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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환영식에서 여자 배구대표팀 주장 김연경이 귀국 소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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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치킨을 시켜 먹겠다"던 여자배구 대표팀 김연경 선수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공항에 마중 나간 팬들이나 실시간 중계를 지켜본 국민 모두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9일 밤 인천국제공항에서 진행된 여자배구 대표팀 귀국 기자회견의 마이크를 잡은 유애자 한국배구연맹 경기운영위원 때문이었다. 김연경 선수만 따로 불러세운 유 운영위원은 작심한 듯 "이야기할게 많아요. 포상금이 역대 최고로 준비되어 있는 거 아시죠?"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못해 "아, 예예"라고 짤막하게 답한 김연경 선수에게 유 운영위원이 "금액도 알고 계시나요?"라며 다시 묻자 "대충 알고 있습니다"라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끝내 "얼마?"인지 재차 물었다. "6억 아니에요?"라는 답변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유 운영위원은 스스로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배구연맹 조원태 총재님께서도 2억을 투척하셨고요. 또 배구 국가대표를 지원해주시는 신한금융지주 조영병 회장님께서도 2억을 해주셨고, 대한배구협회 오한남 회장님께서도 2억을 저희한테 주셔가지고 6억과 함께 또 대한체육회에서도 격려금이 많이 나갈 겁니다."

그러나 김연경 선수를 당황케 한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 운영위원의 이러한 포상금 강조는 근거를 유추해 볼 만한 종류였다. 스포츠 유관 협회와 재벌가의 오래된 '프랜들리'한 관계 말이다. 하지만 기자들의 질문이 몇 차례 이어진 후 다시 마이크를 잡은 유 운영위원의 질문은 종잡을 수 없는 종류였다.

"우리 여자배구 선수들의 활약상에 대해서 문재인 대통령께서 우리 여자 선수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을 하시면서 격려를 해주셨고, 특히 김연경 선수에 대해서 따로 또 국민들께 감명을 준 거에 대해서 격려를 해주셨거든요. 그거에 대해 답변 주셨나요?"

이러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유 운영위원의 질문에 김연경 선수도 재차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제가요? 제가 감히 대통령님한테 뭐..."라며 말을 아끼던 김 선수는 재차 겸손과 감사가 담긴 인사로 마무리했다.

이 광경을 본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10일 하루 한국배구연맹과 대한배구협회 게시판에 비난 글이 쇄도한 것도 당연지사다.

이날 JTBC <썰전 라이브>와의 통화에서 대한배구협회 관계자는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기자회견에서는 좀 부적절한 표현이나 대화가 주고받게 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저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보기엔 해명마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엉뚱한 곳에 책임 돌리는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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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조선일보>에 실린 김태훈 논설위원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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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날 대한배구협회는 이날 여자배구 대표팀 해단식 기념 촬영 등에서 선수들보다 협회 고위층의 의전을 중시하는 듯한 권위적은 모습을 노출해 입길에 올랐다.

이 같은 구시대적인 태도에 거의 모든 매체가 유 운영위원과 배구협회에 대한 비판 기사를 쏟아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데, 그중엔 엉뚱한 곳에 책임을 돌리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11일 <조선일보>에 실린 김태훈 논설위원의 칼럼 "김연경에게 강요한 '文에 감사'" 중 일부다.
 

진보 논객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대통령은 청와대 거주 기간 내내 온종일 아부의 폭포수를 맞는다"고 썼다. 하긴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동영상을 올리면서 '달빛이 대통령 성정을 닮았다'고 하자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되는 세상이다. 이런 정권의 행태가 올림픽 영웅들까지 아부에 동원하려는 꼴불견 행태를 빚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80년대 복싱 챔피언이 벨트 차고 외쳤던 '대통령께 감사'라는 구호를 자칭 민주화 정권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유애자 운영위원의 돌발 발언이 정권에 대한 아부가 만연한 청와대 탓이라는 뉘앙스다. 유 운영위원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 출신으로 정치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운영위원의 이력은 물론 배구협회와 현 정부와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찾아 볼 수 없다. 

아전인수식 정치적 해석은 또 있었다. 같은 날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은 "도쿄올림픽의 진짜 패배자들"이란 칼럼에서 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불참을 두고 "제풀에 주저앉은 대통령의 집착을 해명하기 위해 청와대는 올림픽의 선을 넘었다. 정치색을 칠했다"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국은 45년 만에 가장 안 좋은 올림픽 성적을 거뒀다. 인구 460만 뉴질랜드와 경제 규모 세계 61위인 쿠바에도 뒤졌다. 한국 스포츠를 오염시킨 정치인과 정치병에 걸린 체육인이 진짜 패배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선수들의 감동 드라마에 올라타 '메달은 중요하지 않다'며 어깨를 토닥인다. 요컨대 자기도 잘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선수들을 향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사하라'고 요구한다.

"여기가 북한이냐"는 한일 누리꾼들의 댓글을 이상하게 비튼 매체도 있었다. 같은 날 <중앙일보>는 해당 소식을 전하며 "김연경에 '감사 강요' 논란, 日도 '남북이 똑같다' 댓글 폭주"란 제목을 달았다. 이날 오후 '조중동'은 약속이나 한 듯 이와 엇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온라인판 메인 톱기사로 배치한 바 있다.

스포츠와 정치, 그리고 미디어

유 운영위원의 발언은 뭇매를 맞을 만하다. 국가와 재벌, 협회의 '시혜'를 부각시키는 관점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나 통용되던 국가주의가 체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선수 시절을 시작하고 오랫동안 협회에 몸담았던 유 운영위원이 그 구시대적인 인식을 만천하에 자랑해 버린 셈이다.

핵심은 그 관점이 유 운영위원 개인이 아니라 여전히 체육계에 만연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앞서 도쿄올림픽 '4강 신화'를 쓴 여자배구팀이 받게 될 포상금이 1억 가량으로 알려지면서 여자배구 팬들 사이선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됐다. 비교 대상도 명확했다. 지난 리우올림픽 때 양궁 선수들에게 25억 원을 투척한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이번엔 얼마를 쏠 것이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아니나 다를까, 10일 '안산 7억·김제덕 4억'이란 제목을 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여자배구도 이런 재계 후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경제지를 중심으로 이러한 재벌기업들의 개별 종목과 선수들에 대한 지원을 찬양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일 <머니투데이> '머니S'의 "도쿄올림픽 '키다리 아저씨' 된 기업들"이란 칼럼이었다.
 

올림픽 성과는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지만 기업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업들이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한편으론 기업들의 후원이 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한만큼 비주류 종목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기대감도 있는 게 사실이다.(...) 

조정·레슬링·역도·요트·카누 등 후원이 부족한 종목들은 여전히 여유롭지 못한 환경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들의 관심이 적었던 스켈레톤·컬링은 LG전자·CJ제일제당·신세계의 후원을 받아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안았다. 기업들에 격려와 박수를 보내 스포츠 지원이 더욱 활발해지도록 해야 한다.

구시대적 인식을 온 천하에 까발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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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에서 취재진이 입국장에 들어서는 2020 도쿄올림픽 대표팀을 취재하고 있다. 20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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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호출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재벌기업들의 스포츠 후원 즉, 올림픽 마케팅은 20세기 군사정권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시사IN>은 "우리가 놓친 올림픽의 이면 - 재벌 총수들의 '통큰 지원' 뒤에 숨은 것들"이란 기사에서 그 정재계 '콜라보'의 시작을 이렇게 짚은 바 있다.
 

1981년 '88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전두환 정권은 연맹 단체장으로 '돈줄'인 재벌 회장들을 차출했다. 올림픽유치 준비위원장이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1982년 대한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힌 게 신호탄이었다. 그해 대한레슬링협회장 자리에 오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7년 IOC 위원에 당선돼 물러날 때까지 15년간 회장직을 역임했다.(...)

군사정권 시절 이처럼 재벌 회장들이 체육협회장을 맡은 것은 정부와 재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강하다. 기업 측에서 보자면 이는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한 '눈도장'이나 다름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총력동원령에는 공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 운영위원의 구시대적인 발언은 '20세기 저개발의 기억'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디 유 운영위원뿐일까. 프로 스포츠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정착한 지금까지 그때 그 시절 정경 합작 '올림픽 마케팅'의 시혜적 시선을 기억하는 이들 다수가 유 운영위원처럼 개별 협회의 현역 임원으로 활동 중이지 않을까.  

다시 일부 매체의 보도행태로 돌아가보자. 김연경 선수의 대응은 나름 '쿨'했다. 대신 팬들이 유 운영위원과 협회를 뒤흔드는 중이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정치를, 청와대를 개입시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프로 스포츠가 정착하고 기업들이 앞 다퉈 스포츠 마케팅, 올림픽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지금, 재벌들의 후원금은 손익계산에 부합하는 기업 이미지 제고의 일환일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번 논란은 오랫동안 '돈줄'로 활약했던 재벌 회장들에게, 그리고 국가에 '감사'를 표해야 협회에 도움 될 거라는 무의식이 드러난 개인 차원의 실수이면서도 일부 스포츠계 인사의 구시대적 인식을 온 천하에 까발린 부끄러운 '사건'으로 남을 전망이다.

동시에 여자배구 팬들은 물론 온 국민에게 그런 '저개발의 기억'은 촌스럽다 못해 불필요하다는 진실을 환기시켜주었다. 도리어 촌스러운 것은 재벌 기업의 후원에 찬양가를 불러대는 일부 언론일 것이고. 무엇보다 이를 어떻게든 현 정권 비판과 연결시키려는 일부 매체의 시도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자 아전인수 그 자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