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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중국 모두 이념보다는 국가의 생존을 선택해

과거 역사를 보면 자신의 이념이나 정치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국가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1980년대 이후 어려움에 처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국가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하였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이념보다 국가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이런 지도부의 속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네일 로빈슨(Neil, Robinson)의 저서 <소련 붕괴(Explaining Soviet collapse)>에 따르면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이데올로기, 일당체제, 공포정치, 관료에 의한 경제 통제, 언론장악, 군국주의 등이 서로 보완해줄 때 제대로 작동하는데, 이중 하나라도 붕괴되면 전체 사회가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전체주의 사회는 그 경직성으로 인해 체제 위기 상황에 있어서도 개혁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하지만 반대 견해에 따르면 전체주의 국가라도 국가 자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시스템을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기계적인 성장 이후 경직성으로 위기에 직면

피터 터친(Peter Turchin)의 저서 <전쟁과 평화 그리고 다시 전쟁(War and peace and war)>에 따르면 강력한 제국은 번영을 통해 인구증가와 과잉인구, 1인당 소득의 감소를 순차적으로 경험한다. 처음에는 저임금을 활용하여 상류층이 증가하지만 상류층의 인구와 탐욕이 증가하면 생활수준이 열악해진 일반 대중의 불만이 증가한다.

엘리트들은 국가에 의지해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가의 지출을 늘리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은 악화된다. 국가 재정이 파탄나면 군대와 경찰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대해진 엘리트층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빈곤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근과 전쟁, 전염병을 거친 후 평민과 엘리트의 인구 모두가 감소해 내부 경쟁이 쇠퇴하여 안정과 평화가 찾아오면 새로운 제국이 탄생한다. 피터 터친의 이러한 분석은 소련의 붕괴 과정에 비교적 부합된다.

개인의 자유 탄압, 만성적인 재정적자, 소비재 부족으로 사회주의 위기

소련과 중국 모두 사회주의가 먼저 실패한 이후 국가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 소련이나 중국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투입과 산출이 비례하는 일차원적인 경제성장이 끝난 이후 발생한 경제침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경공업의 후진성으로 인해 생필품이 부족하고 개인적 자유가 억압되어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져 갔다. 소비품의 수입 대금으로 쓸 외화가 부족하여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서방의 경제적 봉쇄와 정치적 공작은 사회주의 국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대내외 조건에 대응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을 거친 소련,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개혁과 개방 정책을 수용하였다.

닯은꼴인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 운명은 엇갈려

고르바초프는 1980년 초반부터 캐나다, 영국 등 서방을 자주 방문하면서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들이 고르바초프에게 면담을 요청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개혁의 상징이었다. 반면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에 따른 국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기꺼이 연대할 의사가 있었다. 특히 두 지도자 모두 국내의 민주화 시위와 소수민족 독립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해서 적대적인 양국 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합의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국가자본주의적 경제운영 방식을 수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는 사회주의시장경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국영기업의 독립채산제, 소규모 사기업의 인정, 부분적인 민영화, 시장의 확대,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투자 유치, 화폐사용의 확대, 무역의 개방 등은 중국의 개혁정책과 동일하였다. 고르바초프 역시 당과 국가를 구별하고 국가기관의 지위를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중국, 개혁개방의 후유증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면서 천천히 시행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성공한 반면 고르바초프의 개핵개방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소련공산당은 사라지고 소련은 붕되되었다. 소련의 붕괴에 대해 "체제의 한계로 인해 불가피했다"는 근본주의적 관점과, "체제의 한계가 있더라도 그것을 수정하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에 소련 붕괴는 불가피하지 않았다"는 진화론적 관점이 있다. 소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하려는 의사가 분명하였다.

무엇보다 중국은 소련과 달리 개혁과 개방을 전당적으로, 또한 전국가적으로 토론하면서 서서히 시행하였다. 덩샤오핑 주석은 마오쩌둥 사후 실권을 장악한 1978년부터 1993년 퇴임할 때까지 전당적 토론과 전국가적 토론을 통해 6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법제화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의 공산당으로부터 독자성 인정, 1인 지배체제 금지, 사회주의법치 등이 정립되었다.

반면 소련의 개혁과 개방은 1985년 마지막 혁명세대인 체르넨코가 사망하자마자 권력을 잡은 신진엘리트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경제부문과 정치부문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체제전환이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체제전환으로 인해 엘리트의 개혁, 대중들의 급진적인 요구,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혼재되어 충돌하였다. 

소련, 경제개혁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민주화 도입으로 정치혼란 초래

체제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불만과 저항을 중국의 엘리트들은 극복한 반면 소련은 신구 엘리트로 분열되어 극복하지 못하였다. 고르바초프는 경제적 성과가 나기도 전에 정치적 민주화를 먼저 허용하여 경제 불만이 바로 정치적 불안으로 전환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달리 정치적 민주화가 아닌 경제 개혁과 경제적 자유를 먼저 도입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덩샤오핑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 개혁과 경제특구를 먼저 시범적으로 실시하여 개혁과 개방의 충격을 최소화하였다. 반면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하는 고르바초프 방식은 경제개혁 이후 정치개혁을 점진적으로 하고자 하였던 중국의 방식에 비해 불만과 혼란을 통제하는 데 더 큰 난관을 조성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민주화 시위에 대해 초기에 유혈 진압하면서 당근과 채찍 정책을 구사하였다. 1989년 4월 전 공산당 총서기 호요방이 사망하자, 애도활동이 천안문 광장의 학생소요로 발전하였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6월 천안문 사태를 앞두고 30만여 명의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개혁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이붕은 당 중앙을 대표하여 부분적으로 계엄을 실시하여 진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베이징 소요와 당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서기 자오쯔양을 퇴임시켰다. 장쩌민은 같은 해 11월 13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제3대 지도집단의 핵심이 됐다.

1993년 헌법은 천안문 사태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개방의 원칙을 재확인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이 1992년 결정한 사회주의초급이론과 사회주의시장경제론을 선언하였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동유럽과 소련 내의 자유화 시위를 방치하였다.

중국, 1인 독재 금지와 세대교체 및 권력교체 등을 사회주의법치로 제도화

덩샤오핑 이후 중국에서 공산당의 정년제, 고위직 국가공무원의 연임금지로 인해 10년마다 당과 국가의 지도부가 교체되었다. 당과 국가는 전현직 지도부들의 주거와 사무실을 베이징의 중난하이 지역에 집중시켜 집단 토론을 일상화시켰다.

정치엘리트들을 청년 시절부터 육성하여 정치국 상무위원의 세대교체를 안정화시켰다. 상해방, 공청단, 태자당 등의 공산당 내 파벌 경쟁은 일당독재 내에서 제한적이지만 정권교체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반면 소련의 경우 말기에는 지도부의 노쇠화로 인해 1인자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후계 문제로 인해 중앙권력의 혼란이 빈발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를 보좌하다 체르넨코 사후 갑자기 개혁파의 수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대학 법학과 졸업한 후 최연소 정치국원과 당 내 2인자인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를 지냈지만 실질적인 경험이 부족하였다. 

소련, 세대교체 실패와 집단체제 붕괴 및 중앙 관료제로 인해 정치혼란

소련 공산당은 1990년 헌법에 의해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개별공화국의 엘리트들, 민족주의자들, 자유를 갈구하는 인민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의 공백을 보완할 지도 중심이나 정치적 대중 주체가 없었다.

개별 공화국의 공산당 조직과 당원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몰입되어 연방을 수호할 의지가 없었다. 구 엘리트를 대변하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붕괴가 아닌 개선을 추구하였지만 신엘리트들은 옐친처럼 소련 자체를 지배도구로 인식하였다.

소련 붕괴를 저지하려는 고르바초프는 옐친과 달리 최고인민회의에서 간접 투표로 당선된 체육관 대통령이라서 대중적 지지층을 갖지 못하였다. 관료제에 포위당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해체를 막을 민주적이고 역동적인 대중주체들을 조직할 역량이 없었다.

중국, 한족 중심으로 당근과 채찍으로 소수민족 문제 대처

중국은 소수민족 밀집지역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예를 들어 1990년까지 타림강 댐 건설을 하면서 위구르에 한족이 대거 이주해왔다. 이러한 방식은 민주화시위가 잦은 홍콩에도 적용되었다. 한족들은 지역주민으로서 지역 권력을 장악하고 소수민족을 한족 문화로 흡수하여왔다.

중국공산당은 역사 정립 사업인 공정사업을 통해 중국사회주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소수민족들을 한족에 문화적으로 복속시켰다. 공정사업은 중국의 고대사를 미화하는 단대공정, 탐원공정 이외에도 베트남 방향의 남방공정, 몽골 방향의 북방공정, 티베트 방향의 서남공정, 신장위구르 방향의 서북공정, 만주 방향의 동북공정을 포함하였다.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였으나 1958년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귀족들과 대기근에 항의하는 티베트 인민들이 봉기를 하자 유혈 진압하였다. 서방은 망명한 달라이 라마를 지원하고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는 등 중국 분열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89년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벌어진 독립 시위를 강경 진압하였다.

러시아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급조된 소련, 러시아조차 연방에 불만

사회주의가 발전하면 인종과 언어, 민족과 문화가 달라도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할 수 있지만,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처음부터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인위적인 통합이었다.  소련연방에서 가장 먼저 탈퇴한 발트3국의 예에서 보듯이, 소련의 개별공화국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 조국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연방으로 묶인 것이었다.

특히 소련은 폴란드처럼 과거 러시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나라들에게 소련을 위한 완충국가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소련의 힘이 약해질 때 언제든지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소련이 강력할 때에도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서 소련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봉기가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경우 언제든지 중앙권력이 느슨해지면 연방이 해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개혁의 경제적 효과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공화국과 개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자, 이들은 소련 연방 자체를 불만의 표적으로 삼았다.

각 공화국의 일반 인민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경도되어 연방 체제를 소멸되어야 할 지배기구로 인식하였다. 특히 러시아 사람들은 연방체제에서 러시아가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연방에서 이탈하고자 하였다. 각 공화국의 공산당들도 연방보다는 개별 공화국의 주권을 더 선호하였다.

소련을 유지하고자 한 세력은 연방 중앙의 최고위 관료나 이미 붕괴된 구 공산당의 간부들을 제외하면 전체 인민 중에서 소수에 불과하였다. 소련 중앙의 기득권 세력이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과거 체제를 복원하려고 하였지만 각 개별 공화국의 엘리트들과 주민들은 오히려 이에 저항하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뒤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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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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