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이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후 코트를 떠나고 있다.

김연경이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후 코트를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배구여제' 김연경은 2020 도쿄올림픽이 자신의 국가대표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연경이 이끄는 여자배구 대표팀은 도쿄에서 2012년 런던 대회에 이어 9년 만에 4강 진출에 성공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비록 브라질과 세르비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라이벌 중국-일본도 이루지 못한 아시아팀 유일의 올림픽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이뤄냈다. 김연경은 세르비아전이 끝나고 울컥하는 모습으로 "오늘 경기가 국가대표로 뛰는 마지막 경기다"라고 공언하며 국가대표 은퇴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팬들은 아쉽지만 16년간 한국 배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레전드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올림픽을 마치고 선수단 귀국 현장에서는 김연경의 입장이 조금 달라졌다. 김연경은 9일 인천공항에서 열린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대표 은퇴 발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은퇴 발표라고 하긴 조금 그렇고, 더 의논을 해야 할 부분이고 이야기를 더 해봐야하는 부분이다. 은퇴를 결정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결정난다면 그때 말씀드리겠다"라고 밝혔다." 분명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공공연하게 은퇴 의사를 밝혀왔던 것과는 달라진 온도차다.

'의논이 필요하다'는 김연경의 발언은 결국 배구협회와 대표팀 및 주변 관계자들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볼수있다. 김연경은 올림픽을 마친 후 오한남 배구협회 회장과 면담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김연경의 국가대표 은퇴와 지속 여부가 최종적으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여자배구에게 '포스트 김연경' 시대에 대한 대비는 중요한 화두다. 한국은 김연경이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대표팀에 합류한 2005년 이후, 올림픽 3회 연속 본선진출과 4강 2회, 8강 1회,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화려한 성과를 올렸다. 김연경이 없었다면 한국 여자배구가 국제무대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자배구는 이번 올림픽에서 4강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달성하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전망이 그리 밝다고는 할수 없다. 당장 김연경 한 사람만 은퇴한다고 해도 사실상 대표팀 전력의 50% 이상이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에 양효진, 김수지, 김희진 등 김연경과 동세대라고 할 수 있는 30대 초중반의 주축 멤버들도 대거 함께 태극마크를 내려놓을 가능성이 높기에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

한국 여자배구는 넥스트 김연경 시대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꼽히던 이다영-이재영 자매가 불미스러운 학폭 논란에 휘말리며 사실상 국내 배구계에서 퇴출 위기에 몰렸다. 박정아-이소영-강소휘 등이 있지만 아직 김연경의 빈 자리를 메우기에는 부족하다. 올림픽 4강이라는 업적을 세우며 선수단으로부터도 많은 지지를 얻었던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과의 재계약 여부도 불투명하다. 라바리니 감독이 김연경 없이 리빌딩이 불가피한 한국 대표팀을 계속 맡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배구계나 팬들 사이에서도 김연경이 좀더 국가대표팀을 지켜주기를 기대하는 반응도 많다. 올림픽에서 증명되었듯이 김연경은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월드클래스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가까운 시기에 대표팀이 도전할 수 있는 가장 큰 대회는 내년에 열리는 2022 아시안게임이다. 중국, 일본, 태국 등과 경합해야 하는데 냉정히 말해 김연경이 빠진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메달권을 장담하기 어렵다. 특히 이번 올림픽에서 망신을 당한 중국과 일본이 더욱 아시안게임에서 독기를 품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김연경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위해서라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정상에서 마무리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냐는 주장도 있다. 김연경은 이미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기왕이면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챔피언의 자리에서 웃으며 떠나는 것이 가장 김연경의 이름값에 어울리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2024 파리올림픽 출전까지 기대하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선수 본인의 의지와 행복이다. 선수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김연경에게 어차피 끝자락에 이른 국가대표 경력을 이제와서 1~2년 억지로 연장하거나 아시안게임 우승이 과연 얼마나 큰 동기부여가 될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른 김연경에게 4년 뒤 파리올림픽은 너무 먼 이야기다.
 
김연경이 존경하는 선수라고 밝혔던 축구스타 박지성은 2011년 약 30세의 나이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성인대표팀에 발탁되기 시작한 지 약 10년, A매치 100경기 출전의 기록을 남겼다. 박지성은 유망주 시절부터 소속팀과 각급 대표팀을 넘나들며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해 무릎이 망가져 더 이상 국가대표를 소화하기 어려웠던 것이 이른 은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종목은 다르지만 김연경은 2005년 대표팀에 데뷔하여 무려 16년간을 활약했다. 박지성보다 더 일찍 프로와 대표팀에 데뷔하여 더 많은 경기수를 소화했고, 더 오랜 기간을 대표팀에 헌신하며 더 많이 혹사당했다. 배구선수에게 치명적인 무릎수술을 받은 것만 무려 3번이다.

항상 최고였고, 슬럼프에 빠지거나 대체자도 없었기에 김연경은 긴 시간동안 잠시라도 쉴틈이 없었다. 김연경을 응원하는 팬들이 배구협회의 부실한 선수관리와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다. 최근 지난 귀국 기자회견장에서 '인사 강요' 논란까지 벌어지면서 배구 팬들은 "이런 무책임한 배구협회에 더 이상 김연경을 맡길 수 없다"며 성토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경은 강산이 한 번 바뀔 시간 동안 월드클래스급 기량을 유지해왔고, 대표팀이 참가하는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흥망성쇠를 함께하며 국가를 위하여 묵묵히 헌신해왔다. 이런 김연경에게 아직도 뛸 만하니까, 너만한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대표팀을 위하여 좀더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대놓고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김연경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국가대표 은퇴 가능성을 꾸준히 밝혀왔고 주변의 높은 기대치나 체력적 부담에 다소 버거워하는 기색도 드러냈다. 특히 지난해는 올림픽을 앞두고 좀더 편안한 환경에서 배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몸값까지 깎아가며 국내 복귀를 선택했으나 쌍둥이 자매를 둘러싼 학폭 논란과 불화설에 휘말리며 무너진 팀의 뒷수습까지 감당해야했다. 심지어 그 후유증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1년간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김연경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김연경이 귀국 기자회견에서 은퇴 결정을 잠시 유보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배구협회 측에서 김연경 단독으로 은퇴를 섣불리 결정하는 모양새를 만류했을 것이고, 김연경의 발언 역시 협회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잠시 한발 물러섰을 가능성이 높다. 김연경이 그간 대표팀과 한국 여자배구에 헌신한 노고를 고려할 때 억지로 선수를 설득하여 은퇴를 만류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이, 박수치며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한다. 한국 여자배구도 언제까지 김연경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한 번은 맞이해야 할 순간이라면 얼마나 최상의 예우를 갖춰서 레전드를 아름답게 떠나보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코로나19가 호전되는 시기를 고려하여 팬들과 함께하는 공식 은퇴식이나 은퇴 경기를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연경이라면 그 정도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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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은퇴 배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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