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9 11:37최종 업데이트 21.08.2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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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세기에도 중국의 급부상이 전 세계 많은 지역을 진동시켰다. 612년 을지문덕에게 일격을 당한 수나라가 618년에 사라진 뒤, 당나라가 주변을 향해 중국의 힘을 과시했다. 중국이 팽창하는 이 현상은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 대륙에서 아프리카·유럽·중동·인도를 제외한 여타 지역에 거의 직접적인 파급력을 끼쳤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2008년 이후로 미국과 더불어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이로 인한 파급력은 아프로-유라시아뿐 아니라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 대륙에도 전달되고 있다. 7세기에 당나라가 끼친 영향은 아프로-유라시아의 일정 지역에서 주로 나타났다. 그래서 당나라의 급부상으로 인한 파급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급부상으로 인한 파급력보다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접한 지역들의 입장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급부상보다 당나라의 급부상이 훨씬 위력적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갑'의 위치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가운데서 급부상하고 있다. 당나라가 대두될 당시에는 중국 주위에 그런 '갑'이 없었다. 고구려가 중국을 견제할 만한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고구려가 '갑'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민족들이 볼 때는 당나라의 급부상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급부상보다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의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역사무대로 뛰어나온 인물들이 연개소문과 김춘추다. 이들은 협력 모색하고 대결도 벌이면서 이 시대 역사를 이끌어갔다.

연개소문 vs. 김춘추

이들이 역사무대에서 부딪힌 것은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태왕(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태왕(보장왕)을 옹립한 642년 하반기 이후였다. 연개소문 집권 얼마 뒤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했다가 투옥된 뒤 극적으로 풀려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춘추가 방문한 것은 신라와 고구려의 나여동맹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춘추가 갇히게 된 것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인 조령-죽령 라인 이북의 연고권 때문이었다. 조령-죽령 이북은 본래 자국 땅이었다면서 고구려가 동맹의 조건으로 그 땅을 요구했던 것이다. 김춘추가 요구를 거절하자, 사신인 그를 감금하는 강경 조치가 나왔던 것이다.

김춘추가 동맹 체결을 추진한 동기 중 하나는 개인적 원한에 있었다. 642년 음력 8월인 그해 양력 8월 3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서 백제 군대의 대야성(합천) 침공으로 딸 고타소와 사위 품석을 잃은 것을 복수하고자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동기는 백제의 압박으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었다. 의자왕 즉위 이듬해인 그해 음력 7월(양력 8월 1일~30일) 한 달 동안에 신라가 백제에 빼앗긴 성만 해도 무려 40개를 넘었다.

당나라발 진동이 국제질서를 동요시키는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를 압박했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발등의 불을 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 김춘추를 연개소문이 감옥에 가뒀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김춘추가 한층 더 절박하게 동맹을 찾아다니는 원인이 됐다. 그는 647년에는 일본을 방문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때도 퇴짜를 맞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역시 잠시나마 인질이 됐다.

그가 목표를 이룬 것은 648년에 당나라 태종(당태종)을 방문했을 때다. 이로 인한 나당동맹의 결성은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을 낳았다. 642년 하반기 이후에 평양에서 일어난 '날갯짓'이 660년부터 668년 사이에 거대한 '태풍'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날갯짓에 영향을 끼친 제3의 인물이 있다. 연개소문·김춘추와 더불어 이 시대를 풍미한 전략가인 부여성충이 바로 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660년 백제 최후의 순간에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바로 그 성충이 평양에서 일어난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일에 깊이 개입돼 있었다.

전략가 부여성충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등장한다. 신채호는 구한말 때만 해도 한국에 있었지만 그 뒤 사라진 <해상잡록> 등을 근거로 이 시대 역사를 보충했다.
  

백제 어전회의 장소 복원품. 충남 부여시의 백제문화단지에서 촬영. ⓒ 김종성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백제 왕족 출신인 성충은 641년 의자왕 즉위 뒤에 정권 핵심부로 발탁됐다. 이때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대야성 침공이다. 이 전투로 인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목숨을 잃고 김춘추가 동맹 외교에 뛰어들게 됐으니, 부여성충과 김춘추의 악연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부여성충이 김춘추의 평양 방문 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고 <조선상고사>는 말한다. 김춘추가 나여동맹을 체결하고자 평양에 갔을 때, 부여성충은 여제동맹을 체결하고자 의자왕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갔던 것이다.

부여성충과 연개소문의 협상은 순조로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협상 타결을 낙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갑작스레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조선상고사>는 "동맹조약이 거의 성사될 단계에 접어들 때였다"면서 "갑자기 연개소문이 성충을 멀리하고 몇 달 동안 만나주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이상하게 여긴 성충이 탐지해보니, 신라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방해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신채호는 썼다.

김춘추는 배짱도 좋고 언변도 좋았지만, 외모로도 관심을 끌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를 잡아가둔 왜국인들도 '용모와 얼굴이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당태종 역시 호감을 표시했다. 당나라인들과 일본인들의 반응을 보면,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인들 역시 좋은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것이 협상에 긍정적 효과를 미쳤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춘추로 분한 유승호 ⓒ MBC

 
연개소문은 성충과의 협상보다 김춘추와의 협상에 마음이 쏠렸다. 여제동맹보다 나여동맹 쪽으로 구미가 당긴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협상을 진전시켰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성충이 상황에 개입한 것이다. 이는 김춘추가 고립되고 투옥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판을 뒤집다

판을 뒤집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성충의 편지였다. 서신에서 성충은 "명공(明公, 2인칭 존칭)께서 당나라와 싸우지 않는다면 모를까, 만일 당나라와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서국(西國, 당나라 지칭)이 고구려를 칠 때에 항상 군량미 부족으로 패했습니다. 수나라가 좋은 사례입니다. 만약 백제가 당나라와 연합한다면, 당나라는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략할 뿐만 아니라 해로로 백제에 들어와 백제의 쌀을 먹으면서 고구려를 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는 남북 양쪽에서 적을 상대하게 되니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가 이곳으로 군대를 수송하는 것은 백제로 수송하는 것만 못합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볼 때 평양 정권을 공격하는 데에 서라벌 정권보다는 사비 정권과의 동맹이 더 유용하다는 논리였다. 연개소문 당신이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따돌리면 백제와 당나라가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위협이 깔린 정세 해설이었다.

정세 해설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이 편지를 받고 연개소문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그는 조령·죽령 이북 땅을 내줄 수 있는지를 김춘추에게 타진했다. 김춘추가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자신의 의사를 매우 명확히 표출했다. 단순히 협상을 중단시키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김춘추를 가두기까지 한 것이다. 고구려가 누구를 택할 것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성충)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오게 됐다"고 <조선상고사>는 말한다.

성충은 대야성 침공을 기획하고 실현시킴으로써 김춘추가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 또 평양에서 벌어진 외교 무대에서도 김춘추를 따돌리고 백제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동시대 라이벌인 연개소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또 다른 라이벌인 김춘추와는 한층 더한 악연을 쌓게 된 것이다.
 

서기 6세기 전반에 양나라를 방문한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라는 그림의 일부. ⓒ 퍼블릭도메인

 
'갑'의 견제 없는 당나라의 급부상이 두려움을 자아내던 시기에 부여성충은 정세 판단과 설득력으로 백제를 지켜나갔다. 연개소문 및 김춘추와의 지략 대결에서 그는 앞서면 앞섰지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적들의 참소로 인해 의자왕의 의심을 사고 감옥에 갇혀 죽게 됐다. 이 때문에 그는 역사무대에서 갑자기 하차하게 됐다.

성충을 버린 이후의 백제는 중국발 혼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 물론 성충이 없어서 백제가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충의 반대파가 일부러 성충과 정반대의 전략을 고수하다가 화를 자초했으니 백제 멸망은 성충 숙청과 관련이 없지 않다.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탄식을 남길 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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