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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진베리팜’ 김효선 대표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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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백일홍이 붉은 황토기와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다. 서산에서 고북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약 10분가량 시골길을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그곳에 '우진베리팜' 김효선 대표가 살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 속에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 집을 발견하고, 걸어서 한 바퀴 휘 돌아볼 요량으로 차에서 내리자 언제 달려왔는지 하얀 거위 두 마리가 집 주인인 양 정원을 막고 서 있었다.

쭈뼛 쭈뼛하는 모습에 "괜찮아요. 아직 아기들이에요. 환영합니다." 언제 나왔는지 김 대표가 달려와 반긴다. 조금은 전통적이면서도 또 어찌 보면 살짝 이국적인 멋이 깃든 조경수들이 호위무사가 되는 양 집안을 지키고 서 있는 곳.

뜨거운 햇살이지만 작게나마 가을빛 바람을 몰고 온 지난 15일, '우진베리팜' 김효선 대표를 만나 블루베리를 만나서 결국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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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백나무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난다는 김효선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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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터를 잡고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오셨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다.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 어릴 적 얘기도 함께 들려달라.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부모님이 계시니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에서 1만 평 규모에 조경수를 심어 사업을 하신 분이다. 2남 1녀 중 장남인 나는 초·중학교를 집 가까운 곳으로 다니며 아버지가 관리하는 나무들을 보며 자랐다.

자식 같은 나무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가시곤 하셨는데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의아해서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신경을 쓰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함께 고민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만큼은 당신의 힘들고 어려운 일만은 시키지 않고 싶어하셨으니까. 

일찍부터 조경을 시작했던 부모님 덕분에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늘 현금이 마르지 않은 집에 속했다. 그 덕에 나는 이웃 동네인 홍성고등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그 후에는 공무원 시험준비를 꽤 오랫동안 준비했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남매도 출산했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부모님 덕분에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 그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과 참고 살아준 아내가 참 대단하다. 그럼 하던 공부는 어떻게 됐나?
"물론 나중에는 접게 됐다. 마음처럼 공부가 잘 안 되어 방황하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바쁜데 사람이 없다. 커튼일 좀 도와달라'는 SOS를 받았다. 이참에 머리도 식힐 겸 추석 전 보름 동안 친구네에서 일을 도와주게 됐는데 당시만 해도 인터넷 발달이 보편화 되지 않을 때라 장사가 엄청나게 잘 되는 걸 봤다. 더구나 15일이 되자 친구가 아르바이트비라고 돈을 주는데. 내 생애 처음 땀 흘려 벌어본 돈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친구네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다 IMF가 터졌고 그때부터 월급이 몽땅 날아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란한 나머지 그래도 커텐일을 해 봤다고 권리금 없는 아파트 상가를 얻어 가게를 오픈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골들이 꽤 많이 늘었다. 사실 그때는 이미 침구류 및 커튼 가게들이 사양산업일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큰돈은 못 벌어도 그냥 먹고사는 것은 할 수 있겠다' 싶어 개의치 않고 열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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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베리 농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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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접한 것이 침구류 및 커튼 가게였는데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됐나?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잘 됐다. 한 번씩 농담으로 '나는 남의 집 안방 침대에 올라가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면 다들 자지러지며 배꼽을 잡는다(웃음). 사업은 순조로웠다. 아내는 매장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나는 좀 더 나아가 전국에 신축아파트마다 두 달 정도씩 '구경하는 집'을 열었다. 인터넷쇼핑으로 구매하던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던 시절이었으니 2008년 9월 15일까지는 무리 없이 잘 성장했다.

그러다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른바 '리먼사태'로 인해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강한 리스크 국면에 노출됐다. 사람들은 아파트입주를 하지 못했고 그러면서 신축아파트를 상대로 하던 사업체들이 일순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하던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구경하는 집'은 당진에서 끝이 났다.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퍼뜩 떠오른 것이 몇 해 전에 심은 블루베리 수확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로하신 부모님도 걱정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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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업인 조경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김효선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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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한 것이 아버님이 하시던 조경수는 어떻게 하고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나?
"예산이 고향인 서울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의 고향 집으로 초대를 받아 내려갔는데 집 뒤 야산에 어린 사과나무가 가득 심긴 걸 발견했다. 그때는 '아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4년 후 그 집에 다시 가니 어린나무였던 과실수가 어느새 자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번개를 맞은 듯 아득했다.

'나는 4년 동안 뭘 했나?' 싶었다. 물론 조경수를 키우기 위한 묘목재배를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이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뭘 심지?' 고민하다가 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젊음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진다는 생각에 안토시아닌과 항산화질, 그리고 식이섬유가 많은 젊음의 열매 '블루베리'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우리나라 땅은 산도가 6~7 정도 나오는데 블루베리는 4~5로 최적지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주로 맨땅에 심으면 2~3년 안에 죽으니 주로 화분에 심어 키우는 집들이 많았다. 무슨 심보인지 내가 하면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받은 것도 없이 무작정 200그루 정도의 블루베리를 야산에 심기 시작했다. 때로는 두더지가 헤집어 놓을 때도 있었고 새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는 만능 비법도 스스로 체득하게 됐다."

- 단기간에 독학으로 블루베리 박사가 되다니 정말 대단하다. 소문으로는 측백나무 박사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측백나무 박사란 별명은 늦깎이 조경수를 키우시는 분들이 붙여준 거다. 아버지께서는 내 나이 10살이 되기 전부터도 백일홍, 측백나무 등을, 특히 주목은 산 전체에 심으셨다. 나는 그걸 물려받아 사업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어린 눈에 측백나무를 키우시던 아버지 모습까지 합하면 근 50년 정도 된다.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시키는 일만 하다 보니 잘 보이지 않은 것들이 부모님 편찮으시고 또 내가 맡아서 하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척 보면 어디가 어떻게 병든지를 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언제부턴가 측백나무에 병이 나면 어떻게 알고 전국에서 문의를 해와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지금은 일반 측백류는 5000그루, 미측백나무는 4000그루 있다. 나무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난다. 이 나무로 3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 내셨다. 또 이 나무가 밑천이 되어 나의 시골살이가 강퍅하지 않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애지중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블루베리 농사를 짓는 분들이 가장 힘든 게 새들이다. 그걸 해결했는데 비법을 가르쳐줄 수 있나?
"물론이다. 함께 잘 되면 기꺼이 오픈할 수 있다. 나도 한때는 새들 때문에 수확을 포기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 오죽했으면 유튜브를 보고, 책을 사다 읽었을까. 하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특히 내가 기르는 블루베리는 유난히 당도가 높다 보니 새들에게는 표적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재봉틀 실이다. 이걸 몇 가닥씩 쭉쭉 늘어서 이어놓으면 새가 열매를 먹으러 왔다가도 걸려서 도망을 못 간다. 그 모습을 보곤 다른 새들이 얼씬도 하지 않더라. 새 몇 마리만 희생시키면 100% 안 오는데 정말 놀랍고 신기했다.

비법을 물었나? 블루베리를 사 드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당도가 너무 좋다고 해주셔서 보람있다. 나는 좀 선선해지는 10월이면 미생물이 배양된 물을 준다. 이 비법 또한 온전히 혼자서 인터넷을 참고하고 책을 보면서 체득했다. 엊그제 90이 넘은 동네 어르신께서 그러시더라. '젊은 사람들 시골 내려와서 융자받아 하우스 짓고 뭘 한하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여. 자고로 농사일이란 게 본인이 직접 해보고 몸소 체득해야지 말로만 백번 해봐야 소용없지.'"

- 수확을 하더라도 판로 때문에 걱정이 많을 텐데 판로는 어디로 어떻게 하나?
"현재 3000평 정도에 블루베리가 심겨 있다. 판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아니 물량이 달려서 다 못 줄 때가 제일 미안하다. 서울 우리 매장에서 판매한다. 당도가 워낙 높아서 다른 곳과 차별이 있다 보니 한번 산 고객들이 또 주문하고, 이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문들을 해 주신다.

올해 같은 경우 택배 물량이 너무 많은데 블루베리가 없어서 못 보내드렸다. 서울 매장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더라. 어떤 분이 '우리 딸이 임신했으니 제발 한 팩만 좀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주문한 것부터 줘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못 드린 게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그때 '아, 블루베리 때문에 인심 잃겠다'고 행복한 고민을 다 해봤다. 어쨌든 당도와 새 피해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더구나 판로 고민까지 걱정 없다. 그래도 하나 고민은 수확 철 인부 구하는 일에만 더 신중을 기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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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선 대표 자택 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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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 인부들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던데?
"우리라고 별수 있나. 그동안에는 주로 태국 아주머니들을 썼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돈을 더 줘도 쓸만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 애를 먹었다. 설상가상으로 미리 계약한 팀도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결국 가족들과 친인척 도움으로 무사히 수확할 수 있었다. 요즘 농가에서는 인건비를 올려 줘도 쓸만한 사람을 못 구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걸 아셨는지 83세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너무 벌리지 마라. 일 더 벌이면 집 나갈 거다'라는 귀여운 협박을 다 하셨을까.

2만 평에 조경수와 함께 블루베리나무를 심었지만, 막상 수확하려니 딸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큰 근심이다. 지금쯤 하늘나라에 계실 두 분이 내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그러니까 제발 벌리지 말라 했지'라고 다시 혀를 차시지는 않으실까."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조생종 블루베리를 가지고 있다. 조생종은 품질면에서 뛰어나고 추위에 강하며 병충해도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것은 은행과 돼지감자 삶은 물을 두세 번 주고 나면 그해 병충해는 안녕이다. 이렇듯 땅은 노력한 만큼 열매로 보답해 준다.

얼마 전 공공부문 전체 인건비가 국내 대표 500대 기업의 인건비보다 3조 6000억이 많다는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취준생 32%가 공무원이 되겠다고 준비하고 있단다. 전문가들은 '첨단 기술에 뛰어들 젊은 인재들이 공무원에 쏠리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나도 한때는 공무원이 되고자 오랜 시간 공부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그 후 사업도 해봤지만 결국 먹거리 만한 게 없다는 결론을 냈다. 하여, 취준생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이제는 조금만 생각을 바꿔 다시 농촌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답해 주는 게 흙이다.

농촌에서 함께 고민하고 현실을 타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꿈을 펼치며 잘 먹고 잘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미래산업 먹거리에 투자해야 하는 게 정답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김효선 대표, #우진베리팜 김효선 대표, #블루베리, #조경수, #측백나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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