동 당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진행하고, 국내·외 독립운동과 광복 전후 행적 자료 등을 수집‧분석하고 있다"며 "다만 2019년 공적심사 이후 국가보훈처가 확보한 자료에서 김명시 선생 관련 추가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회신 내용과 관련해선 "3·1절, 광복절, 순국선열의날을 계기로 보훈 심사가 진행된다. 매번 심사 인원은 수백 명 수준에 이른다"며 "이에 불가피하게 1차적인 심사결과 안내는 포상 여부와 간략한 미포상 사유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이후 추가 문의가 있을 경우 보다 상세히 안내해 드리고 있다"고 해명했다.
  
김명시 선생 유족 등과 관련해, 보훈처는 "포상여부와 훈격 등의 결정은 일제강점기 생산된 판결문이나 신문 등 객관적인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공적과 행적 관련한 객관적인 자료의 조사·확인을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복 이후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다면 독립유공자로 유리한 해석을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은 역사학계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절차로, 심사대상자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결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0월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화단에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다. 그러나 트럭이 후진하다 표지판을 들이받아 파손되면서, 창원시가 2020년 8월 동판 형태로 표지판을 새로 만들어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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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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