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 MBC

 
도코 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이하 '선녀들')에선 일제 강점기 시절 억압받던 한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지금도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운다. 대회 폐막식 직전 거행되기 때문에 전세계 스포츠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42.195km의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국 선수는 단 두명 뿐.  황영조(1992년 바르셀로나), 그리고 손기정(1936년 베를린)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이름 대신 지금까지 손기정의 우승 기록 뒤에는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명이 꼬리표 처럼 자리잡고 있다. 

스케이트 대신 택했던 달리기...그의 인생을 바꾸다.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 MBC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갖고 싶어했던 손기정이었지만 그의 집은 그것을 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먹고 살기 조차 힘들었기에 친구들이 꽁꽁 언 압록강 빙판을 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만 바라봐야 했던 손기정이 택한 것은 바로 달리기였다.  신발 하나만 있으면 되는, 돈이 들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는 늘 먼 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평안북도 육상대표선수 이일성, 배가 고파서 달리지 못하겠다는 손기정에게 매달 급식비를 대줬던 체육교사 김수기 등의 도움을 받으며 손기정은 착실히 기량을 연마했고 어느새 한반도 최고의 마라톤 선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목표는 단 하나, 울림픽 출전해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일본의 억압을 받던 시기에 올림픽에 나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종 대회에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 신기록도 세우는 손기정의 올림픽 출전은 사실상 정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일본의 방해가 만만찮았다.  자국 선수들을 올림픽 대표로 뽑기 위해 사상 초유로 베를린 현지 선발전을 한번 더 치르겠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이에 굴하지 않은 손기정, 그리고 그의 동료 남승룡(동메달 획득)이었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 1위를 노리던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한국의 두 선수는 당당히 대표 선수에 선발되어 독일 땅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꿈에 그리던 우승, 그리고 일본의 각종 탄압
​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 MBC

 
기록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손기정이었지만 그의 우승을 가로 막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각국 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1932년 LA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자발라(아르헨티나), 유럽 육상의 강자 하퍼(영국) 등 빼어난 기량과 경험을 고루 지닌 선수들을 상대로 손기정, 남승룡은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해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심지어 당시 마라톤에선 마의 벽으로 여겨지던 2시간 30분대를 깨고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 신기록까지 수립하면서 세계를 경악시켰다.

​누구보다 학수고대하던 우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손기정은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조선의 대표가 아닌, 일본의 대표선수로 출전했기 때문에 남승룡과 남몰래 한 구석에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고 그는 토로했다.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을 벌인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손기정의 우승은 결과적으론 각종 탄압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일제 당국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그는 학교 등교도 뿐만 아니라 육상 선수 활동까지 금지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손기정은 한창 전성기의 물익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택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손기정의 가르침을 받은 후배들은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2,3위를 석권하는 등 다시 찾은 나라와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줬고 베를린 쾌거 후 56년이 지난 1992년 황영조는 마침내 스페인 땅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금메달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광복절과 올림픽, 적절한 시기와 소재의 만남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지난 15일 방영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 X'의 한 장면. ⓒ MBC

 
​손기정 선생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알려진 소재였지만 때 마침 막을 내린 도쿄 올림픽과 8.15 광복절이라는 적절한 시기와 맞물려 <선녀들>은 시청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시간을 마련해줬다.  안산(양궁)을 비롯해서 펜싱 어벤져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국민들에게 기쁨을 전해준 선수들 이전에는 바로 손기정이라는 최초의 올림픽 영웅이 존재했음을 방송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조국의 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손기정)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 시절 흑백의 영상들은 화려한 빛깔의 요즘 중계 방송과는 거리감이 있을 만큼  비록 낡고 투박했지만 85년이라는 시간을 되돌리면서 베를린 현장 속으로의 공간 이동을 이끌어 낸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자부심을 드높였던 손기정의 이야기는 비록 종목은 달랐지만 도쿄 하늘을 뒤덮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일본은 각종 역사 속 사실에 눈 감은채 왜곡에만 몰두하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손기정의 쾌거와 스포츠 후배들의 세계 재패는 뻔뻔하게 행동하는 일본을 향한 우리들의 정정당당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일본 국적,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뛰어야 했지만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던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azzkid 에도 수록되는 글 입니다.
선을넘는녀석들 선녀들 올림픽 손기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