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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세계 5대 동양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조선인에서 이어집니다.

고려대는 석탑대동제, 석탑문학, 석탑가족처럼 '석탑'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1976년 고려대 동문 박희진이 지은 <고대찬가>라는 시에도 '석탑'은 등장한다. 

"저 수려한 / 화강암 석탑의 지성을 보라 / 누가 마음의 고향을 안 느끼랴 / 누가 희망으로 부풀지 아니하랴"

고려대 캠퍼스 자체가 석조 건물 위주이긴 하나, '석탑'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따로 있다. 대학원 건물과 도서관으로 쓰이는 '중앙도서관 구관'이다. 중앙도서관 구관은 가장 먼저 지은 본관보다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 건물의 5층 중앙탑은 우뚝 솟아, 캠퍼스 어디에서나 석탑의 위용을 자랑한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은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에 "개교 30주년 기념 도서관"이라는 명패가 새겨져 있다.

고려대 상징 '석탑'은 어디를 말할까
 
듀크대학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시에 있는 연구 중심 대학이다. 문리대인 트리니티 대학과 공과대인 프랫 공대로 나뉘어 있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은 듀크대 퍼킨스 도서관을 모델로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 듀크대 퍼킨스 도서관 듀크대학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시에 있는 연구 중심 대학이다. 문리대인 트리니티 대학과 공과대인 프랫 공대로 나뉘어 있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은 듀크대 퍼킨스 도서관을 모델로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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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 도서관은 인촌 김성수 개인의 사재로 건립된 도서관이 아니다. 전국적인 모금을 통해 건립비용을 마련했다. 120명이 넘는 사람이 모금에 참여해서 12만 원 이상 비용을 모았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각각 2만 원씩,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자 우석 김종익이 1만2천 원, 송진우 2백 원, 현상윤 1백 원, 이병도 1백 원, 유진오 70원, 안호상 50원, 정인보가 10원을 기부했다.

조지훈이 쓴 고려대 교가 가사에는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 올린 공든 탑"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조지훈이 말한 '공든 탑'은 바로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을 의미한다. 동문 모금을 통해 도서관을 건립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전국적 모금으로 대학도서관을 지은 사례는 흔치 않다. 

1935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은 1937년 9월 완공했다.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이 도서관은, 1934년 완공된 본관에 이어 고려대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긴 건축물이다. 고려대 김현섭 교수가 밝힌 것처럼, 보성전문 도서관은 1930년 문을 연 듀크대(Duke University) 퍼킨스 도서관(Perkins Library)을 모델로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보성전문이 도서관 건립을 추진한 이유는, 서고와 학생 열람실, 교수 연구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유진오는 자신의 부임 조건으로 1교수 1연구실을 내걸었고, 인촌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은 지금도 일부 공간이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중에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 바로 이곳이다. 말 그대로 한국 대학도서관 건축물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만하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신관' 역시 역사가 짧지 않다. 개교 70주년 기념으로 1978년 문을 연 중앙도서관 신관은, 2018년 개관 40주년을 맞았다.

1970년대 후반 일본 석조건축 전문가 그룹이 한국의 석조건축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석조건축 전문가들은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청사), 덕수궁 석조전,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을 '한국의 3대 석조건축물'로 꼽았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구관은 사적 286호다.

보성전문 도서관 분류표를 만든 장본인
 
손진태는 로마자와 아라비아숫자를 조합해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 만들었다. 이런 조합으로 만든 분류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분류표는, 미국 의회도서관(LC) 분류표다. 손진태가 의회도서관 분류표를 참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도요문고 분류표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손진태의 <분류표>가 적용된 첫 번째 책은, 등록번호 74번 <보도 타삼편>(세계대중문학전집)이다. 손진태는 <도서 수입 원부> 해당 자료에 분류기호 ‘G42’를 부여했다.
▲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도서 수입 원부> 손진태는 로마자와 아라비아숫자를 조합해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 만들었다. 이런 조합으로 만든 분류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분류표는, 미국 의회도서관(LC) 분류표다. 손진태가 의회도서관 분류표를 참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도요문고 분류표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손진태의 <분류표>가 적용된 첫 번째 책은, 등록번호 74번 <보도 타삼편>(세계대중문학전집)이다. 손진태는 <도서 수입 원부> 해당 자료에 분류기호 ‘G42’를 부여했다.
ⓒ 고려대학교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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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 그는 문명사를 가르쳤다. 도서관장도 계속 맡았다. 손진태가 머문 도서관장실은 보성전문 도서관 1층에 있었다. 비슷한 시기 그는 민속품을 수집해서 보성전문학교 박물관을 출범시켰다. 인촌 김성수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손진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박물관의 기초를 닦았다. 

보성전문 교수가 된 후 손진태는 안호상, 조윤제, 이인영과 가까이 지냈다. 보성전문 교수로 안암동에 가까이 살았던 손진태와 안호상은 술자리도 자주 하는 사이였다. 손진태는 조윤제와 이인영에게 도서관 연구실도 제공했다. 

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도서관은 도서관마다 제각각 분류표를 사용했다. 손진태가 만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는, 한국인이 만들고 작성자가 알려진 분류표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분류표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는 손진태가 도서관장이 된 1937년 즈음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보다 3년 정도 빠르다. 박봉석의 <분류표>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비해, 손진태의 <분류표>는 거의 알려지지 않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손진태의 <분류표>뿐 아니라 '도서관인'으로 손진태를 평가하거나 조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손진태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도요문고에서 사서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사서로, 1937년부터 1946년까지 보성전문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일본과 조선에서 16년 동안 도서관인으로 활약했다. 해방 무렵까지 도서관 근무 경력을 따지면 이재욱, 박봉석과 비슷하며, 서울대 초대 도서관장 김진섭보다는 몇 년 더 많다. '도서관 분야 선구자'로 손진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 아닐까.

'한국사'를 만든 주역
 
한국 근현대 도서관 역사에서 <분류표>를 만든 사람 중 이름이 알려진 이가 세 명 있다. 손진태, 박봉석(조선공공도서관 도서 분류표), 고재창(해군사관학교 도서 분류표와 한국은행 도서 분류표)이다. 한국인이 만든 분류표 중 손진태가 만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진태는 도요문고 사서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사서와 도서관장을 지냈다.
▲ 도서관인 손진태 한국 근현대 도서관 역사에서 <분류표>를 만든 사람 중 이름이 알려진 이가 세 명 있다. 손진태, 박봉석(조선공공도서관 도서 분류표), 고재창(해군사관학교 도서 분류표와 한국은행 도서 분류표)이다. 한국인이 만든 분류표 중 손진태가 만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진태는 도요문고 사서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사서와 도서관장을 지냈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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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손진태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서울대의 전신) 법문학부는 진단학회 구성원이 교수진의 주축을 이뤘다. 진단학회에서 활동한 손진태가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울대 교수 시절 그는 국대안으로 인한 학생 동맹휴학과 위장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6개월 동안, 그는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았다. 초대 문교부장관이 된 안호상의 요청으로 문교부 일을 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진태가 한국사와 <국사> 교과서를 만든 주역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손진태를 쓰다 소키치의 식민사관을 이어받은 '후식민사학자'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다시 서울대로 복귀한 그는, 1949년 2월 18일부터 9월 7일까지 사범대 학장을 맡았다. 서울대 사범대 학장 시절 손진태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학도호국단을 반대하는 학생에 의해 그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5일 안암동 86-233번지 손진태 집에 침입한 괴한 3명이 권총을 3발 쏘았다. 그중 한 발이 손진태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더 이상 피해는 없었다. 그의 서울대 교수 생활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5월부터 9월까지는 서울대 문리대 학장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교직원에게 4개월 치 밀린 급여를 나눠주다가, 시간을 지체해서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에 숨어 있던 손진태는 1950년 9.28 수복 직전에 발각돼 납북됐다.

손진태는 해방 전에는 민속학자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역사학자로 활약했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가 민속학을 연구한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손진태의 연구 덕분에 '민속학'은 독자적인 과학과 학문 분야로 정립할 수 있었다. 이 대목이 민속학자로서 손진태가 가장 크게 공헌한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로 활동한 건 해방 이후부터지만, 손진태는 1934년 귀국한 후부터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손진태의 학문적 관심은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성립됐고, 우리 문화의 기초는 어떻게 구성됐는가'라는 점이었다. 

손진태 이전에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가 있었지만, 그들은 민속학을 보조적인 분야로 간주했다. 조선 정신을 북돋는 방편 정도로 민속학을 생각했다. 민속학 분야에서 최남선과 이능화가 '시조'(始祖)에 해당한다면, 손진태는 민속학을 중흥시킨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다.

논문에서 기회 닿을 때마다 '인류학'을 언급한 손진태는 '인류학자'로 조명받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모두 대학 학문의 선구자로 손진태를 꼽는다는 점이다. 1989년 서울대 도서관은 유족으로부터 손진태 장서 2210권을 기증받아 '남창문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저작과 납북 경위 
 
손진태는 설화와 민간신앙 같은 무속 분야 뿐 아니라 온돌과 살림집의 물질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온돌의 기원과 구조, 역사와 전파 과정을 꼼꼼히 연구해서 중국.만주와 비교했다. 움집과 민가의 발생 및 분포를 연구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 보성전문학교 본관 앞에서 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손진태다.
▲ 보성전문학교에서 제자와 함께 손진태는 설화와 민간신앙 같은 무속 분야 뿐 아니라 온돌과 살림집의 물질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온돌의 기원과 구조, 역사와 전파 과정을 꼼꼼히 연구해서 중국.만주와 비교했다. 움집과 민가의 발생 및 분포를 연구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 보성전문학교 본관 앞에서 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손진태다.
ⓒ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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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연구뿐 아니라 현장 조사, 유물 자료를 중시한 것도 손진태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920년경부터 1933년까지 손진태는 전국 각지를 돌며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 다른 이가 문헌에만 의존할 때 그는 현장 답사를 통해 1차 자료를 수집해서 연구했다. 실증과학으로 민속학을 자리매김하면서 역사학과 인류학, 고고학, 사회학 연구 성과를 폭넓게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속학의 연구 방법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손진태는 조선 민족문화의 본류를 알아내기 위해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같은 한반도 주변 문화와 비교하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설화의 발생과 전파 과정, 우리 설화의 특징을 이런 방법론을 통해 규명하기도 했다. 

자신이 수집·채록한 자료를 정리해서 책으로 발간한 점도 그의 업적이다. 민속학 분야 저작으로 손진태는 1930년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과 <조선민담집>(朝鮮民譚集)을 펴냈다. 해방 이후인 1947년에는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1948년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를 차례로 발간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민속학 분야에 뛰어들어, 그는 '개척자'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손진태는 11권의 책과 120여 편의 글을 남겼다. 그의 저작 중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와 <조선민족사개론>은 민속학과 한국사 분야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납북 이후 그의 학맥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사학과 고대사 연구를 높이 평가해왔다.

이승만 시대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체계화시킨 사람은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이다. 안호상과 친분, 사상적 교류를 고려할 때 손진태의 신민족주의가 일민주의와 관련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납북으로 그의 학맥은 끊겼지만, '손진태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이어져 왔다. 1981년에는 <손진태 전집>이 출간됐다. 2000년 12월 28일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손진태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2002년 12월 문화관광부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손진태를 선정했다. 

1964년 7월 1일부터 조선일보사는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서명운동에 1호로 서명한 사람은, 손진태의 아내 연영화다.

도서관인이 만들었으되 잊은 역사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 기념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건물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동진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도서관의 시공은, 후지타 겐이치(藤田源市)가 맡았다. 도서관 연면적은 873평이다. 이 도서관이 개관하자마자, 초대 관장을 맡은 사람이 손진태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 기념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건물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동진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도서관의 시공은, 후지타 겐이치(藤田源市)가 맡았다. 도서관 연면적은 873평이다. 이 도서관이 개관하자마자, 초대 관장을 맡은 사람이 손진태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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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송환 서명운동에 서명할 즈음 손진태는 북녘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납북 이후 손진태에 대한 2가지 증언이 있다. 먼저, 전 북한 연락부 부부장 박병엽의 증언이다. 

"(손진태는) 1950년 9월 문리대학장 재직하다 납북되었다. 납북 후 작가동맹에 가입하였으며, 해방작가(집에서 혼자 집필하는 작가)로 활동하였으나 이름난 작품이 없다. 또한 사범대학 교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7월 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발족되면서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후반 당뇨 또는 신장병으로 인해 장기간 입원하였으며, 60년대 중반에 사망하였는데 유족으로 재혼처가 있다."

북한 정무원 부부장과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을 지낸 신경완의 증언도 있다. 

"손진태는 3차 팀으로 조소앙 선생과 합류되었는데 만포의 산악지대인 외귀마을에서 감금생활을 하였다. 조소앙·김규식·엄항섭·안재홍·조완구·손진태 등은 휴전기로 접어들면서 평양 교외로 옮겨졌다. 그런데 초기에 손진태 등은 다른 요인과 분리되어 대동군 사족면 철봉리에 별도 수용되었다고 한다.

(중략) 납북요인들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출범시켰는데 손진태는 이 부분에서 소외그룹이었다. 납북요인들 일부는 북측의 협조로 <고려사>·<리조실록>·<팔만대장경> 등을 번역하였는데 손진태는 이들 작업에 배제되었다. 1958년 8월 종파투쟁을 거치면서 재교육명령이 하달되어 1~2년간 강습 이후에 국영농장의 평사무원으로 배치되었다. 배치될 당시에 이미 병을 앓고 있었으며 지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60년대 중반에 사망하였다."


손진태에 대한 박병엽과 신경완의 증언은 대체로 일치한다. 납북인사 그룹에서도 소외되어 병으로 고생하다가 1960년대 중반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그나마 손진태는 납북 이후 행적이 어느 정도 알려졌다. 

한국 도서관 분야 선구자인 이재욱과 박봉석, 김진섭의 납북 이후 행적을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뭘까? 민속학계와 달리, 한국 도서관계가 납북 도서관인의 행적을 열심히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민속학도보다 사서 수가 훨씬 많고, 민속학 연구자보다 문헌정보학 연구자가 더 많을 것이다. 

박봉석의 경우도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고 언급만 할 뿐, 납북 이후 행적을 조사하거나 <전집> 발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봉석과 손진태 같은 '도서관 선구자'에 대한 후배들의 대접이 '환대'가 아닌 '홀대'였던 건 아닐까.

1930년부터 1946년까지 16년 동안 손진태는 도요문고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사서와 관장으로 일했다. 오랜 기간 도서관에서 일했음에도 그는 '도서관인'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민속학과 역사학뿐 아니라 도서관 분야 개척자임에도 손진태는 도서관계에서 철저히 잊혔다. 

한국 도서관 역사는 '도서관인이 만들어 왔으되, 도서관인이 잊은 역사'다. 빛나는 역사와 자랑스러운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과 망각이 지배했기에 우리는 '역사'를 잃었다. 우리가 선배를 잊은 것처럼, 우리 후배 역시 우리를 잊을 것이다. 우리가 했던 모든 노력도 철저히 잊힐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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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 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춘기 딸과 고양이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하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썼습니다. sugi95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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