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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오늘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답사할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답사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걷기 코스 개발이라고 해야겠다. 그동안 주로 오름이나 숲길을 찾아다녔는데, 집 부근에 1만보 정도 걸을 수 있는 산책코스가 있으면 수시로 활용하기에 편할 듯해서 나선 길이다.

항몽유적지는 집에서 3∼4㎞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평소 자주 가는 편이다. 복원한 토성에도 올라가 보고, 포토존에 철 따라 심는 꽃들을 감상하기 위해 찾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항몽유적지를 둘러싼 토성길을 한 바퀴 돌면 하루 만 보 걷기를 실천할 수 있는 코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
 
항몽유적지 전시관의 기록화. 여몽연합군에 패해 한라산 붉은오름으로 들어간 삼별초 70여 장수는 혈전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 삼별초의 최후혈전 항몽유적지 전시관의 기록화. 여몽연합군에 패해 한라산 붉은오름으로 들어간 삼별초 70여 장수는 혈전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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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파두리 항몽유적은 고려시대 원나라 침략에 맞서 결사 항전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정복한 원(몽골)나라가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저항했으며, 대몽 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는 것은 대개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와 원나라는 강화를 맺게 된다. 고려가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자 몽골침략군과 싸우던 삼별초는 굴욕적인 강화에 반기를 든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로 들어가 계속 투쟁하게 된다.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갔다는 것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삼별초의 항쟁 스토리다.

1273년 4월 28일 여몽 연합군이 군선 160척과 약 1만2천여 병력으로 함덕과 비양도로 쳐들어온다. 삼별초 군은 함덕과 파군봉, 항파두성에서 적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폈으나 병력이 월등한 연합군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지휘부의 거처였을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둘레 750미터의 직사각형으로 현재 발굴조사 작업중이다.
▲ 항파두성 내성지 지휘부의 거처였을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둘레 750미터의 직사각형으로 현재 발굴조사 작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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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70여 장수가 항파두성을 탈출해 붉은오름에 올라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홀로 남은 김통정 장군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삼별초 영웅담은 막을 내린다. 이런 비극적 결말 때문인지 삼별초 항쟁 스토리는 비장미를 풍긴다.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항전하다가 전멸했다는 것까지도 알고는 있었으나, 어디에서 어떻게 항전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 애월읍으로 이주했을 때 바로 집 부근에 항몽유적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묘하게도 마음이 끌렸다. 외세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한 현장이 집 가까이에 있다니!

막상 역사유적지를 가보면 볼거리가 별로 없는 경우가 흔하다. 항몽유적지도 마찬가지다.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라는 비석과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기록화 7폭, 출토된 약간의 유물 정도가 전부다.

천연의 요새
 
작은 돌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하게 조성된 3.8킬로의 토성은 잔디와 풀이 덮여 있어 걷기에 좋다.
▲ 항몽유적지 토성 작은 돌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하게 조성된 3.8킬로의 토성은 잔디와 풀이 덮여 있어 걷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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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목한 건 유적지를 둘러싼 토성(土城)이다. 자갈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한 강도로 쌓은 이 토성은 작은 내성과,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한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은 그 길이가 15리(6㎞)에 이른다고 전해졌으나 측량조사 결과 3.8㎞로 파악됐다. 이 외성으로 둘러싸인 면적은 약 23만여 평으로 꽤 넓다. 지휘부의 거처였을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으로 현재 발굴조사작업 중이다.

오늘 이 토성길을 모두 걸었다. 복원작업이 완료된 토성은 잔디와 풀로 덮여 걷기에 좋다. 경사진 비탈을 5미터 정도 올라가면 토성 꼭대기다. 토성 정상부는 폭이 거의 3m에 달할 만큼 넓어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토성은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진입을 허용한 구간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토성 위로 올라갈 수 없게 금지한 구간은 토성 아래로 난 길을 걸으면 된다. 토성은 중간중간 끊어진다. 대개는 100∼200m쯤 토성이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곤 한다.

오랜만에 토성 위에 올랐다. 넓은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제주 시내와 제주도의 북서부 바다, 그리고 멀리 추자도까지 보이고, 뒤로 돌아서면 한라산도 보인다. 토성 주변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거나 귤밭이거나 차밭이다. 민가도 드물게 있고, 절도 보인다. 동서 양편에 하천도 흐르고 있어 천연의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토성길을 걸으며 삼별초가 아닌 제주 민초들의 편에서 당시를 상상해본다. 이 토성을 삼별초 군사들만의 힘으로 쌓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제주 백성들의 피와 땀이 뿌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삼별초의 대의에 공감해서 자발적으로 나섰을까, 아니면 뭍에서 온 새로운 권력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을까.

김통정 장군은 왜 이곳 애월읍 고성리 일대를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을까. 전시관에서 보여주는 자료를 보니, 여몽 연합군이 쳐들어올 루트로 예상한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지역인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삼별초가 버틴 기간은 2년 반이었다.

삼별초가 패배한 후 제주의 민중들은 무려 100여 년을 몽골에 시달려야 했다.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접 제주를 지배한 몽골 세력이 제주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제주도에서 목호(牧胡:몽골의 목자)의 난을 토벌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주인들은 몽골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0년의 고통

이 100년 동안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지로, 일본과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기지로 이용됐다. 한 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를 겪으면서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그때의 영향일지 모르겠으나 제주어에는 우리말 어감과는 다른, 매우 낯선 느낌을 주는 어휘들이 간혹 보인다. 특히 말과 관련된 용어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은 고소리술과 빙떡, 상애떡 등도 몽골 지배의 흔적이다.

나만의 토성길 걷기 코스를 오늘 완성했다. 항몽순의비가 서 있는 제단 뒤쪽으로 돌아가면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정자가 나온다. 이 정자에서 저 아래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토성이 나온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항몽유적지에서는 삼별초를 기리는 항몽순의비와 기록화 7폭 및 출토된 유물을 볼 수 있다.
▲ 항몽순의비 항몽유적지에서는 삼별초를 기리는 항몽순의비와 기록화 7폭 및 출토된 유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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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토성 위로 올라가 일대를 굽어보며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토성길은 오가는 인적도 적은 편이어서 호젓하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토성길이 끊어져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야 하는 구간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만족도 높은 산책코스다.

동쪽 방향 토성이 끝나는 지점까지 간 다음에는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서쪽으로 토성길을 걷는다. 이렇게 토성을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정확히 기대치인 1만 보를 조금 넘었다.

이 토성길 코스는 바닥이 부드러워서 걷기에 편하다. 무엇보다 토성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는 기분이 특별한 감흥을 준다. 역사의 현장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노라면 사소한 근심거리는 말 그대로 사소해진다. 잠시라도 번잡한 세상사를 역사의 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항몽유적지에는 토성 말고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게 있다. 철 따라 꽃구경을 할 수 있는 넓은 꽃밭이다. 유채꽃 메밀꽃 청보리 해바라기 코스모스를 돌아가면서 감상할 수 있다.

돌아오는 길, 토성 위에서 청춘남녀가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들어왔다. 인생사진을 찍는단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순간에 맞춰 토성 위에서 뛰어오르는 장면을 찍으면 멋진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삼별초'와 '인생사진', 750여 년의 거리를 두고 교차하는 2개의 풍경을 바라보며 토성과 헤어졌다. (2019.10)
 
항몽유적지 토성 위에서 비행기가 지나갈 때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청춘남녀들이 많이 찾고 있다.
▲ 토성과 인생사진 항몽유적지 토성 위에서 비행기가 지나갈 때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청춘남녀들이 많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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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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