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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혁이 최후를 맞은 다릿골 부근
 박노혁이 최후를 맞은 다릿골 부근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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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이닷!" 1949년 가을 어느 날. 용화지서장은 영동경찰서의 전화를 받고 직원들에게 긴급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전필수(가명, 1924년생) 역시 장총을 어깨에 메고 GMC 트럭에 몸을 실었다. 트럭 적재함에서 그는 선임인 차석(지서장 다음의 직위)에게 물었다. "근데 뭐하러 출동하는 겁니까?" "박노혁 부대가 상촌지서를 습격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트럭은 1시간 30분을 달려 매곡면과 상촌면의 경계인 돈대삼거리에 멈췄다. 전필수가 트럭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영동경찰서와 황간지서, 상촌지서에서 온 경찰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빨치산 토벌대가 상설적으로 운영되었는데, 1개 중대(약 60명)가 와 있었다.

"현재 박노혁 부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저 앞에 보이는 다릿골에 은거하고 있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잡아야 한다." 토벌대는 대장의 작전 명령에 포위망을 좁혔다. 토벌대장의 선무공작이 이어졌다.

"박노혁이! 자수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시끄럽다. 검정개야"하며 총을 쏘았다. '검정개'는 검은 색 제복을 입은 경찰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얼마 간의 교전 후 토벌대는 어렵지 않게 박노혁 부대를 소탕할 수 있었다. 만능스포츠맨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박노혁도 경찰 1개 중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경찰을 살려준 빨치산 대장

박노혁이 토벌대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용화지서 경찰 전필수는 속울음을 울어야 했다. 박노혁과 전필수는 영동초등학교 동창지간이었다. 박노혁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동정리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했고 훗날 좌익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필수는 인천의 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해군을 다녀왔다. 해방 후 대전 철도청에 다니다가 1946년 청주에 있는 충북경찰학교를 나와 경찰에 입문했다. 박노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전필수가 다릿골로 출동하기 한 달 전, 그는 친구 박래원에게 충격적인 말을 전해들었다. 다름 아닌 박노혁의 말이었다. "내가 그 뚝 밑에 있는데, 전필수가 지나가는 걸 봤는데, 동창이 아니면 그냥 쏴 죽였는데..."라는... 박노혁은 어릴 적 친구였던 정을 생각해 전필수를 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한 달만에 전필수는 친구 박노혁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관의 사격 명령을 어길 수는 없어 총구는 하늘로 향했지만 어린 시절 친구가 죽어가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것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박노혁이가유. 총에 맞아 몸이 걸레 조각이 되었슈. 그 시신을 영동 읍내로 갖고 왔지유"라며 눈물을 흘리던 전필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2008년 여름 영동군 전필수 자택에서의 증언이었다.

용산지서 습격사건

남로당 영동군당 인민유격대 박노혁 부대 20명은 숨을 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용산지서를 에워싼 부대원들은 박노혁의 "쏴"하는 명령에 따라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이 습격으로 용산지서 순경 4명이 부상을 당했다.

1949년 7월 27일 있었던 이 사건의 후유증은 깊었다. 영동경찰서와 용산지서는 박노혁 부대에 협조했다며 용산면 남로당원과 주민들을 대거 연행했다. 이중 일부는 구속돼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이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들은 청원군 일대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봉하(신항리 새터), 이대수·이봉수(신항리 수리), 정구철(신항리 노루목, 용산초등학교 교감) 등이 그들이다. 
 
박노혁 부대의 아지트가 있었던 황간면 우천리 뒷산
 박노혁 부대의 아지트가 있었던 황간면 우천리 뒷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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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여름 용산지서를 습격한 박노혁 부대는 황간면 우천리에 비트(비밀 아지트)를 두었다. 황간면 우천리는 남로당 본부가 있던 영동읍 심원리와 맞닿아 있었다. 빨치산들은 우천리 주민들에게 음식과 의약품을 요구했고, 주민들은 이를 아지트로 날라 주기도 했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충북 영동군 2008년 피해자현황조사 보고서).

결국 그 일 때문에 우천리 주민 10여 명이 1949년 12월 영동경찰서에 연행됐다. 그들은 유치장에서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일부는 대전형무소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학살당했다. 황간면 우천리 정태영(일명 정우암회) 등이 그들이다.

빨치산 대장을 아우로 삼은 경찰

1952년 매곡지서장 이섭진은 한복을 입고 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집을 나섰다. 이후 그는 며칠 동안 매곡면 돈대리 남덕우 집 근처에서 매복했다. 며칠간을 매복해 있다가 이섭진은 자기 집에서 잠자고 있는 남덕우를 덮쳤다. 체포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났고, 남덕우는 이섭진의 귀를 물어뜯었다. 결국 이섭진에게 체포된 남덕우는 지서에 끌려왔다. 그는 지서에서도 포승줄로 묶이지 않았으며, 남덕우의 전향 설득에 동의했다. 당시 남덕우가 매곡지서에 있었을 때의 모습을 이섭진의 장녀 이선희(당시 12세)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분을 잡아서 지서에 데려다 놨을 때 제가 봤어요. 창문으로 봤어요. 호기심에서, 어릴 때 그때 제가 4학년 때였거든요. 창문으로 요렇게 보니까, 아주 틀도 멋지게 생긴 사람이요. 막 수염이 이렇게 길었고. 자그만하고 땅딸막한데, 그때 그 따발총이라고 그러나요? (중략) 유치장이 아니에요. 그냥 지서에 그 의자에 이렇게 앉아 있다더라고요. 안 묶여 있었고. 그 사람이 인제 아버지를 믿었고, 아버지도 그 사람을 믿었죠. 부모(남덕우의 모친)가 있기 때문에 안 믿었겠습니까?"

이섭진은 남덕우를 설득한 후 김영철 영동경찰서장에게 남덕우가 자수한 것으로 보고했다. 이로 인해 남덕우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섭진은 남덕우와 의형제를 맺고 친동생처럼 지냈는데, 지서장 관사에 방 하나를 내주고 기거하게 했다. 몇 년간을 같이 살던 남덕우는 1955년도에 이섭진의 권유를 받아 경찰에 입문, 새로운 삶을 출발했다. 그후 남덕우는 충남 예산경찰서에 근무했다.

남덕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동군 매곡면 돈대리 출신의 남덕우는 전쟁 전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산해 매곡면 인민위원장을 했다. 그는 9.28 수복으로 북한군을 따라 월북했다. 이후 서울정치학원과 빨치산 제526부대(부대장 서윤)에서 유격훈련을 받은 후 1951년 2월 대원 20명을 인솔하여 남하했다. 그는 영동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는데 삼도봉, 민주지산, 석기봉 등지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매곡, 상촌, 추풍령지서 등을 습격했다. 남덕우는 1948년 남로당에 가입, 1949년 5월 19일 매곡지서 습격사건을 주도했고, 1952년 검거될 때까지 영동군 빨치산 활동을 했다. 

빨치산은 영동군에서 남로당 출신 활동가들에 의한 자생적인 활동이었다. 이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조국통일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들에 협조한 주민들은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고, 일부 사람들은 형무소에 수감 중 학살되었다.

그런데 빨치산 박노혁은 경찰 전필수를 살려주었고, 경찰 이섭진은 빨치산대장 남덕우를 살려주었다. 이런 노력이 우리 사회 전체에서 이루어졌다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단적 대결이 아닌 상생(相生)의 사회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태그:#빨치산, #영동경찰서, #청주형무소, #영동인민유격대, #다릿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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