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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거나 골목 안을 거닐다 보면 집집이 자투리땅과 화분, 양동이 심지어 스티로폼 상자에까지 키워 먹는 농작물이 있었으니 바로 '고추'다. 고추는 익히거나 가공하지 않고도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각종 채소나 고기, 생선 요리에 빠질 수 없는 양념으로도 긴요하게 쓰인다. 무엇보다 빨갛게 잘 익은 것을 말려서 가루로 빻아 보관했다가 오래 두고 먹을 김치와 고추장 담글 때, 그 쓰임새의 극치를 보여준다.
 
벌써 도로나 평상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광경이 목격된다. 큰 규모로 농사짓는 분들은 고추 꼭지를 딴 채 수확해서 세척 후에 건조기에서 반건조 후 마당에서 건조를 한단다.
 벌써 도로나 평상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광경이 목격된다. 큰 규모로 농사짓는 분들은 고추 꼭지를 딴 채 수확해서 세척 후에 건조기에서 반건조 후 마당에서 건조를 한단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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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밖에 나가 보면 벌써 첫물 딴 홍고추 말리는 풍경이 심심찮게 보인다. 직접 농사지은 걸 수확한 댁이 있을 테고, 먹을 만큼만 사다가 말리는 댁도 있을 터다.

건조기를 쓰거나, 건조기에 말린 것을 사다 쓰면 그만인 것을 날마다 널고 걷고를 반복하며 고추를 건사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뭘까? 며칠 전, 저녁 산책길에 나섰다가 궁금했던 해답의 힌트를 살짝 얻게 됐다.
 
흰 원 안의 해충이 '고추 노린재'다. 정확한 이름은 '꽈리허리노린재'라고 하며, 고추 탄저병을 유발한다고 한다.
 흰 원 안의 해충이 "고추 노린재"다. 정확한 이름은 "꽈리허리노린재"라고 하며, 고추 탄저병을 유발한다고 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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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산책 코스를 따라 걷다 보니, 할머님 한 분이 텃밭에서 괭이질을 하는 중이셨다. 모기에 뜯겨가며 늦은 시간에 밭에 나와 계시기에, 그 까닭이 궁금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쭤봤다.

"다 저녁에 뭐 하세요?"
"알타리(무) 심을라고. 다른 집들보다 조금 일찍 거둬야 해서..."


추석 명절에 쓰시려나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울타리를 따라 심어 놓은 청양고추에 눈이 갔다. '알뜰살뜰 고추 농사 잘 지으셨네' 감탄한 것도 잠시, 처음 보는 벌레 떼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흉칙한 생김새와 어마무시한 개체 수에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어르신, 여기 좀 와 보세요. 이게 다 뭐지요?"
"뭘 보고 그려."


여긴 약 못 쳐!
 
텃밭 주인 할머님은 고추노린재가 붙은 고춧대를 흔들어 땅바닥에 떨궈 죽이고는 붉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텃밭 주인 할머님은 고추노린재가 붙은 고춧대를 흔들어 땅바닥에 떨궈 죽이고는 붉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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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에 뭔 큰일이 날 줄 알고 다가와 살피시던 할머님의 손길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큰일 났네. 벌써 쳤어야 하는데, 약을 안 쳤더니 벌레가 꼬였네."
"왜 약을 안 치셨어요?"
"이쪽 고추는 우리 며느리가 따 간다고 해서..."


할머님은 고춧대를 바닥 쪽으로 휘어잡고 세차게 흔들어대셨다. 벌레들은 좌우로 요동치는 고춧대에서 바닥으로 추락했고, 종국에는 할머님의 발끝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몇 차례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할머님은 벌레와의 사투를 멈추시더니, 전술을 바꾸셨는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기 시작하셨다. 

"고추 따시게요?"
"약을 못 치니 일단 따서 말려야지."


곱게 익은 고추를 따는 할머님 손 너머로는 여전히 고춧대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벌레 무리가 보였다. '으엑, 징그러!'

할머님은 애써 지은 고추 농사를 망치는 천적의 이름을 모르셨다. 나라도 처음 보는 벌레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고추밭의 침입자들은 '고추 노린재'였다. 그 종류만 무려 10여 종이나 된단다.

고추 노린재는 식물 줄기의 즙을 빨아 먹고 살기에 식물을 말라 죽게 하며, 탄저병을 유발하고, 직접 만지면 악취까지 풍기는 해충이었다. 이놈들 말고도 총채벌레, 담배나방 등 고추 농사에 천적은 여럿 있었다. 할머님께 이 중차대한 정보를 한시바삐 전하고파 마음이 급해졌다.

다음날 점심 때쯤 할머님댁 텃밭에 다시 가 봤다. 할머님댁에서 드실 울타리 안쪽 고추밭에는 결국 살충제가 뿌려졌는지 고추밭은 이미 하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들네 몫으로 키우는 고추밭도 살펴봤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고추 노린재는 군데군데 떼로 몰려 있었으니, 할머님께 여쭙지 않아도 약을 치지 않은 증좌는 충분했다. 게다가 전날은 미처 발견 못한 황갈색 알까지 고춧잎 뒷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병반없던 고추나 고춧잎은 여전히 말끔했다. 

고추를 키워는 봤어도 꽃 한 번을 제대로 피워 본 적 없으니 입때껏 몰랐다. 베테랑 농군이든 아니든 간에 모종을 심어 때깔 좋은 고추를 거두려면 여름내 손가락 관절이 저리도록 풀을 뽑고, 죽을힘을 다해 병충해를 막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 공들여 키워냈으니, 쉬운 길을 마다하고 수백 번 수천 번을 매만져 수확한 고추를 말릴밖에...

아들네가 먹을 고추를 지켜내려면 할머님은 얼마간 '고추 노린재'에게 매운맛을 더 보여주셔야 한다. 할머님의 마지막 정성이 보태져 맛깔나게 익어갈 김치와 고추장을 떠올리니,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물색없이 입안 가득 군침이 돌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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