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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사서'(司書)로 일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따르면, 조선인 중에는 이긍종, 성달영, 이재욱, 박봉석 단 4명이 '사서'로 이름을 남겼다. 조선에서도 극소수가 사서로 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사서로 일한 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사서'로 일한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사서와 도서관장을 차례로 거쳤다. 도서관장으로 일할 때, 그는 '도서관 분류표'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사서와 도서관장으로 활약한 그는 누구일까? 그는 바로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다.

문화체육부장관을 지낸 최광식에 따르면, 손진태는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남창마을에서 태어났다. 손진태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마을 이름(남창)을 아호로 삼았다.

동래 출신 강진국과 손진태
 
중동학교 표석 1906년 개교한 중동학교는 지금의 중동고등학교다. 초대 교장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언론인, 서예가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이다. 손진태는 중동학교 15회 졸업생이다. 중동 시절 손진태는 '중동삼재'라 불렸다. 수송근린공원 안에 중동학교 옛터 표석이 남아 있다.
▲ 중동학교 표석 1906년 개교한 중동학교는 지금의 중동고등학교다. 초대 교장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언론인, 서예가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이다. 손진태는 중동학교 15회 졸업생이다. 중동 시절 손진태는 "중동삼재"라 불렸다. 수송근린공원 안에 중동학교 옛터 표석이 남아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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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는 같은 동래 사람으로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일한 강진국보다 5년 먼저 태어났다. '동래'는 우리 도서관 분야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을 둘이나 배출한 곳이다.

다섯 살 때 해일로 부모를 잃은 손진태는, 가난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물결은 손진태 고향에도 밀려들었다. 1919년 3월 29일 손진태는 구포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다. 이 때문에 그는 부산감옥에서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최규동 선생 도움으로 경성부 수송동 85번지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를 다녔다. 총명했던 손진태는 중동학교 시절 '중동삼재'(中東三才)로 불렸다. 1921년 그는 중동학교를 15회로 졸업했다.

중동학교 외에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 졸업생 명단에서도 '손진태'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학교를 이중으로 졸업하는 것이 가능했다. 손진태가 중앙고보 졸업생이 맞다면, 중앙고등보통학교는 박봉석뿐 아니라 손진태라는 도서관 선구자를 함께 배출한 셈이다.

경북 성주 이부자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그는, 1924년 3월 와세다(早稻田) 제1고등학원을 졸업했다. 1923년 11월 손진태는 양주동, 백기만, 유춘섭과 문예지 <금성>을 발간했다. 번역에서 '직역'을 추구한 <금성>은 우리 번역사에서 의미 있는 동인지로 평가받는다.

1927년 3월 손진태는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와세다대학 시절 그의 지도교수는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였다. 인류학을 전공한 니시무라의 영향으로, 손진태는 민속학에 관심을 가졌다. 손진태는 1926년부터 민속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1927년 대학 졸업 후 활발하게 연구물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가 '민속학'에 관심 가진 이유
 
도쿄에서 색동회 회원과 함께 색동회는 소파 방정환이 주축이 되어 1923년 5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창립했다.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1926년 4월 촬영한 사진으로, 뒷줄 왼쪽부터 마해송, 정인섭, 손진태,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진장섭이다.
▲ 도쿄에서 색동회 회원과 함께 색동회는 소파 방정환이 주축이 되어 1923년 5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창립했다.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1926년 4월 촬영한 사진으로, 뒷줄 왼쪽부터 마해송, 정인섭, 손진태,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진장섭이다.
ⓒ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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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것(옛날이야기)에 대해 흥미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은 10년 전, 동경에 건너와 인류학과 민속학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이래, 나는 여름방학 때마다 조선에 돌아가 민풍토속(民風土俗)을 조사하는 한편 민간설화의 수집에도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설화와 민속에 관심 가진 계기에 대해, 손진태가 남긴 회고다. 손진태는 니시무라 신지와 함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최고의 역사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쓰다가 아낀 조선인 제자 두 사람이 손진태와 이상백(李相佰)이었다.

와세다대 재학 시절 손진태는 방정환·정인섭·마해송·조재호·진장섭·윤극영·고한승·정병기·정순철과 함께 '색동회' 활동을 펼쳤다. 1923년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만든 색동회는 어린이 운동 단체다. 어린이 문화 운동을 펼친 색동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손진태는 동시와 동화 작품을 써서 남겼고, 동래와 부산 지역에서 동요와 민요를 수집하기도 했다.

손진태가 기고한 최초의 글은 <우리의 첫 한아버지>(단군신화에서)다. 이 작품은 아동잡지 <어린이>에 실린 '단군'에 대한 역사동화다. 그의 데뷔작이 역사동화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훗날 '신민족주의 역사가' 손진태의 등장은 이때부터 준비됐는지 모른다. 단군을 시작으로 손진태는 고주몽, 유리왕, 강감찬, 신숭겸 이야기를 역사동화로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에 '동시'라는 장르로 가장 먼저 실린 작품도, 손진태의 <옵바 인제는 돌아오서요>다. 이쯤 되면 '아동문학가'로서 손진태의 면모도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적인 동양학 도서관, 도요문고의 사서
 
도요문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양학 전문 도서관이다. 도쿄도(東京都) 분쿄구(文京區)에 있다. 조지 모리슨 장서를 바탕으로 1924년 문을 열었다. 손진태는 도요문고에서 '사서'로 일했다. 후원을 해왔던 미쓰비시 재벌이 일본 패전 후 해체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도요문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양학 전문 도서관이다. 도쿄도(東京都) 분쿄구(文京區)에 있다. 조지 모리슨 장서를 바탕으로 1924년 문을 열었다. 손진태는 도요문고에서 "사서"로 일했다. 후원을 해왔던 미쓰비시 재벌이 일본 패전 후 해체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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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를 졸업한 손진태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도요문고(東洋文庫, The Oriental Library)에서 일했다. 1939년 도요문고에서 발행한 <도요문고 15년사>는 손진태가 사서로 근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극소수 조선인이 사서로 근무한 점을 상기할 때, 손진태가 일본 도요문고 사서로 일한 것은 대단히 이채로운 경력이다. 도요문고 사서로 일하면서 그는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교류했다. 손진태가 마에마 교사쿠와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 동양사학의 태두로 불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오대산 사고에 보존된 <조선왕조실록>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긴 장본인이다. 1913년 여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독을 만나, <조선왕조실록>의 도쿄 반출을 역설한 사람이 바로 시라토리다.

손진태가 도요문고 근무 당시 접한 수많은 자료는, 그의 연구 활동에 큰 도움을 준 걸로 보인다. 도요문고 시절 그가 정리한 민속학 관련 노트(13권)와 수십 묶음의 자료가 남아 있다. 도요문고 사서 경력은, 귀국 후 손진태가 학자와 도서관인으로 나래를 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손진태가 일한 도요문고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양학 도서관이다. 일본 최대 동양학 도서관으로 꼽히는 도요문고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세계 5대 동양학 연구도서관'으로 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백만 권을 자랑하는 도요문고 장서는,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해서 국보 5점, 중요문화재 7점을 보유하고 있다.

도요문고 장서의 40%는 한서(漢書)이고, 20%는 일본서, 30%는 서양서로 알려져 있다. 도요문고는 조선에서 수집한 장서도 꽤 소장하고 있다. 도요문고는 타이베이제국대학 총장을 지낸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와 마에마 교사쿠가 수집한 조선본 장서를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1942년 마에마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수집한 854부 2,478책의 조선 고서를 도요문고에 기증했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도요문고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1917년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 대표였던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는, 조지 어네스트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이 수집한 장서 2만 4천 점을 3만 5천 파운드에 구입했다. <타임>(Time)지 특파원이었던 조지 모리슨은, 중국에 머무는 동안 각종 자료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모리슨 장서'는 중국에 대한 각종 서적, 논문, 문서, 팸플릿으로 구성된 컬렉션이었다.

모리슨 장서 구입 과정에서 이와사키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장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와 동양사학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자문을 받았다. 모리슨 장서를 바탕으로 이와사키는, 1924년 재단법인 형태로 도요문고를 발족시켰다.

조선민속학회와 진단학회 활동 
 
진단학회 사무소가 있던 락고재 1934년 여러 조선인 학자가 모여 진단학회를 발족했다. 진단학회의 ‘진’(震)은 중국의 동쪽, 즉 ‘조선’을 의미하며, ‘단’(檀)은 ‘단군’을 뜻한다. 진단학회는 두계 이병도의 집을 사무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고급 한옥 호텔 ‘락고재’로 바뀌었다. 손진태는 이재욱과 함께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진단학회 사무소가 있던 락고재 1934년 여러 조선인 학자가 모여 진단학회를 발족했다. 진단학회의 ‘진’(震)은 중국의 동쪽, 즉 ‘조선’을 의미하며, ‘단’(檀)은 ‘단군’을 뜻한다. 진단학회는 두계 이병도의 집을 사무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고급 한옥 호텔 ‘락고재’로 바뀌었다. 손진태는 이재욱과 함께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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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 장서 구입을 자문한 시라토리는, 도요문고 연구부장으로 재직하며 손진태와 함께 일했다. 도요문고 시절 손진태는 2층, 시라토리는 3층 연구부장실에서 근무했다. 제국학사원 회원이었던 시라토리는, 손진태가 학사원 연구비를 지원받는 데 도움을 준 걸로 알려져 있다.

일본 패전 후 도요문고는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48년부터 국립국회도서관 지부로 운영되었다. 해외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도요문고는 1961년 유네스코 동아시아 문화연구센터를 설치하기도 했다. 최근 도요문고는 국립국회도서관으로부터 독립해서,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도요문고 사서로 일할 때인 1932년 4월, 손진태는 송석하(宋錫夏), 정인섭(鄭寅燮),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이마무라 도모(今村柄)와 함께 '조선민속학회'(朝鮮民俗學會)를 창립했다. 송석하는 손진태와 함께, 조선 민속학의 개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해방 후 국립민속박물관 초대 관장을 역임한 송석하는, 조선산악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민속학을 개척한 송석하는 1948년 세상을 떠났다. 송석하의 장서는 간송 전형필이 인수해서 보성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소장했다. '석남 장서'라 불린 송석하 컬렉션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다. 보성중고등학교 도서관 담당자가 송석하 장서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1933년 손진태는 송석하와 <조선민속>(朝鮮民俗)을 창간했다. 조선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은 1934년 2호, 1940년 3호를 발간했다. 역사 분야에서 '신민족주의 사학자'로 평가받는 손진태는, 민속학 분야에서는 '역사민속학자'로 일컬어진다. 손진태는 1930년대에 이미 조선 민속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1933년 손진태는 이병도, 조윤제와 함께 '진단학회' 결성에 참여했다. 진단학회는 조선어문학회와 조선민속학회가 통합해서 출범했다. 손진태는 진단학회에서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과 함께 활동했다.

도요문고 재직 시절인 1932년 손진태는 연영화(連榮嬅)와 결혼했다. 다음 해인 1933년 장남 대연을 낳았다. 손진태와 연영화는 노산 이은상의 중매로 만났다고 한다. 1934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서 동양문화사 강사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인촌은 손진태를 왜 발탁했을까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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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월 손진태는 연희전문에서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보성전문에서 문명사를 가르치면서, 그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손진태는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사서'로 일한 유일한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 해방 이후에는 사정이 나아지지만, 식민지 시절 조선인이 일본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는 어려웠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된 그는, 도서관 완공과 함께 초대 도서관장이 됐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손진태가 귀국하자마자 학생을 가르친 연희전문은, 왜 그를 도서관 사서 또는 관장으로 발탁하지 않았을까? 손진태가 귀국한 1934년, 연희전문은 이묘묵을 도서관장으로 임명했다.

이묘묵은 1934년 4월부터 1940년까지 연희전문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연희전문은 시라큐스에서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이묘묵을 전문가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묘묵은 개신교 신자였다. 이런 배경에서 미션스쿨인 연희전문은 손진태보다 이묘묵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일제강점기 '미영(美英)을 격멸하자'라며 시국 강연을 다닌 이묘묵은, 리큐 보모쿠(李宮卯默)로 창씨개명했다. 이묘묵과 달리, 손진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도 하지 않았다. 가족의 회고에 따르면, 손진태는 집에서 집필할 때도 늘 한복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손진태는 용산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연희전문 도서관장 이묘묵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비슷한 시기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도서관장의 엇갈리는 이력과 행적은 눈길을 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는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되는 유진오가 많이 관여했다. 보성전문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는 왜 유진오가 아닌 손진태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했을까? 1965년 발간된 <고려대학교 60년지>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도서관의 건축이 진행 중 도서의 수집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니 이보다 먼저 교장 김성수는 도서실 설치에 관하여 유진오를 위촉한 바 있었으며, 안암동에 와서도 본관 3층에서 수집된 도서를 정리하고 열람사무를 개시하다가, 1934년 9월에는 강사 손진태를 사서로 정식 임명하고 서기 1명(홍순태)과 더불어 도서 정리 사무를 강화하고, 1937년 4월에는 서기 1명을 증원하였다.

드디어 동년 9월에 도서관은 준공되어 9월 2일에 개관하였다. 개관을 계기로 부속도서관의 규칙을 제정하고 도서관장을 학교교수 또는 전임의 강사로 임명할 것도 이사회에서 정하여 초대 관장으로 손진태가 취임하였다. 동 관장은 조선의 민속, 민담의 연구에 조예가 깊었으며 또 일시 동양문고의 사서로 있었던 만큼 도서관 경영에 안목이 있어서 적임자였다."


초기에는 유진오가 관여하다가, 일본 동양문고에서 일한 손진태를 사서와 도서관장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손진태가 '도서관 전문가'였기에 그의 임명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일본 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은 당시에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손진태를 발탁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 2편 고려대의 상징 '석탑',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잊혀졌을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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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 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춘기 딸과 고양이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하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sugi95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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